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만 믿어2021.03.20.
호위 기사가 집을 수색할 동안 엘리사 일행은 바깥을 살펴봤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엘리사와 달리 칼베른과 오스카는 현관문과 창틀, 울타리, 심지어 금이 간 곳까지 빠짐없이 살펴봤다.
“이거 원래 깨져 있었어?”
오스카가 사람 손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깨진 창문을 가리키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어제는 커튼이 쳐져 있어서 확인 못 했지만 제가 이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는 안 깨져 있었어요.”
“흐음, 그럼 부인이 없는 동안 누가 밖에서 유리창을 깨고 집 안에 침입한 모양이네. 잠금 장치도 풀려 있고 말이지.”
“침입 통로가 창문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현관문을 살피던 칼베른이 말했다.
“현관문 잠금 장치가 고장 났고, 열쇠 구멍에 날카로운 자국이 잔뜩 나 있는 걸 봐서 범인은 문을 억지로 따고 들어간 듯 합니다.”
“아, 맞아요. 열쇠로 문을 열려고 했는데, 문이 열려 있어서 조금 의아했어요.”
사실 에이지가 실수로 잠그지 않은 건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대로 말할 수 없으니 엘리사는 살짝 비틀어 말했다.
“안전 고리도 비틀어져 있는 것 같은데.”
칼베른은 안전 고리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어려진 그의 키로는 손이 닿지 않았다. 칼베른은 인상을 팍 쓰며 안전 고리가 적이라도 되는 양 노려봤다.
“제가 확인할게요.”
엘리사가 칼베른을 대신 해서 안전 고리를 확인했다.
“정말 비틀어져 있네요.”
“안으로 굽은 걸 봐서 잠겨 있는 걸 억지로 연 것 같아.”
창문 수색을 끝낸 오스카가 다가와 거들었다.
“그런데 이 안전 고리는 집 안에서만 잠글 수 있는 거잖아. 그 말은 누군가 침입했을 당시 집에 이미 사람이 있었다는 거 아니야?”
“!”
오스카의 날카로운 지적에 엘리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그들에게 에이지가 이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가슴이 내려앉았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람이 에이지가 아닌 것 같아 안도한 것이었다. 만약 에이지가 집 안을 이꼴로 만든 범인이었다면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침입한 흔적이 두 개인 걸 봐서 범인도 두 명인 것 같은데.”
“현관문으로 들어와서 창문을 깨고 나갔을 가능성은요?”
칼베른이 대답했다.
“그건 아닐 거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 번거롭게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지.”
오스카가 말을 거들었다.
“게다가 유리 조각들이 창문 안쪽에 흩어져 있어. 이건 밖에서 깨고 들어갔다는 명백한 증거야.”
‘그럼 창문을 깨고 들어온 사람이 에이지인 모양이네.’
어젠 놀라서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집 열쇠가 없는 에이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에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엘리사는 창문을 깨고 들어온 사람이 에이지라고 확실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현관문은 멀쩡했으니까. 현관문을 부순 사람은 에이지가 아닌 제 3자였다. 엘리사 일행이 바깥을 살필 동안 집 안을 수색하고 돌아온 호위 기사가 보고했다.
“2층까지 수색해 본 결과 이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샅샅이 뒤진 거 맞지?”
“네. 옷장과 침대 밑까지 전부 다 확인해봤습니다.”
역시 에이지는 집에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안전하길 바라며 엘리사는 호위 기사에게 물었다.
“다른 곳도 이렇게 엉망진창인가요?”
“네. 그나마 2층에 책이 많은 방은 멀쩡합니다.”
연구실을 말하는 거였다. 엘리사는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2층으로 향했다. 칼베른은 아까처럼 엘리사를 말리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오스카와 호위 기사도 함께였다. 2층에 도착한 엘리사는 연구실에 가기 전, 그녀의 침실부터 확인했다. 호위 기사가 말한 대로 침실도 엉망진창이었다. 침대는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옷장 문은 반쯤 부서져 덜렁거렸다. 화장대는 물론 옷장 서랍도 전부 열려 있었다.
“보아하니 뭔가 찾으려고 한 모양이네.”
뒤따라 온 오스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칼베른은 엉망진창인 침실을 쓱 훑어보곤 엘리사에게 물었다.
