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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은은한 꽃향기 (63/156)

63화. 은은한 꽃향기2021.02.06.

“판사님께서 오셨습니다.”

“!”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가 다시 돌아와 화장실 문을 닫았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마치 그녀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똑똑-.

“소공작님? 소공작 부인?”

눈치 없는 직원이 계속 문을 두드리며 그들을 찾았다. 엘리사는 닫힌 문에 기대서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만큼 눈동자가 허공을 짚으며 굴러다녔다.

‘일단 저 사람들에게 어려진 칼베른을 보여주면 안 돼.’

이곳에 어려진 칼베른, ‘카일’은 오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는 지금 아빠 셔츠를 훔쳐 입은 아이처럼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었다. 똑똑-.

“실례지만 들어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칼, 당신은 여기 계세요.”

엘리사는 어려진 칼베른을 화장실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잠시 일이 좀 있어서. 어서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직원과 판사가 안으로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판사는 주변을 살피더니 엘리사에게 물었다.

“소공작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까?”

판사가 화장실을 쳐다보자 엘리사는 슬쩍 옆으로 움직여 판사의 시야에서 화장실을 가렸다.

“소공작님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셨다고요?”

“네. 급한 일이 생기셨거든요.”

판사와 직원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엘리사는 그들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혼 신청을 취하하는 건 소공작님 없이 저 혼자면 되잖아요.”

엘리사가 법원에 온 건 이혼 신청을 취하하는 게 아닌 합의 이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칼베른과 나란히 판사 앞에 서서 이혼하겠다는 서로의 뜻이 변함없다는 걸 밝힌 뒤,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되찾으려고 했건만 칼베른이 다시 어려지면서 모든 건 물거품이 됐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감이 컸다. 엘리사는 입안이 쓴 약초를 통째로 씹은 것처럼 썼지만 흔들림 없이 웃으며 판사를 바라봤다.

“그러시군요. 뭐, 그러실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두 분께선 화해하셨으니까요.”

엘리사와 칼베른이 요란하게 화해한 일이 제국 모든 신문 1면에 큼지막하게 실렸던 만큼 판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인께서 잘못 아시고 계신 게 있으십니다. 협의 이혼 신청을 취하라면 남편이신 클라우드 소공작님의 동의도 필요합니다.”

“어, 그런가요? 전혀 몰랐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이를 다시 데리고 와야 하나요?”

그건 곤란한데. 엘리사가 무척 난감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판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합의 이혼을 하실 거라면 오셔야겠지만, 이혼 신청을 취하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오늘 두 분의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는 날이니, 오늘 안에 소공작님께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신다면 자연스럽게 이혼 신청은 취하될 겁니다.”

“아, 그렇군요.”

다행이다. 엘리사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모처럼 오셨으니 취하 신청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협의 이혼 취하 신청서를 작성하는 건 굉장히 간단했다. 판사가 준 신청서를 한 번 쓱 훑어보고 밑에 인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면 됐다.

“그럼 내일 쯤 공식적으로 이혼 신청이 취하됐다는 결과지를 클라우드 공작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소공작 부인.”

“수고했어요.”

직원과 판사가 나가고, 엘리사는 크게 숨을 토해내며 마른세수했다.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렸다.

“끝났다.”

처음 목표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끝났지만, 어쨌든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끝났으니 엘리사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겼다.

“……끝났나?”

아, 아직 무사히 끝난 건 아니네. 엘리사는 미성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화장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칼베른이 보였다.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어서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네, 끝났어요. 칼은 괜찮아요?”

“……날 다시 칼이라고 부르는군.”

“그 모습일 땐 소공작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엘리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후드를 들고 일어섰다. 엘리사가 다가오자 칼베른은 움찔하며 화장실 안으로 쏙 들어가더니, 문 틈으로 고개만 내민 채 그녀를 경계했다.

“왜 다가오는 거지?”

“이거 주려고요.”

엘리사는 가지고 온 후드를 내밀었다. 마차에서 후드를 벗지 않고 여기까지 입고 온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언제까지 화장실에 있을 수는 없으니 이거 걸치고 나와요.”

작은 문틈 사이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낚아채듯 후드를 가져갔다. 잠시 후, 칼베른은 후드를 전신에 꽁꽁 둘러싸고 밖으로 나왔다. 성인용 후드이다 보니 작은 소년인 칼베른에겐 바닥에 끌릴 정도로 컸다.

“벗은 옷은요?”

“여기.”

칼베른이 후드 속에 감춘 옷을 보여주었다. 바지와 조끼 사이로 속옷이 보이자 엘리사는 당황하며 입안의 연한 살을 깨물었다.

“왜 그러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칼베른도 고의로 속옷을 보여준 건 아닐 테니 엘리사는 그 부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시 이렇게 된 거예요? 화장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나도 몰라.”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칼베른은 정말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그게 오히려 엘리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엘리사는 가슴을 퉁퉁 치며 되물었다.

“뭔가 이상한 증상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음.”

“그냥 처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요. 그래, 마차에서 인상이 안 좋고 식은땀을 흘렸던 것부터 말하면 되겠네요. 그때 왜 그런 거예요?”

“그건 더워서…….”

“덥다는 변명 금지.”

엘리사가 단호하게 말하자 칼베른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평소보다 더웠던 것뿐이다. 그것 말고 아픈 곳은 딱히 없었어. 아, 몸이 평소보다 조금 무겁기도 했군.”

그게 아픈 거잖아. 엘리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대가 말한 대로 찬물 세수를 하면 좀 나아질 것 같아 그랬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더군. 오히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 모습이었다.”

“흐음.”

