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봄이 다시 찾아온2021.03.17.
그의 목소리 역시 아까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칼베른의 대답에 오스카도 엘리사를 흘끗 쳐다봤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엘리사는 이상하게 양심이 쿡쿡 찔려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 건 아니에요.”
왜인지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말이 끊겼다. 엘리사는 잠시 심호흡하며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궁금하긴 했어요. 걱정되기도 했고. 그래서 어젯밤에 사교 클럽이 어땠냐고 물어봤던 거고요.”
칼베른은 말없이 물끄러미 엘리사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약간 민망해진 엘리사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오늘 온 건 제 의지가 아니에요. 오웬 자작님이 당신을 보러 가고 싶은데 명분이 없다면서 절 억지로 끌고 오셨죠.”
그 말에 칼베른이 휙, 고개를 돌려 오스카를 쳐다봤다.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에 오스카가 시선을 피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너무하네.”
그러면서 엘리사에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데 그냥 안고 가면 되지, 꼭 나한테 화살을 돌려야 했어?”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안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왜 잘못이야. 부인이 남편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건데.”
“나중에 부인을 맞이하시면 꼭 걱정해달라고 해주세요.”
“핫.”
오스카가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약간 찡그린 눈썹에 언짢음이 묻어 있었다. 뭐지,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영문 모를 오스카의 반응에 엘리사가 의아해하자 칼베른이 한숨을 내쉬며 말해주었다.
“이미 결혼하셨다.”
주어가 없었지만, 오스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오스카가 결혼했다고?’
그 말인즉, 황태자비가 있다는 건데 엘리사는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황태자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에 황실에 누가 결혼한다고 크게 축제를 열었었지.’
그 누군가가 혹시 오스카였던 걸까? 엘리사는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10년도 더 된 일이기도 했고, 그냥 황족 중 누군가가 결혼하는구나, 하고 가볍게 넘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
“받아.”
“어?”
그러려고 했는데 갑자기 시야가 노랗게 물들었다. 칼베른이 프리지아 꽃다발을 내민 탓이었다. 엘리사가 엉겁결에 꽃다발을 받자 오스카가 짓궂게 웃었다.
“역시 그 꽃다발의 주인은 소공작 부인이군. 하긴 당연한 거겠지. 승리의 꽃다발은 우승자의 가족 혹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주는 거니까.”
엘리사의 귀에는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단어만 박혔다. 정말 이 꽃다발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면 이건 자신이 받으면 안 되는 꽃다발이었다.
“돌려드릴게요.”
“됐어. 그대 말고 달리 줄 사람도 없으니 그냥 가지도록 해.”
“그래도…….”
“그냥 가지지 그래?”
오스카가 칼베른의 편을 들었다.
“그가 말한 대로 부인 말고 달리 꽃을 줄 가족이 없으니까.”
그래, 맞아. 사랑하는 연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승리의 꽃다발을 주는 거였지. 엘리사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비록 계약 결혼이고 이혼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은 칼베른과 자신이 부부이자 가족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요.”
그럼 이 꽃다발을 받아도 문제가 없겠지.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꽃다발을 내려다 봤다. 샛노란 프리지아를 보고 있으니 이미 지나간 봄이 다시 찾아온 것만 같아 마음이 약간 설렜다.
****
“여기 있었군요, 카일 군.”
잠시 후, 레트안 백작 부인이 직원들을 데리고 나타나자 오스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쉽게 됐군요. 백작 부인.”
내기의 결과를 말하는 거였다. 레트안 백작 부인의 미간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내기에서 이기신 걸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레트안 백작 부인이 오스카를 황태자라고 부르자 뒤에 서 있던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송구합니다. 오웬 자작이라고 불렀어야 했는데.”
레트안 백작 부인이 뒤늦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고의 같았지만, 저리 정중하게 사과하니 고의냐고 따질 수가 없었다.
“괜찮아. 어차피 이제 가려고 했거든.”
오스카는 들킨 김에 말을 놓았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 지금도 민폐인데, 더 민폐가 되기 전에 이만 가봐야지.”
민폐인 건 알고 있구나. 엘리사를 비롯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참, 시온 군은 어떻지? 경기를 보니까 목검에 꽤 심하게 맞은 것 같은데.”