“없어진 물건이 있나?”
“그건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전에 연구실부터 가볼게요.”
엘리사는 침실에서 나와 옆방인 연구실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지만,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우스스 바닥에 떨어져 있어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없어.”
하지만 엘리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닥에 떨어진 책들이 아니었다.
“가마솥이…… 없어.”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며 마법진 중심에 있어야 할 가마솥이 보이지 않았다. 칼베른도 가마솥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엘리사에게 물었다.
“범인이 가마솥을 훔쳐간 건가?”
“그건 아닐 거예요. 그 가마솥은 겉보기엔 평범한 가마솥이거든요.”
“마법 가마솥인 걸 알아보고 들고 갔을 수도 있지.”
“그건 더더욱 아닐 거예요. 그 가마솥에는 제 마나가 깃들어 있어 제가 그린 마법진에서만 쓸 수 있으니, 알아 봤다고 해도 들고 갈 이유가 없어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가마솥의 존재를 모르는 오스카가 물었지만, 엘리사도 칼베른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눴다.
“거치적거려서 다른 곳에 치워놨을 수도 있으니 찾아보지.”
“이봐.”
“그럴 가능성도 적다고 생각하지만…… 네, 그래요. 뭐가 더 없어졌는지, 다른 곳이 어떤지 확인해 볼 겸 찾아봐야겠어요.”
“내 말 안 들려?”
“혹시 범인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도와주겠다.”
“야!”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칼베른과 엘리사가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휙 밖으로 나가자 오스카는 헛바람을 내쉬며 유일하게 그의 곁을 지킨 호위 기사에게 물었다.
“지금 나 무시 당한 거지?”
“그런 것 같습니다.”
충직하게 나온 대답에 오스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위 기사를 쳐다봤다.
“이럴 땐 아니라고 위로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거짓 위로를 바라신다면 그러겠습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 2층은 물론 1층, 그리고 집 주변까지 전부 다 뒤져봤지만, 가마솥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범인이 훔쳐간 건가?’
도대체 왜? 무거워서 가지고 가기 힘들 뿐더러, 가지고 간다고 해도 고물상에 파는 것 말곤 쓸데가 없을 텐데. 엘리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혀를 찼다. 자신이 범인이었다면 가마솥이 아닌 책들을 들고 갔을 것이다. 책장에는 자신이 부지런히 헌책방을 드나들며 모은 오래된 연금술서들이 있었으니까. 그리 비싼 책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가마솥보다는 비쌌다. 그런데 책은 가져가지 않고 가마솥만 덜렁 가져가니 의아했다. 더 재미있는 건 범인은 잠겨 있는 화장대 서랍을 억지로 열어 뒤져봤으면서, 안에 들어 있는 엄마의 유품인 목걸이는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목걸이 역시 보석 하나 없고, 목걸이 줄도 은이라서 비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마솥보단 비쌌다.
“빈집털이범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빈집털이범이었다면 이런 걸 두고 그냥 갔을 리가 없었다. 그럼 범인의 목적이 도대체 뭘까. 뭐 때문에 이 집에 들어온 거지? 의아해하며 달리 사라진 물건이 있나 살피던 엘리사는 아드카만 용병 단원 패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것도 범인이 들고 간 건가?”
“뭘 말이지?”
“깜짝이야.”
인기척도 없이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엘리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 뒤를 돌아봤다. 칼베른이 문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었다.
“놀랐잖아요.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충분히 냈는데. 그대가 집중하느라 못 들은 거지.”
“아무튼요. 사람 놀래키지 말아요. 자꾸 놀라면 수명 줄어든단 말이에요.”
한순간 칼베른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충격을 받은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다.
“왜 그래요?”
엘리사가 걱정스럽게 묻자 칼베른이 목소리를 쫙 깔며 물었다.
“정말로 놀라면 수명이 줄어드는 건가?”
“네? 푸흡,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세상에, 이런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엘리사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농담이에요, 농담.”
“……농담?”
“네. 그러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그제야 농담이라는 걸 안 칼베른은 농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게 다소 창피했는지 미간을 확 좁혔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범인의 흔적이라도 찾은 건가요?”
“아직. 집이 너무 엉망진창이라서 찾기 힘들군.”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어요.”