칼베른의 증상만 들어보면 단순히 감기인 것 같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이 어려질 리는 없으니 감기는 아니었다.

‘내가 준 약이 그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준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완화해줬던 건가?’

상황을 보건대,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건 절망적이었지만,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마법 약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었다는 건, 칼베른이 어려진 이유가 저주가 아닌 마법이나 마법 약 때문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그 마법 약이 일시적이라도 증상을 완화해줬다면, 그걸 토대로 연구하면 완벽한 해독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연구하고 싶다.’

어떤 마법을 썼는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저 마법을 풀 수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엘리사의 가슴속에 연구욕이 불타올랐다. 이혼하지 못해 아쉬운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슴에 짚인 불은 눈동자에도 붙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를 본 칼베른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지만, 얼마 가지 못해 엘리사에게 붙잡혔다.

“어서 공작저로 돌아가요.”

“…….”

“아, 그전에 연금술사 협회부터 가야겠네요. 아니지, 내 집에 가야지. 가서 책을 가져와야겠어.”

“엘리사.”

“아아. 맞다. 칼은 공작저로 가야죠. 옷을 안 입고 있으니까.”

칼베른은 엘리사가 빠르게 제 몸을 훑자 미간을 좁히며 약간 벌어진 후드를 여몄다.

“그럼 칼은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돌아가요. 연금술사 협회랑 집은 저 혼자 가면 되니까요.”

“타고 갈 말이 없을 텐데?”

“빌리면 되죠. 법원 앞에 말 대여소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자요.”

엘리는 한발 물러나더니,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양팔을 벌렸다.

“뭐 하는 거지?”

“뭐 하는 거긴요. 와서 안기라는 거죠.”

“!”

뜬금없는 요구에 칼베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가 왜 그대한테 안겨야 하는 거지?”

“그럼 그러고 가실 거예요? 후드가 바닥에 다 끌리는데?”

그 말에 칼베른은 카펫처럼 바닥에 끌리는 후드를 움켜 들었지만, 워낙 길어서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맨발이잖아요. 신고 온 신발은 너무 커서 신기 힘들 테고 법원 복도가 깨끗하긴 해도 맨발로 걷긴 좀 그렇죠.”

“그럼 직원에게 신발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어느 세월에 그걸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직원이 하인도 아니고, 그런 걸 부탁하면 안 되죠. 직원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

“그러니까 그냥 제가 마차까지 안고 갈게요.”

칼베른의 입꼬리가 굳었다. 그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엘리사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선뜻 가서 안기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비록 몸은 어려졌지만, 마음은 어른이었으니까. 게다가 칼베른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됐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는 터라 그러는 게 어색했다.

“뭐 해요?”

엘리사는 칼베른이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서 있자 팔을 좀 더 넓게 벌리며 재촉했다.

“어서 와서 안기지 않고.”

“…….”

“설마 여기 계속 있을 건 아니죠?”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칼베른은 머리를 굴리며 다른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사의 품에 안겨 가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탁하지.”

“그래요.”

칼베른은 어쩔 수 없이 엘리사의 품에 안겼다. 칼베른이 작아졌다곤 하나 무게가 제법 될 텐데 엘리사는 거뜬하게 칼베른을 안았다. 일명 공주님 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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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탓에 칼베른은 의도치 않게 엘리사의 품에 얼굴을 묻게 됐다. 다른 여자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코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화장품 냄새가 나던데 엘리사는 아니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폐부 깊은 곳까지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 칼베른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동시에 영겁의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킨 것처럼 몹시 두려워져 칼베른은 눈을 질끈 감았다. **** 혼자 법원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제임스는 귀빈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를 서성거렸다. 마음 같아선 올라가고 싶었으나 경비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경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계단 앞에서 얼마나 서성거렸을까. 3층에서 직원과 판사가 내려왔다.

“그럼 마무리를 부탁하네.”

“네, 판사님.”

판사가 가고, 직원이 혼자 남자 제임스는 슬쩍 직원에게 다가갔다.

“시벨 일보의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업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직원은 명함을 받지 않고, 그를 경계하며 물러났다. 파일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통성명하자는 거니.”

“그것도 안 할 겁니다.”

직원은 제임스가 붙잡을세라 부리나케 도망쳤다. 제임스는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거참, 더럽게 안 도와주네.”

직원을 꾀는 건 물 건너갔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엘리사와 칼베른의 협의 이혼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 했다. 제임스는 두 사람이 요란하게 화해해서 당연히 이혼 신청을 취하하는 줄 알았다.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법원 앞에서 엘리사의 행동과 칼베른의 반응을 보고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진짜 이혼했으면 대박인데.”

그렇게 요란하게 화해해놓고 결국 이혼했다고 기사를 쓰면 신문은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행복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임스는 부디 두 사람이 이혼했기를 바라며 뭔가 건질 게 없나 계속 서성거렸다. 그렇게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엘리사가 후드로 둘둘 싼 무언가를 안고 내려오는 게 보였다. 칼베른은 보이지 않았다.

‘왜 혼자 내려오는 거지?’

혹시 진짜 이혼해서 따로 다니는 건가? 그런데 품에 안고 있는 건 뭐지? 제임스는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다가가려고 했지만, 경비가 막아섰다.

“다가가지 마십시오.”

제임스가 울컥해서 따졌다.

“왜 막는 겁니까? 난 그냥 지나가려는 건데.”

“그럼 조금 있다가 지나가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거 엄연히 자유 침해입니다!”

“…….”

“이봐요, 내 말 들려요?”

제임스가 따졌지만, 경비는 엘리사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땅에 뿌리를 박은 커다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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