소설리스트

76화. Secret (1) (76/156)

76화. Secret (1)2021.03.24.

“난과 솥?”

‘난’은 모르겠지만 ‘솥’은 왠지 가마솥의 ‘솥’일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설마 내 가마솥을 가져간 사람이 그 남자인가?’

엘리사는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 책을 뒤져봤지만 이 책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글자는 난과 솥이 전부였다. 처음 발견한 책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글자는 ‘무’였다. ‘무’와 ‘난’과 ‘솥’. 어떻게 엮어도 조합이 이상했다. 에이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책에 표시해두었다는 게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렇다는 건 좀 더 찾아봐야한다는 건데, 이 많은 책을 다 뒤져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서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쪽지에 적으면 되지,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엘리사는 에이지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궁금했다. 그래서 더욱 찾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책들을 뒤졌다. 그렇게 네 번째 글자, ‘하’를 찾았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칼베른이었다. 칼베른은 정리한다고 해놓고 정리는커녕 오히려 책을 막 뒤지고 있는 엘리사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뭐 하는 거지?”

“찾을 게 있어서요.”

엘리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계속 쭈그려 앉아 책을 뒤졌더니 움직일 때마다 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1층 정리가 얼추 끝나서.”

“벌써요?”

“벌써라니. 해가 지고 있어.”

그러고 보니 창밖이 붉게 물들었다. 글자를 찾는 데 집중하느라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엘리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정리하면서 뭔가 찾은 거 있어요?”

“딱히. 전부 버리지 않고 모아뒀으니 그대가 확인해 봐. 내가 보기엔 필요 없어 보여도 그대의 입장에선 아닐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에이지가 남긴 흔적을 찾는 건 오래 걸리고, 지금 당장 할 필요가 없으니 엘리사는 일단 1층으로 내려가 칼베른과 호위 기사들이 정리한 물건들을 확인했다. 부모님의 유품은 대부분 2층 침실에 있었기 때문에 꼭 챙겨야 할 물건은 없었다.

“없어요. 전부 버려도 좋아요.”

“그럼 내일 사람을 불러 전부 버리라고 하지. 2층 정리는 어떻게 되고 있지? 아까 보니까 거의 안 된 것 같은데, 도와줄까?”

“아니요. 2층은 저 혼자 할게요. 아!”

엘리사는 거절했다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각나 짧게 탄성을 뱉으며 말을 바꿨다.

“연구실에 있는 책들을 전부 공작저로 가져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물론. 호위 기사들에게 바로 옮기라고 하지.”

칼베른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호위 기사들을 부르려고 하자 엘리사가 막았다.

“제가 할게요. 지금 당신이 명령하면 안 들어주잖아요.”

“…….”

그 말에 칼베른이 표정을 굳혔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엘리사는 호위 기사들과 대화를 하느라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2층에 있는 책들을 전부 마차에 실어줄래요?”

“물론입니다, 마님.”

엘리사의 지휘 아래 호위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칼베른은 작은 제 손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작고, 제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같은 모습으로 보낸 어린 시절은 이렇게 무력하지 않았다. 그땐 클라우드 소공작이었으니까. 사람들은 그가 어려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랬는데, 클라우드 소공작이라는 명함을 벗으니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였나.’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무기력함에 칼베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잡혔다. 그는 심각하게 클라우드 소공작이라는 명함을 빼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칼베른의 심각한 표정을 본 엘리사가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무것도……아닙니다.”

칼베른은 무심결에 반말하려다 엘리사의 뒤로 부지런히 책을 옮기는 호위 기사들을 보고 말을 높였다. 그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평소엔 손바닥 뒤집듯이 태세전환을 잘하던 그가 이렇게 어색한 모습을 보이니 웃겼다.

“푸흡.”

이에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칼베른이 불만스레 눈매를 구기며 돌아섰다.

