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다 이유가 있었어.2021.02.17.
다음 날, 아침. 지난밤에 칼베른이 아고라 사교 클럽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칼베른의 침실을 찾아갔다. 칼베른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몸에 꼭 맞는 파란색 단복을 입은 그는 파랑새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엘리사는 물론 그의 외출 준비를 도와준 하인과 헤리엇도 흐뭇하게 웃으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제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였다. 비스듬하게 올라간 눈썹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넌 이만 나가보거라.”
하인이 있으면 엘리사와 칼베른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할 테니 헤리엇은 눈치 있게 하인을 내보낸 후, 엘리사에게 공손히 말했다.
“마님께서도 어서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준비요? 혹시 저도 같이 사교 클럽에 가야 하나요?”
“네. 보통 처음 입학할 땐 보호자가 함께 갑니다.”
“아,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아고라 사교 클럽에 가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가서 준비해야겠네요.”
엘리사가 다시 나가려고 하자 칼베른이 약간 삐딱한 넥타이를 똑바로 매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혼자 갈 생각이니까.”
“네? 그래도 돼요? 보호자가 함께 가야한다면서요?”
“다들 어려서 보호자가 따라오는 거다.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 필요 없어.”
속은 그럴지 몰라도 겉모습은 누가 봐도 어린애인데. 엘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외투를 입는 칼베른을 바라봤다. 헤리엇도 엘리사와 표정이 비슷했다. 외투 단추까지 단정하게 채운 칼베른이 엘리사를 돌아봤다.
“그대도 오늘 외출하지?”
“네. 연금술사 협회랑 집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짐을 챙기러 가는 거라면 사용인들을 데리고 가도록 해. 혼자 다 들고 오는 건 힘들 테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마법 가마솥을 옮겨야 하거든요.”
그 말에 칼베른은 엘리사의 연구실에서 봤던 낡은 가마솥을 떠올렸다.
“그걸 가지고 오는 건가? 예전에는 가지고 오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가마솥을 옮기려면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우선 마법진에 부여한 마나를 거두고 마법진을 지워야 해요. 그리고…….”
엘리사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이런 쪽에 문외한인 칼베른은 그녀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엘리사도 한참 설명하다가 칼베른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하여간 제가 이 저택에서 본격적으로 마법 약을 만들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안 가져왔는데 이제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오려고요.”
간단한 마법 약은 마법 가마솥이 없어도 만들 수 있었지만 복잡한 마법 약을 만들 땐 꼭 필요했다. 가령 칼베른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약이라던가.
“그래서 말인데, 재료를 이것저것 좀 많이 사야 할 것 같아요.”
한마디로 돈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칼베른은 서랍에서 수표책을 꺼내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원하는 대로 사.”
“그럴게요.”
모든 건 칼베른을 위한 일이니 엘리사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수표책을 받았다. 감사하다는 겉치레 인사도 하지 않았다.
“협회에 갈 때 호위 기사도 데리고 가고.”
“네.”
“입구에만 세워두지 말고 안에도 데리고 들어가. 이상한 놈들이 해코지할 수도 있으니.”
잔소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점심 꼭 챙겨 먹어라,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등 마치 자신의 부모라도 된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자 엘리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잔소리 그만 해요. 저도 그런 잔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 어린애는 아니거든요.”
“…….”
엘리사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칼베른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도련님.”
엘리사가 주변 눈을 의식해서 칼베른을 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헤리엇도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칼베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섰다.
“그럼 다녀오지.”
엘리사는 칼베른이 미처 챙기지 못한 모자를 손수 그의 머리에 씌워주며 인사했다.
“잘 다녀오세요.”