“다행히 멍이 든 것 말고 뼈가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돌아선 오스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레트안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카일을 데려가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지?”
“네, 그러십시오. 어차피 이제 곧 하원 시간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럼 소공작 부인과 난 먼저 마차에 가 있을 테니 카일도 준비하고 나오도록 해.”
오스카는 그리 말하며 카일의 머리를 헤집었다. 영락없는 어린아이 취급에 칼베른은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며 오스카의 손을 쳐냈다. ****
“드디어 갔네.”
레트안 백작 부인은 창문 너머로 엘리사 일행이 탄 마차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며 데아른이 기다리고 있는 원장실로 돌아갔다. 데아른이 아고라 사교 클럽에 찾아온 건 시온과 칼베른의 경기가 막 시작했을 때였다. 오스카에 이어 데아른까지 오니 백작 부인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데아른을 서둘러 원장실로 데리고 왔다. 원장실에 가려면 불가피하게 정원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가야 하는데 하필 정원에선 칼베른과 시온이 검술 대련을 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데아른이 검술 대련에 관심을 가질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데아른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백작 부인에게 오스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카일 브리슈’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정말로 그 아이를 보러 왔다고?”
“네. 지금도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카일 군과 시온 군이 검술 대련을 하는 걸 지켜보고 계십니다.”
“흐음, 그래?”
지금이라도 가겠다고 하면 어쩌지. 백작 부인은 걱정했지만, 이번에도 데아른은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대신 이상한 걸 요구했다.
“카일 브리슈의 생활 기록부를 가져와.”
카일은 사교 클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생활 기록부에 적힌 내용이 거의 없었다. 데아른도 그 사실을 알 텐데 왜 생활 기록부를 요구하는지 의아했지만 백작 부인은 군말 없이 데아른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대련이 끝났다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카일이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오스카를 만나러 갔다.
‘괜히 내기했어.’
오스카가 자신만만하게 카일에게 걸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백작 부인은 오스카가 이상한 걸 요구하진 않을지 덜컥 겁이 났다. 이 사실을 안 데아른이 화를 낼까 봐 무섭기도 했고.
‘일단 데아른에겐 오스카와 내기했다는 건 숨기는 게 좋겠지.’
원장실 앞에 도착한 백작 부인은 크게 심호흡한 뒤, 노크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없었다.
‘없는 건가?’
백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생활 기록부를 보고 있는 데아른이 보였다.
“황자 전하.”
백작 부인은 데아른의 옆으로 다가가 재차 그를 불렀다. 그제야 고개를 든 데아른이 보고 있던 생활 기록부를 가리켰다.
“이거, 자네가 작성한 건가?”
“아니요. 담당 선생이 하고 있습니다.”
“생활 기록부 내용 말고, 이 위에 있는 인적 사항을 말하는 거다.”
“아, 그거라면 카일 군이 직접 작성했습니다. 원래 보호자가 작성하는 건데, 카일 군은 보호자가 따라오지 않았거든요.”
“그 꼬마가 직접 작성했단 말이지…….”
데아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서류를 내려다 봤다. 고작 6살밖에 안 된 아이가 썼다고 하기엔 글씨는 굉장히 정갈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글씨를 잘 쓰는 아이들이 종종 있긴 했으니까. 문제는 글씨체였다. 데아른은 이 글씨체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칼베른 클라우드, 그가 직접 작성한 서류에서 봤었다. **** 엘리사는 뒤늦게라도 에이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자 중간에 세워달라고 했다. 그러자 칼베른은 아예 목적지를 엘리사의 집으로 바꿨다.
“그냥 중간에 내려주세요. 거기서 말을 빌려 타고 가면 돼요.”
“그 옷을 입고 말을 타는 건 힘들 텐데.”
그건 그랬다. 엘리사는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으로서 사교 클럽에 방문하기 위해 외출할 때 자주 입던 편한 평상복이 아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음, 그럼 마차를 빌려 탈게요.”
“됐어. 그리 먼 곳도 아니고, 호위 기사도 없이 그대 혼자 보낼 수 없으니 같이 가도록 하지. 호위 기사가 올 때까지 같이 있어 줘야 하기도 하고.”
허, 데려다주는 것뿐만 아니라 호위 기사가 올 때까지 같이 있어 준다고? 엘리사는 기함하며 손을 내저었다.