“책을 다 싣는 대로 공작저로 돌아가죠.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휙, 밖으로 나갔다. 성질머리 하곤. 엘리사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순순히 공작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

“그러고 보니 주변 탐색은 어떻게 됐어요? 목격자는 찾았나요?”

마차를 타고 클라우드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엘리사는 맞은 편에 앉은 칼베른에게 물었다.

“아니. 그 시간엔 대부분 일을 하러 나갔고, 남은 사람들도 유랑 극단을 보러 광장에 가는 바람에 목격자가 없어. 아마 사람이 없는 타이밍에 맞춰 온 거겠지. 목격자가 없어야 완전 범죄를 꿈꿀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은 계획된 범죄라는 건가요?”

“글쎄. 어떨지는 범인을 잡아봐야 알 수 있겠지. 목격자가 있으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텐데…….”

칼베른이 인상을 살짝 쓰며 팔짱을 꼈다. 목격자. 엘리사는 에이지를 떠올렸다. 도둑이 집에 들어왔을 당시 에이지가 집에 있었다면, 그가 도둑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문제는 그 남자도 어디에 갔는지 모른다는 거지.’

혹시 책에 단서를 남겨 두진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서 찾아보고 싶었다. 공작저로 돌아온 엘리사는 저녁을 먹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책을 살펴봤다. ‘리베리아’ 표식을 큼지막하게 해두거나, 몇 페이지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다고 표시를 해두었다면 찾기 쉬웠을 텐데 그게 아닌지라 글자 하나를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을 겪는 바람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함에 절어 있는 것 역시 글자를 찾는 데 방해가 됐다. 새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로다. 쏟아지는 졸음에 눈앞이 점점 흐려지면서 이젠 그 조차도 분간이 힘들었다. 엘리사는 잘 마시지 않는 커피까지 마시며 졸음을 이겨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수마와의 싸움에서 진 엘리사의 고개가 맥없이 숙어졌다. 그녀가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이 손과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엘리사가 책과 씨름하는 동안 칼베른은 에드윈을 불러 이것저것 명령했다.

“그녀의 집을 지킬 경비들을 보내라. 그리고 엘리사 제르나라는 이름이 적힌 용병 단원 패가 암시장이나 어딘가에 나오면 즉시 그걸 판매하는 자를 잡아들여.”

“네.”

“그자가 엘리사의 집에 든 도둑과 연관이 있는지 꼼꼼하게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마솥을 찾아 봐.”

뜬금없이 가마솥을 찾으라니. 영문 모를 명령에 에드윈이 어리둥절하자 칼베른이 설명을 덧붙였다.

“엘리사가 연금술을 할 때 쓰던 가마솥을 도둑맞았다. 그걸 되찾아오도록.”

“아, 연금술이요.”

에드윈은 예전에 동화책에서 봤던 마녀가 쓰던 가마솥을 떠올렸다. 연금술사가 어떤 가마솥을 쓰는지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거겠지.

“없어진 가마솥을 되찾는 것보다 다시 사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녀에게 듣자 하니 특별한 가마솥이라고 하더군.”

“그럼 당연히 되찾아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인께 물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마솥을 찾을 동안 쓰실 것도 필요하실 테니까요.”

“음.”

칼베른은 잠시 고민했다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님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지.”

굳이 직접? 에드윈은 의아했지만, 의문을 덧붙이지 않았다. 칼베른은 하녀에게 엘리사가 저녁 식사 이후, 지금까지 계속 집무실에 틀어박혀 책을 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부인.”

똑똑똑-.

“부인.”

몇 번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뒤따라온 에드윈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침실로 돌아가신 거 아닐까요?”

“확인해보지.”

칼베른은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잠이 든 엘리사가 보였다. 어찌나 곤히 자는지 칼베른이 지척에 다가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칼베른은 엘리사를 흔들어 깨우려다 그녀가 오늘 하루 무척 피곤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깨우는 대신 그녀를 안아 들어서 옮기기로 했다. 칼베른은 그러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작은 손을 보고 멈칫했다. 작아진 몸뚱이로는 엘리사를 들어 안아 옮길 수가 없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칼베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려진 게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부인을 옮기겠습니다.”