**** 어린 귀족들이 다니는 곳인 만큼 아고라 사교 클럽은 주변 건물보다 크고 화려했다. 멀리서 봐도 저곳이 아고라 사교 클럽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화려한 건물 앞에는 건물만큼이나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고라 사교 클럽에 다니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과 그들의 보호자가 타고 온 마차였다. 보호자는 대부분 귀부인이었다. 간혹 남자가 보였지만 그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내려주고 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평상시에 타고 다니기엔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크고 화려했지만, 이곳에서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것보다 더 크고 좋은 마차를 타고 오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누가 어떤 마차를 타고 왔는지 주시했다. 그들이 주시하는 건 마차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입고 온 옷, 장신구 등 모든 걸 다 확인하고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비웃었으며 저보다 잘났으면 시기하고 질투했다. 다음에는 자신이 더 좋은 걸 입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번에 우리 애가 피아노 연주회를 했는데, 다들 얼마나 칭찬하던지. 호호호.”
“어머, 우리 애는 그림을 그렸는데 다들 전문 화가가 그린 줄 알더라고요. 오호호호.”
이곳저곳에서 자식 자랑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귀족 가문의 어린 자제들이 사교계에 나가기 전에 친목을 다질 수 있게 좋은 취지로 만들었던 아고라 사교 클럽은 어느새 자존심과 허영심으로 가득한 경쟁 클럽이 되었다. 다그닥, 다그닥-. 삼삼오오 모여 자식 자랑, 가문 자랑, 남의 험담 등 이야기꽃을 피우던 귀부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 건 한 마차가 등장했을 때였다. 그 마차는 다른 마차들에 비해 작고 수수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포효하는 사자. 클라우드 공작가의 마차였기 때문이다. 귀부인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공작가의 마차를 주시했다.
“어라, 저 아이 혼자 온 건가요?”
“그런 것 같네요.”
그것도 잠시, 칼베른 혼자 마차에서 내리자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개개인이 내는 소리는 작았지만, 뭉치니 제법 커졌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오다니.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사실 클라우드 소공작의 사생아라는 소문 말이죠? 지금 보니 클라우드 소공작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네요. 역시 사생아가 맞는 것 같아요.”
“제 생각도 같아요. 그러니 소공작 부인이 보호자로 따라오지 않고 저 아이를 혼자 보낸 거겠죠.”
“그래도 그렇지, 아이를 혼자 덩그러니 보내다니. 소공작 부인도 너무하는군요.”
한 귀부인이 혀를 차자 다른 귀부인이 질색하며 소리쳤다.
“너무하긴요! 난 소공작 부인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걸요. 남편의 사생아라니. 그 아이를 내가 거둬서 키워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맞아요, 맞아. 부인의 말에 동감해요.”
정작 당사자인 칼베른과 엘리사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귀부인들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편을 가르는 등 이상한 짓을 벌였다.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기를 잘했어.’
엘리사를 데리고 왔다면 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듣고 속상했을 테니까. 다시 한번 잘했다고 생각하며 칼베른은 화려한 건물을 올려다 봤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아고라 사교 클럽을 졸업하던 그날,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했건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다시 오게 됐다. 그것도 보호자가 아닌 입학생 자격으로 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 칼베른은 실소했다.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도련님.”
호위 기사가 걱정스럽게 묻자 칼베른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앞을 막고 있던 사람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비켜섰다. 칼베른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아고라 사교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카일 도련님.”
칼베른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보통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에 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같이 오신 보호자분께선 어디 계신가요?”
“없다.”
“네?”
“보호자 없이 나 혼자 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가 좋지 않거나, 부모가 바빠서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보좌관이나 총괄 집사를 보호자로 붙여주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없으니 직원은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첫날에 보호자도 없이 혼자 온 귀족 가문의 자제라니. 아고라 사교 클럽이 생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베른은 건물 입구와 안쪽으로 길게 난 복도를 쳐다봤다. 가구와 장식품의 배치가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론 그가 다녔을 때와 비슷했다. 그럼 원장실의 위치도 그대로겠지. 칼베른이 성큼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직원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도련님, 원장실에 가셔야 합니다.”
“알아.”
“네?”
