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오늘 그 아집을 꺾어주지. (73/156)

73화. 오늘 그 아집을 꺾어주지.2021.03.13.

엘리사와 오스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아이가 대련장으로 들어와 마주 보고 섰다. 오른쪽에 서 있는 아이가 칼베른, 왼쪽에 서 있는 아이가 시온이었다.

‘생각보다 덩치 차이가 많이 나네.’

시온이 칼베른보다 육체적인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덩치 차이가 많이 날 줄이야. 그만큼 힘차이가 난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칼베른이 정말 이길 수 있을지 걱정됐다. 물론 칼베른이 진다고 해서 그녀가 손해 볼 건 없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가 이겼으면 했다. 심각하게 경기장을 바라보는 엘리사와 달리 오스카는 휘파람을 불며 음료수 잔을 들었다.

“칼베른이 이겼네.”

“어떻게 그가 이겼다는 걸 확신해요?”

그냥 마주 보고 서 있을 뿐인데? 의아해서 묻자 오스카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엘리사에게 물었다.

“부인은 칼베른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적 없나?”

“음,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본 적 없지만, 손에 쥔 건 본 적 있어요.”

오래전, 인어의 눈물을 구하기 위해 암시장에 몰래 갔다가 건달들을 만났을 때, 칼베른이 건달들을 물리치고 검을 검집에 넣는 모습을 봤었다.

“그럼 알 텐데? 그때랑 지금이 뭐가 다른지.”

“덩치요?”

“아니, 그거 말고. 자세라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자세라. 엘리사는 다시 칼베른을 유심히 살펴봤다. 딱히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도 그대로고, 왼손에 목검을 쥐고 있는 것도…… 어? 왼손이라고?

‘그는 오른손잡이인데?’

엘리사는 혹시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확실하게 칼베른은 오른손잡이였다. 글을 쓸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오른손을 사용했었다.

‘검만 왼손으로 쓰는 건가?’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암시장에서 그를 봤을 때, 그는 분명 오른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왼손에 검을 쥐고 있는 거지?

“다른 점을 찾은 모양이군.”

“소공작님이 오른손잡이인데도 불구하고 검을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쥐고 있는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칼베른은 오른손잡이가 아니라 양손잡이거든.”

“하지만 전 그가 왼손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는데요.”

“검을 휘두르는 걸 본 적이 없다며? 그럼 당연히 못 봤겠지. 칼베른이 왼손을 사용하는 건 검을 휘두를 때뿐이거든.”

엘리사의 시선이 다시 목검을 쥐고 있는 칼베른의 왼손으로 향했다.

“그것도 힘든 적을 상대하거나, 진심으로 결투에 임할 때만 왼손을 사용하지. 칼베른이 왼손에 검을 쥐고 진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어.”

그래서 오스카가 칼베른이 반드시 이길 거라고 확신했구나. 엘리사는 비로소 이해했다.

“그래서 좀 의아하긴 해. 시온 올랜드가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재능이 좀 있는 정도야. 칼베른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지. 그런데 왜 왼손에 검을 쥔 걸까? 뭐, 시온 올랜드가 좀 건방진 성격이라 이참에 확실히 꺾어둬야겠다는 생각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오스카가 쿠키를 먹으며 말했다.

“하여간 이번 내기는 내가 확실하게 이겼네. 레트안 백작 부인에게 뭘 부탁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군.”

“즐거워 보이시네요.”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하긴, 그렇지. 엘리사는 수긍하며 다시 정원을 내려다 봤다. 선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킨 뒤, 시온과 칼베른에게 말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대련장 밖으로 나가거나 어느 한쪽이 항복을 외치면 대련이 끝납니다. 이해했습니까?”

“다 이해했으니까 얼른 시작하죠.”

시온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가슴을 쭉 폈다. 푸른색 눈동자가 이채롭게 반짝거렸다.

“얼른 저 버릇없는 녀석을 혼내주고 싶어요.”

“버릇없는 건 쟤인 것 같은데…….”

“푸훕.”

엘리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들은 오스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도 시온의 패기에 할 말을 잃은 건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칼베른을 돌아봤다.

“카일 군도 이해했습니까?”

“……정말 대련이 끝나는 건 그것뿐입니까?”

칼베른이 되물었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 끝낼 수는 없는 겁니까?”

“왜? 선생한테 눈빛으로 도움이라도 요청하려고?”

“대답해주시죠.”

시온이 빈정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칼베른은 선생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선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중간에 다른 사람이 개입해서 끝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뼈가 부러지거나 피를 많이 흘리는 등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개입할 겁니다.”

“그렇군요.”

칼베른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은 화를 내던 시온조차 순간 멈칫할 정도로 섬뜩하고 차가웠다.

“……있잖아, 부인.”

오스카고 칼베른의 미소를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올랜드 공작가에서 항의가 오더라도…… 너무 당황하지 말고 잘 상대해야 해.”

“…….”

만일이라는 가정도 붙지 않은, 확신에 찬 충고에 엘리사는 속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선생이 대련장 밖으로 나가면서 대련이 시작됐다. 단숨에 끝낼 생각인지 시온은 곧바로 칼베른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시온의 공격은 검술 쪽에 문외한인 엘리사가 보기에도 빠르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일지라도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칼베른은 살짝 몸을 비틀며 시온의 공격을 피한 뒤, 목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시온의 명치를 세게 가격했다.

“!”

시온의 몸은 그가 달려왔던 거리만큼 뒤로 밀려났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시온은 명치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끝났네.”

오스카는 새로 가져온 음료수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엘리사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이 시작된 지 고작 1분 만에 승패가 거의 판가름 나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물론 선생들도 입을 쩍 벌린 채 시온과 칼베른을 바라봤다. 칼베른은 바닥에 엎어져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시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항복하는 건가?”