“바쁘신데 그러지 않아도 돼요.”
“안 바빠.”
이번에도 오스카가 거들었다.
“칼베른은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고, 나 역시 오늘은 하루종일 스케줄을 비웠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 하하…….”
어쩜 저리도 얄미운지. 때리는 사람보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더 얄밉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엘리사는 어떻게든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어찌된 게 찰거머리보다 질겼다.
“알았어요. 대신 제가 집 정리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래.”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에이지를 숨길 시간을 벌었다. 에이지를 2층 연구실에 숨겨두고, 마법진을 핑개로 두 사람이 절대 2층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으면 에이지가 있다는 건 들키지 않을 것이다.
‘호위 기사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오스카와 칼베른을 돌려보낼 수 있으니까. 호위 기사들이 이렇게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었다. 마차는 순조롭게 달려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마차를 내리기 전, 두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제가 부를 때까지 절대 집에 들어오시면 안 돼요.”
“그렇게 강조하면 가고 싶어지는데.”
“…….”
엘리사가 말없이 마차 문을 닫고 돌아서자 오스카가 킥킥 웃었다.
“정말이지,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야.”
“그만 놀리시죠.”
“뭐야, 부인이라고 편 들어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 전하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지적하는 겁니다.”
“내가 보기엔 편들어주는 것 같은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칼베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자 왜인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엘리사가 보였다.
“안 들어가고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오스카도 엘리사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쇠를 잃어버린 건가? 아닌데. 현관문이 열려 있잖아?”
“…….”
“아, 그럼 혹시 뭔가 두고 왔는데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않는 거 아닐까? 나도 종종 그럴 때가 있거든. 하하.”
오스카가 떠들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엘리사만 주시하고 있던 칼베른이 마차에서 내렸다. 명백한 무시에 머쓱해진 오스카는 머리를 긁적이며 칼베른을 따라갔다. 한량처럼 느긋했던 오스카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빨라진 건, 엘리사와 칼베른 너머로 집 안 풍경을 봤을 때였다. 오스카는 기함하며 집 안을 둘러봤다.
“뭐야, 이게.”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집 안이 엉망진창이었다. 테이블은 반으로 쪼개져 있었고, 소파나 다른 가구들도 전부 망가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멀쩡한 가구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안 꼴이 왜 이래? 누가 이런 거야?”
“……그걸 알면 제가 이렇게 서 있지 않고 경비대에 고발하러 달려갔겠죠.”
엉망진창인 집 안을 보고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엘리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다시 눈에 박히는 풍경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낡고 오래된 가구라서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박살난 모습을 보니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잡히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엘리사는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주방이나 다른 방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건가?’
엘리사는 확인하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칼베른이 막아섰다.
“들어가지 마라.”
“다른 곳도 이런지 확인해봐야 해요.”
“위험해. 집 안을 이런 꼴로 만든 놈이 아직 집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엘리사는 그 말에 에이지를 떠올렸다. 설마 그 남자가 집 안을 이 꼴로 만든 건 아니겠지?
“집 안 수색은 내가 할 테니 그대는 마차에 가 있어.”
“그럴 수는 없어요. 제 집이니까 제가 직접 확인해볼게요.”
정말 에이지가 범인이라면 더욱 제 손으로 잡아야 했다. 엘리사가 고집을 꺾지 않자 칼베른의 눈 사이가 좁아졌다.
“위험하다고 말했을 텐데.”
“당신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잖아요.”
“자, 자. 그만.”
오스카가 불쑥 끼어들어 실랑이하는 두 사람을 말렸다.
“집 안을 수색하는 건 내 호위 기사한테 맡기도록 하지. 그러는 편이 부인도, 그리고 자네도 안전할 테니까.”
난 안전 때문에 칼베른에게 집 안 수색을 맡기지 못하는 게 아닌데. 엘리사가 걱정하는 건 이들에게 에이지를 들키는 거였다.
‘그 남자, 집에 없겠지?’
집이 이 꼴이 됐는데 에이지가 아직 집에 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적었다. 에이지가 집을 이꼴로 만든 범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오기 전에 도망 갔을 것이다.
“그렇게 하죠.”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수색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거절할 명분도 없는 터라 엘리사는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