“안다고. 원장실 위치도 알고 있으니 귀찮게 따라오지 마라.”
눈앞에 있는 상대는 분명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인데, 말투나 분위기는 굉장히 권위가 넘쳤다. 무조건 그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직원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귀찮은 직원을 떨쳐내고 홀로 원장실에 도착한 칼베른은 노크했다. 그러자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리면서 다갈색 머리칼을 높이 틀어 올린 중년 여자가 나왔다. 그녀가 바로 이 사교 클럽의 원장인 레트안 백작 부인이었다. 백작 부인은 칼베른 혼자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혼자 온 거니?”
“그렇습니다.”
“보호자는?”
“없습니다.”
그 말에 백작 부인은 뒤늦게 이 아이가 클라우드 소공작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그럼 우리 직원은 못 만났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만났는데 혼자 올 수 있어서 혼자 왔습니다.”
“어머, 의젓한 아이구나. 일단 들어오렴.”
칼베른이 소파에 앉자 백작 부인은 다른 직원을 불렀다.
“가서 핫초코를 가져오렴.”
“핫초코는 됐습니다. 전 차가운 물이면 됩니다.”
칼베른이 원하는 대로 직원은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 그 사이 백작 부인이 그의 인적 사항을 적을 서류를 가져와 칼베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래는 보호자가 작성하는 건데, 보호자가 안 왔으니 내가 대신 작성해줄게. 카일 군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면 돼요.”
“괜찮습니다.”
“응?”
“저 혼자서 작성할 수 있으니 주시죠.”
칼베른이 앙증맞은 손을 내밀자 백작 부인은 작게 웃었다. 말투와 행동을 보면 나이보다 의젓한 것 같았지만 그래 봤자 어린아이였다. 서류에 어려운 글자들이 잔뜩 있는 만큼 칼베른 혼자서 작성하는 건 절대 무리였다.
“그래, 그러렴.”
그런데도 아이에게 서류와 깃펜을 넘겨준 건, 저 의젓한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 번 정도는 기를 꺾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아이는 완벽하게 서류 작성을 끝냈다.
“말도 안 돼.”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백작 부인은 몇 번을 다시 확인했지만, 서류는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문제가 있습니까?”
“응? 아니, 없어. 없단다.”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백작 부인은 내색하지 않고 시험지를 내밀었다. 아이의 적성과 지능 등 여러 가지를 테스트하는 거였다. 백작 부인이 내민 건 여러 테스트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테스트였다.
“자, 풀어보렴.”
이것만큼은 절대 못 풀겠지. 백작 부인은 그리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허.”
그만큼 아이가 완벽하게 풀었기 때문이다. 백작 부인은 물론 채점한 선생도 무척 놀라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이만 가봐도 됩니까?”
반면 칼베른은 담담하게 그들에게 물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지.”
친구라. 칼베른은 저보다 최소 15살은 어린 아이들을 친구라고 불러야 하는 상황이 웃겼다.
“저 선생 안내해줄 거란다. 따라가 보렴.”
“네.”
칼베른이 나가자 백작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30년 넘게 아고라 사교 클럽을 맡으면서 여러 아이를 만났지만 저렇게 조숙하고 영특한 아이는 처음이야.”
“처음은 아니죠.”
직원이 탁자 위를 치우며 말했다.
“클라우드 소공작님도 저러셨잖아요.”
“응?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백작 부인은 그제야 약 20년 전, 칼베른이 처음 아고라 사교 클럽에 왔을 때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작도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고 영특한 아이였지만 저 아이만큼은 아니었어. 가끔 어린애다운 면모를 보였단 말이지.”
“저 아이도 그럴 수 있어요.”
“그럴까?”
“그럼요. 그나저나 진짜 클라우드 소공작님과 비슷하네요. 역시 핏줄은 못 속이나 봐요.”
“그러게.”
백작 부인은 직원이 새로 타준 커피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황자 전하께서 저 아이를 주시하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