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Come back. (10)2021.02.03.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귀가 먹먹했다. 오스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리아를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데아른이 마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마리아, 진정해.”
마리아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했다.
“오라버니, 이상하다고요. 이상해요. 이건 말도 안 돼. 어째서, 어째서 아닌 거죠?”
“마리아.”
“반드시 성공한다고 했단 말이야. 실패하면 죽…….”
“그만.”
데아른이 마리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네 마음 다 알았으니까 일단 나가자꾸나. 여기서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짜증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마리아도 짜증을 읽었는지, 아니면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멈칫했다. 초점이 흐렸던 눈동자가 다시 또렷해졌다. 마리아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데아른이 옅게 웃으며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마리아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클라우드 소공작과 형님께 사과해야지.”
“미안해요, 칼베른. 그리고 오스카 오라버니.”
마리아는 순순히 데아른이 시키는 대로 했다. 오스카가 싱긋 웃으며 마리아의 사과를 받았다.
“아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면 됐다. 그런데 방금 했던 말들, 무슨 의미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결혼을 앞두고 잠시 정신이 나가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님.”
데아른과 마리아가 불쑥 찾아왔던 것처럼 불쑥 떠나자 오스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뭔가 있군.”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마리아의 말과 행동을 봤을 때 칼베른과 관련된 일인 게 틀림없었다.
“혹시 네가 어려진 거, 마리아 때문인 거 아니야?”
오스카의 질문에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어려진다고 해서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될 건 없으니까요.”
“마리아에겐 도움이 안 되지만 데아른에겐 도움이 되잖아. 그러니 데아른이 마리아를 조종해서 그런 짓을 벌인 것 같은데.”
“글쎄요. 제가 만약 2황자라면 상대를 어리게 만들기보다 확실하게 죽일 겁니다. 그 편이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상대가 네가 아닌 다른 놈이었다면 그랬겠지. 넌 평범한 방법으로 죽일 수 없잖아.”
칼베른은 침묵으로 오스카의 말에 동의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후 12시 30분. 슬슬 엘리사와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이 관련된 것 같으니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봐야겠어.”
“무리일 겁니다. 2황자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파고들다 보면 틈이 있겠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오스카는 마리아가 그런 이상한 소리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칼베른이 어려진 일에 그들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파봤는데 뭔가 나오면 좋고, 안 나와도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잖아? 데아른이 정말 범인이라면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괜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당연하지. 데아른, 저 녀석의 음흉한 속내는 다 파악하고…… 뭐야, 퇴근하는 거야?”
칼베른이 외투를 입고 있는 걸 본 오스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됐잖는데 퇴근해?”
“3시간 넘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곳에 오신 지도 한 시간이 넘었고요.”
“그래도 아직 퇴근할 시간이 아니잖아. 그리고 일주일동안 자리를 비워서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벌써 퇴근한다고?”
“내일 처리할 생각입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요.”
“뭐 하러 가는데?”
오스카는 칼베른이 무슨 대답을 하든 간에 가지 말라고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 있었으니까. 오늘 밤을 지새운다고 해도 다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혼하러 갑니다.”
“잘 가.”
그러니 무조건 붙잡으려고 했는데, 뒤이은 대답에 오스카는 칼베른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 칼베른이 기사단에 가 있는 동안 엘리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쌌다. 애초에 가지고 온 짐이 얼마 되지 않는지라 짐 싸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이건 어떡한다.”
바로 화해의 선물로 받은 장식용 유리 구두였다. 엘리사는 이 유리 구두를 칼베른에게 돌려줄지 말지 고민했다.
“돌려주는 게 맞겠지?”
진짜 화해의 목적으로 준 것도 아니고, 일종의 쇼를 위해 쓴 소품이었다. 그 쇼가 끝났으니 사용한 소품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았다.
“아니지, 잠깐만. 이걸 이용하면 위장 이혼의 의혹을 풀 수 있을지도……?”
이혼한다고 했다가 이혼 숙려 기간을 미루고, 그것도 모자라 떠들썩하게 화해까지 했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또 이혼하겠다고 하면 판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위장 이혼이 아니냐고 의심하며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심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던 엘리사는 유리 구두를 이용해서 판사의 의심을 푸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는 칼베른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했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돌아오면 즉시 계획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그의 표정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약간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때문에 엘리사는 하려던 말 대신 걱정스럽게 물었다.
“기사단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
대답과 달리 안 좋은 표정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하필 오늘 기분이 안 좋을 게 뭐람. 엘리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럴 땐 안 건드리는 게 최선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엘리사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법원 갈 때 연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연기?”
“그야 소공작님과 제 사이가 완전히 끝난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죠. 소공작님의 노력에 화해하긴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크게 싸웠고, 결국은 이혼하기로 했다, 이게 시나리오겠네요.”
칼베른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누가 봐도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다.
“제 계획이 별로인가요?”
“아니. 좋군. 그렇게 하지.”
이번에도 칼베른은 표정과 대답이 따로 놀았다.
“그럼 법원에 가는 길에 제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이제 곧 점심시간이 끝나니 지금 가면 타이밍이 딱 좋을 것 같아요.”
엘리사가 넌지시 지금 법원에 가자고 말하자 칼베른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갑게 굳었다.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 저런데?’
엘리사는 뭐가 칼베른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말실수하거나 그런 적은 없으니까.
