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Come back. (8)2021.01.27.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황녀가 준 음료수를 몇 번 마신 적은 있지만 그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함께 마셨으니 호감을 받아준 거라곤 할 수 없지.”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랬지만, 칼베른을 향한 마리아의 마음은 비정상적이었다. 그러니 그녀라면 다 같이 먹은 음료수에도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려진 날도 황녀가 음료수를 가지고 왔었지.”
잠깐만, 어려진 날도 마리아가 가지고 온 음료수를 먹었다고?
‘혹시 그 음료에 이상한 마법 약이 들어 있었던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엘리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억측일 가능성은 컸다. 칼베른이 마리아가 준 음료수를 먹은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여러 번 나눠 먹여야 효과를 발휘하는 마법약도 있으니 그것만으론 마리아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조금 전에 마리아가 보였던 행동들이 마음에 걸렸다.
‘일단 그 여자는 칼베른이 어려진 걸 몰라.’
알았더라면 마리아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부분을 생각해보면 마리아가 칼베른이 어려진 것과 관련이 없을 것 같았지만, 엘리사는 찝찝한 마음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혹시 그때 먹은 음료수, 아직 남아 있어요?”
마리아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칼베른이 먹었다는 문제의 음료수를 조사해보는 거였다.
“4일 전에 먹었던 건데 남아 있을 리가.”
“그건 그렇네요.”
칼베른은 심각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엘리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보지?”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심증밖에 없을 뿐더러 그 심증도 정확한게 아니니 엘리사는 말을 아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냥 넘길 칼베른이 아니었다. 엘리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사교 클럽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다니실 건가요?”
칼베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안 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 지긋지긋한 곳을 또 갈 리가 없지.”
‘또’라는 건 예전에 아고라 사교 클럽에 다녔다는 의미.
‘하긴 공작가의 영식이니 당연히 다녔겠지.’
하급 귀족들이나 지방 귀족들은 돈과 능력이 없어서 못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고위 귀족들은 전부 아고라 사교 클럽을 나왔다.
‘그런데 사교 클럽이 지긋지긋하다고?’
엘리사는 문득 아고라 사교 클럽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듣기론 매일 같이 재미있는 걸 하고 맛있는 걸 먹는 곳이라고 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혹여나 날 보낼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칼베른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갈 거니까.”
어지간히도 사교 클럽에 가기 싫은 모양이다. 엘리사 역시 그가 가기 싫다는데 보낼 생각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 성국, 아틸론 주신의 신전.
“이게 뭐야.”
오늘 날짜로 발행된 신문을 확인한 닉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신문의 1면에는 칼베른과 엘리사가 화해한 일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엘리사가 그 남자랑 화해했다고? 이혼을 안 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불과 며칠 전에 엘리사가 보낸 편지에 적힌 내용만 봐도 그녀는 칼베른과 이혼을 하고 대륙을 여행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이딴 기사가 나오다니. 신문사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클라우드 공작가를 상대로 오보를 냈을 리는 없지만, 닉은 기사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엘리사에게 연락해봐야겠어.”
닉은 지금 당장 엘리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데 그럴 수 없다는 게 몹시 짜증났다. 엘리사에게 마법 전령새를 주고 싶어도 닉이 마법 전령새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닉은 엘리사에게 보낼 편지를 쓴 뒤, 신전 내에 위치한 우체국으로 향했다. 신전에 도착한 편지들을 분류하고 있던 직원이 반갑게 닉을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니콜라스 성기사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편지를 보내려고 왔습니다.”
“오늘도 러브레터를 보내시는 모양이군요.”
직원의 농담 섞인 말에 닉은 말없이 웃었다.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직원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안 그래도 백작님께서 성기사님이 도통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잘됐습니다. 곧 스테이크를 썰게 해주실 거죠?”
“가능하다면요.”
닉 역시 엘리사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러기 위해선 넘어야 할 장애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우선 엘리사는 닉을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물론 보통 친구보단 깊은 사이였지만, 닉은 그걸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엘리사와 연인, 그 이상의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러려면 엘리사의 마음을 얻어야 했고, 그 전에 엘리사와 칼베른이 이혼해야 했다.