“그대는? 방금 뭔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어쩌지. 말할까. 엘리사는 괜히 말했다가 사라에게 피해가 갈까봐 걱정됐다.
“사실 용병 단원 패가 없어졌어요.”
그러나 이대로 묵과했다가 그 신분 패가 범죄에 쓰이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니 고민 끝에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용병 단원 패? 용병단에 들었던 건가?”
“들려고 했었죠.”
칼베른이 어려지지 않고 예정대로 이혼했다면, 아드카만 용병단에 들어 제국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을 돌며 연금술을 공부했겠지. 신기한 재료들도 많이 구하고. 그걸 생각하니 속이 쓰려 엘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 때문에 한숨이 나온 것도 있었다.
“범인이 신분 패를 이상한 곳에 쓰진 않을지 걱정이네요.”
이럴 줄 알았다면 그 패도 공작가에 들고 갈 걸. 아니, 기념하겠다고 들고 있지 말고 사라에게 반납할 걸.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막아줄 테니까.”
“방법이 있나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 어떤 방법이 좋을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진짜 방법이 있는 거 맞겠지? 엘리사는 약간 의심됐지만, 지금 상황에서 믿을 사람이 칼베른 밖에 없으니 정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신분 패를 가져간 놈과 가마솥을 가져간 놈, 그리고 집 안을 이 꼴로 만든 놈 모두 동일인물이니 범인을 꼭 잡고 싶었다.
“부탁드릴게요. 꼭 범인을 잡아주세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돌발적인 엘리사의 행동에 칼베른은 약간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믿어.”
**** 잠시 후, 칼베른이 부른 클라우드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이 도착했다. 총 4명으로 엔트도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난 슬슬 가봐야겠어.”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오스카가 칼베른과 엘리사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다음에는 환영 파티 때 보겠지? 두 사람 다 그때까지 잘 지내.”
오스카가 훌쩍 떠나고, 칼베른은 호위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두 명은 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수상한 사람을 봤는지 탐문해보고 다른 두 명은 집 정리를 돕도록.”
평소라면 명령을 내리자마자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을 텐데, 왜인지 그들은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고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 호위 기사들을 혼내주려던 칼베른은 문득 지금 자신이 ‘카일 브리슈’의 모습이라는 걸 상기하고 멈칫 했다. 저택에 사는 식객 주제에 이런 명령을 내리니, 호위 기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칼베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엘리사를 돌아봤다.
“음, 칼이 시키는 대로 해요.”
“네, 마님.”
눈치껏 칼베른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챈 엘리사가 말하자 그제야 호위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전 2층을 정리하고 있을게요.”
“도와줄까?”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칼베른의 도움을 거절하고 홀로 2층으로 올라온 엘리사는 연구실로 들어가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주웠다.
‘전부 공작저로 가져가야지.’
책 하나하나의 가치는 얼마되지 않더라도 엘리사에겐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게다가 칼베른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약을 만들기 위해 어떤 책이 필요할지 모르니 전부 다 들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마솥은 어떡하지?’
똑같은 가마솥을 새로 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가마솥에 다시 마나를 부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재수가 없으면 한 달도 걸렸다. 즉, 그동안 마법약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이니 그게 싫어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책을 주웠다.
“앗.”
그러다 손이 미끄러져 책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책은 날개처럼 책장을 활짝 펼쳤다. 손떼가 묻어 약간 너덜너덜한 종이에는 누군가 그려놓은 빨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뭐야. 누가 낙서해둔 거야?”
이 책에는 이런 낙서는 없었다. 자주 보던 책이라서 확실히 기억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기함할만한 짓을 해놓았단 말인가.
“설마 그 남자인가?”
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 말고는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냥 장난으로 동그라미를 쳐뒀다고 하기엔 글자에 딱 맞춰 그려놓은 게 수상했다.
“혹시 다른 책에도 있나?”
하지만 어떤 책에서 찾아야 하지? 곰곰이 생각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엘리사는 그 책의 표지에 ‘리베리아’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설마 이게 표시인가?”
금방 ‘리베리아’라고 적힌 책을 또 발견한 엘리사는 책을 훑어봤다.
“찾았다.”
이번에는 무려 동그라미가 두 개였다. 엘리사는 동그라미가 쳐진 글자를 크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