“금방 준비해서 내려올게요. 10분 정도 걸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 말인즉, 다른 곳에서 쌓인 걸 제게 화풀이를 한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더 이상 칼베른의 기분을 맞추거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엘리사는 재빠르게 외출 준비를 끝내고 칼베른이 기다리고 있는 홀로 내려갔다.
“부인!”
중앙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솔레이가 반갑게 엘리사를 부르며 다가왔다.
“외출하시는 건가요?”
“네.”
“아까 보니까 소공작님이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 소공작님과 함께 외출하시는 건가요?”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솔레이가 두 손을 마주 쥐고 눈을 반짝거렸다.
“어쩜, 데이트 가시는군요! 낭만적이어라!”
“아니요. 데이트가 아니라…….”
이혼하러 가는데요. 엘리사가 미처 말문을 맺지 못하자 솔레이가 뺨을 수줍게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부인. 전 다 이해하니까요.”
도대체 뭘 이해한다는 건데. 엘리사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솔레이를 바라봤다.
“그럼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솔레이는 그 시선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니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하여간 감당하기 힘든 성격이야.”
엘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칼베른은 마차에 먼저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안색이 아까보다 어두웠다. 뜨거운 태양열에 단단했던 얼음이 반쯤 녹아내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실제로 칼베른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간간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심상치 않았다.
“어디 아파요?”
“아니.”
“하지만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데요.”
“더워서 그래.”
날씨가 약간 더워지긴 했지만, 이 마차에는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어 전혀 덥지 않았다. 엘리사는 오히려 추워서 후드를 담요처럼 덮고 있었던 터라 더워서 땀을 흘린다는 칼베른의 말을 믿기지 않았다.
“그래요.”
하지만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출발하지.”
칼베른은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두드렸다. 출발하라는 신호였다.
“계획은 간단해요.”
엘리사는 마차가 공작가를 벗어나자 미리 세워 둔 계획을 말했다. 엘리사의 모든 계획을 들은 칼베른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판사의 앞에서 유리 구두를 깨뜨리겠다고?”
“네. 이 유리 구두는 우리가 화해했다는 상징이잖아요.”
엘리사는 상자를 열어 유리 구두를 칼베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니 이걸 판사가 보는 앞에서 깨뜨리면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 내가 보기엔 오히려 더 의심할 것 같은데. 너무 보여주기식이잖아.”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너무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었으니까. 기껏 세웠던 계획이 소용없어졌다는 사실에 엘리사는 시무룩하며 상자를 덮었다.
“그럼 이 유리 구두는 돌려드릴게요.”
엘리사가 유리 구두가 든 상자를 내밀자 칼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미 그대에게 준 선물이니 돌려줄 필요 없어.”
“가짜 선물이었잖아요.”
“가짜 선물도 선물이지. 그러니 가져. 어차피 나한테는 쓸모없는 물건이다.”
엘리사 역시 필요 없었지만, 칼베른이 계속 거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챙겼다. 그 뒤로 엘리사와 칼베른 사이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마차는 한참을 달려 법원에 도착했다. 법원 앞에는 예상했던 대로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내리세요, 부인.”
먼저 내린 칼베른이 엘리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리사는 그 손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여기선 칼베른의 손을 잡고 내리는 것보다 무시하는 게 이혼을 앞둔 부부 같을 것이다. 그러니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칼베른의 손을 잡지 않고 혼자 마차에서 내린 뒤, 성큼성큼 법원으로 들어갔다.
“…….”
칼베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그 뒤를 따라갔다. 입을 꾹 다문 채 두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던 기자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렀다. 할 말이 많은데 다른 기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하지 못하는 눈초리였다.
“뭐야, 화해하신 거 아니었어?”
그때, 한 기자가 물꼬를 텄다.
“나도 화해하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닌 것 같네.”
“그럼 이혼하시는 건가?”
“설마. 그렇게 요란하게 화해하셨는데 이혼 신청은 취하하시겠지.”
그제야 다른 기자들도 입을 열었고, 법원 앞은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저마다 제 생각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제임스가 법원 안으로 돌진하듯 들어갔다. 엘리사와 칼베른이 정말 이혼하는 건지 확인하러 가는 게 분명했다. 만약 두 사람이 정말 이혼한다면 특종이었다.
“나, 나도 간다!”
“나도!”
다른 기자들도 제임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비병들이 막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다. **** 직원은 엘리사와 칼베른을 귀빈실로 안내했다. 전에 엘리사가 갔던 곳보다 더 좋은 방이었다.
“판사님께선 지금 급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20분 내외로 끝내고 오신다고 하시니 죄송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래.”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직원은 공손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칼베른은 마른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칼베른의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다. 아까보다 더 나빠진 것 같기도 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도 많아졌고.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엘리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하지만 땀이…….”
“몇 번을 말하지만 더워서 그래. 그러니 신경 쓰지 말도록.”
“그렇게 더우면 외투를 벗고 찬물에 세수라도 하는 게 어때요?”
“……그게 좋을 것 같군.”
칼베른은 외투를 벗고 귀빈실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엘리사는 후드와 외투를 벗고 소파에 앉아 차와 과자를 먹으며 칼베른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칼베른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혹시 쓰러진 건 아니겠지. 걱정된 엘리사는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똑똑-.
“이봐요, 소공작님, 저기요?”
몇 번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들어갈게요!”
엘리사는 힘차게 소리치며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넝마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바지였다. 그 위에 한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소, 소공작님?”
바로 어려진 칼베른이었다. 절망감이 깃든 자색 눈동자를 마주한 엘리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도대체…….”
당황한 엘리사가 뒷걸음질 치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판사님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