“항, 복은 누가, 항, 복한다고 그래!”

말이 스타카토처럼 끊어졌다. 그만큼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자존심에 항복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시온은 끙끙거리며 일어섰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만두는 게 어떻습니까, 시온 군.”

“시끄러워!”

시온의 상태가 안 좋다고 판단한 선생이 말렸지만 시온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소리쳤다.

“난 지지 않았어. 안 졌다고. 그러니까 그만두라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패기는 좋군.”

칼베른이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 패기가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 엘리사가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대련은 일방적이었다. 시온은 이를 악물고 죽자 사자 칼베른에게 덤벼들었지만,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아악!”

오히려 반격을 맞고 볼썽사납게 나가떨어졌다. 마지막 공격에 시온은 들고 있던 목검마저 놓쳐버렸다.

“다섯 번.”

칼베른은 그런 시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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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이 진검이었다면, 네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횟수다.”

아이 같지 않은 섬뜩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칼베른의 목소리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다. 선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온과 칼베른을 쳐다봤다. 대련 중반 무렵, 시온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선생들은 대련을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규칙상 그러지 못했다. 시온이 항복을 외친 것도 아니고, 기절하거나 크게 다치는 등 대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항복할 건가?”

“절대 안 해!”

“쓸데없는 아집을 부리는군.”

목검을 고쳐 쥔 칼베른의 눈빛이 변했다.

“오늘 그 아집을 꺾어주지.”

베른은 임시 대련장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발을 뗐다.

“!”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쏟아지는 공격에 시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칼베른은 일격에 시온을 기절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그가 맨정신에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적당히 강도와 위치를 조절해서 때렸다. 기절해서 대련을 치를 수 없게 되는 것보다, 제 입으로 항복을 외치는 게 더 굴복적일 테니까.

“항복, 항복할게! 항복한다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이기지 못한 시온은 끝내 백기를 들었다. 그제야 칼베른은 공격을 멈췄다. 바닥에 앉을 틈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맞던 시온이 털썩 주저앉자 그의 담임 선생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시온 군?”

“흐아아앙!”

시온은 몰려오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 지, 얼굴이 금방 눈물범벅이 됐다.

“자자, 진정하고 의원에게 가죠.”

담임 선생은 시온을 안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대련장을 나온 칼베른에게 다른 선생이 어색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긴 걸 축하해요, 카일 군.”

검술 대련의 승자에게 주는 꽃다발이었다. 꽃다발이 어찌나 큰지 칼베른의 작은 얼굴이 샛노란 프리지아에 파묻혔다. 보통 검술 대련이나 대회 등 이겨서 받은 꽃다발은 가족, 혹은 연인에게 주며 승리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하는 게 관례였다. 이번 검술 대련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심 칼베른을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아이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칼베른을 바라봤다.

“카일.”

그 중에는 다나도 있었다. 다나는 아예 무리 앞으로 나와 수줍게 웃으며 칼베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하지만 칼베른은 그들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푸핫, 진짜 무자비하게 팼네. 왼손에 검을 쥐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저렇게까지 무자비하게 팰 줄은 몰랐는걸.”

발코니에 앉아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오스카가 무척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불길한데.’

반면 엘리사는 칼베른이 이곳에 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칼베른이 사라진 문 쪽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래?”

“……우리, 이만 가요.”

“뭐? 갑자기 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그러니 얼른 일어나요.”

칼베른이 이곳으로 올 지, 안 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엘리사는 오스카를 재촉했다.

“어, 어. 그래.”

오스카는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엘리사를 말을 따랐다. 엘리사는 곧바로 발코니 문을 열었지만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 이유는 바로 칼베른이 발코니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 하냐고 물었다.”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엘리사는 오스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오스카가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간 거지? 크게 주변을 둘러본 엘리사는 어느새 발코니 문 뒤에 숨어 있는 오스카를 발견했다.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오스카가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달라는 의미였다.

“거기서 뭐 하시는 거죠, 오웬 자작님.”

“!”

혼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게 내버려 둘 줄 알고. 엘리사는 일부러 ‘황태자 전하’가 아닌 ‘오웬 자작’이라고 불렀다. 그가 공식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닌 몰래 왔다는 걸 칼베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

칼베른은 성큼 안으로 들어와 발코니 문 뒤에 숨어 있는 오스카를 쳐다봤다. 자색 눈동자는 여지없이 일그러지고 황금색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듯 굴러다니며 허공을 짚었다. 어깨높이까지 올린 손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아, 하하하. 오랜만이네.”

“이틀 전에 뵌 거로 기억합니다만.”

“에이, 잠깐 봤잖아.”

“한 시간을 잠깐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정말이지, 한 마디도 안 져.”

오스카는 혀를 차더니 엘리사를 검지로 가리켰다.

“이게 다 부인 때문이야.”

응? 나? 갑자기 지적당한 엘리사가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네가 다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돼서 널 만나러 클라우드 공작가에 갔었거든.”

오스카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없어서 대신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부인이 네가 사교 클럽에서 뭘 하는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하다지 뭐야.”

도대체 내가 언제! 궁금하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 엘리사는 오스카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자 입을 쩍 벌렸다. 아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건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줬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 그러니까 화내지 마. 다 부인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

“무슨…….”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오스카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던 엘리사는 칼베른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자 입을 다물었다.

“뭐야, 왜 거짓말이라고 단정하는 건데? 진짜일 수도 있잖아?”

“그녀가.”

칼베른은 말을 하다 말고 엘리사를 흘끗 쳐다봤다. 어쩐지 표정이 어두웠다.

“……제가 뭘 하는지 궁금해할 리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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