눈치껏 칼베른의 상태가 왜 저런지 에드윈이 엘리사 쪽으로 손을 뻗자 칼베른이 막아섰다.

“됐다. 그냥 담요를 가져와라.”

“네.”

에드윈이 담요를 가지러 나가고, 칼베른은 크게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윈이 엘리사를 안아 드는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칼베른은 저도 모르게 에드윈을 막았다. 들어 안아 침실로 옮기는 게 아닌 담요를 가지고 오라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이상하군.”

왜 그랬는지, 왜 이런 감정을 드는지 이상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알 것 같은데 그걸 깨달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

그만큼 감정이 요동쳤다. 칼베른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오랫동안 곤히 잠든 엘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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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 모습을 에드윈이 문 뒤에서 몰래 지켜봤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하고, 어두웠다. ****

“으으, 고개 아파.”

잠에서 깬 엘리사는 신음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밤새 앉아서 잤더니 고개가 뻐근했다. 어깨랑 허리도 아팠다. 그나마 담요를 덮고 잔 덕분에 감기에 걸리진 않았다.

‘누가 덮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센스 있네.’

그 센스를 좀 더 발휘해서 침실에 가서 자라고 깨워줬으면 좋았으련만. 하긴 사용인들은 함부로 주인을 깨울 수 없으니, 담요만 덮어준 것도 이해는 됐다. 엘리사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사교 클럽에 가는 칼베른을 배웅하기 위해 빠르게 준비하고 홀로 내려왔다. 이미 준비를 마친 칼베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와요.”

“…….”

사교 클럽에 어지간히도 가기 싫은지 칼베른의 표정이 뚱했다.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해 보였지만, 엘리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에이지의 일로 가득 차서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어젯밤에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미처 찾지 못한 에이지의 단서를 어서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사는 약간 늦은 아침을 먹고 칼베른의 집무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먼저 와 있던 에드윈이 인사를 건넸다. 도대체 저 남자는 언제 출근하는 걸까. 엘리사는 이 저택에 사는 자신보다 항상 먼저 집무실에 와 있는 에드윈이 신기했다.

“오늘 할 일은 뭔가요?”

“이겁니다.”

책상에 쌓인 서류를 본 엘리사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역시나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한숨을 쉰다고 해야 할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서 해치우자고 마음을 먹은 엘리사는 책상에 앉아 우선 칼베른의 스케줄이 적힌 수첩을 펼쳤다.

“어라?”

앞으로 칼베른의 일정이 어떤지 확인하려고 그런 건데,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고 에드윈에게 물었다.

“아론 경, 혹시 일주일 뒤에 특별한 일정이 있나요?”

“죄송하지만 부인의 일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저 말고 소공작님이요.”

엘리사가 스케줄 노트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다른 날에는 일정이 빼곡한데 이날에만 아무런 일정이 없어서요.”

마치 이날을 비우기 위해 다른날 일정을 빼곡하게 잡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는 건 굳이 이날을 비워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궁금해서 물어봤다.

“…….”

스케줄 노트를 확인한 에드윈의 입술이 일자를 그리며 닫혔다.

“왜 그래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에드윈은 드물게 시선을 피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드윈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재빠르게 집무실을 나갔다.

‘뭔가 있는 모양이네.’

그것도 아주 큰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에드윈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그 사실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3개월 전에도 하루를 통째로 비운 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역시 3개월 전에도 칼베른은 하루를 통째로 비웠었다. 그보다 3개월 전에도 그랬었고. 무슨 일이 있길래 3개월에 한 번씩 스케줄을 비우는 걸까. 엘리사는 몹시 궁금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이 없으니 애써 궁금증을 삼키며 스케줄 노트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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