‘제발 기사 내용이 거짓이었으면 좋겠어, 엘리사.’
닉은 혹 기사 내용이 진짜일지라도 어떤 사정이 있어서 잠시 연기하는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럼 전 이만.”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을 해도 될까요, 성기사님?”
“물론입니다. 무슨 부탁이죠?”
“이걸 크라임 대주교님께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려니 보다시피 일이 많아서요.”
직원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편지들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게요.”
아주 쉬운 부탁이었기 때문에 닉은 흔쾌히 부탁을 받아주었다. 닉은 곧바로 크라임 대주교가 있는 기도실로 향했다. 크라임 대주교는 이틀 째 단식하며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닉은 잠시 기다렸다. 그동안 크라임에게 온 편지 봉투를 확인했다. 편지 봉투는 문양 하나 없이 심플했지만 재질이 고급이었다.
‘어느 귀족 가문에서 대주교님께 부탁하려고 보낸 편지인가?’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실링 왁스 위에 별 하나만 찍혀 있는 게 이상했다. 이런 게 귀족 가문의 문양일 리는 없고, 누가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찍은 게 분명했다.
‘귀족 가문에서 보낸 게 아니라면 부유한 상인인가?’
얼마나 부유한 상인이길래 성국의 대주교에게 부탁을 하려는 거지?
“닉?”
의아해서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그 사이 기도가 끝난 크라임이 그를 불렀다.
“여긴 무슨 일이지?”
“편지를 전해주러 왔습니다.”
“이런, 고맙구나.”
크라임이 인자하게 웃으며 편지를 가져갔다.
“!”
그것도 잠시, 실링 왁스 위에 찍힌 별모양을 본 크라임은 무척 놀라며 황급히 편지 봉투를 열었다.
‘무슨 편지길래 저러시는 거지?’
호기심이 생긴 닉은 사슴처럼 목을 쭉 빼고 크라임의 편지를 훔쳐보려고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크라임은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읽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제국에 가봐야겠어.”
제국? 그 순간 닉은 크라임과 칼베른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호위 하겠습니다, 대주교님!”
**** 오스카를 만나고 돌아온 지 정확하게 사흘 뒤. 황후는 칼베른, 정확히는 카일 브리슈의 앞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아고라 사교 클럽 초대장이었다.
“황후가 진짜 초대장을 보낼 줄은 몰랐어요.”
“…….”
칼베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초대장을 읽었다. 몇 번을 읽어도 초대장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황후의 추천으로 아고라 사교 클럽에 가입되었고, 단복이 완성되는 대로 사교 클럽에 나가야 했다.
“어떡해요?”
“어떡하긴. 가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의 추천인데 거절하면 황후를 모욕하게 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사실이 몹시 성가시고 짜증이 난 칼베른은 인상을 팍 썼다. 황후가 보낸 초대장만 아니었다면 진작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칼베른은 긴 한숨과 함께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헤리엇에게 물었다.
“황후가 보낸 재단사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네.”
재단사까지 보내다니. 황후는 어린 칼베른을 아고라 사교 클럽에 보내려고 작정한게 틀림없었다.
“알았다. 지금 가지.”
칼베른은 엘리사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소파에 멀뚱멀뚱 앉아 있던 재단사는 엘리사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소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이 아이의 단복을 맞추러 왔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부족한 솜씨지만 최선을 다해서 맞추겠습니다. 그럼 도련님. 이쪽으로…….”
칼베른은 재단사를 따라 미리 설치해 둔 탈의 전용 커튼 뒤로 사라졌다. 엘리사는 소파에 앉아 연금술 책을 읽으며 칼베른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길게 늘어졌던 커튼이 걷치고 단복으로 갈아입은 칼베른이 나왔다.
“와.”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단복을 입은 칼베른은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임시로 입은 거라 옷이 약간 컸지만 그조차도 칼베른의 귀여움을 돋보이게 해주니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다.
재단사가 칼베른에게 모자까지 씌워주자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치켜 들 뻔한 엄지를 말리느라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이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헤리엇은 단복을 입은 칼베른을 보고 무척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른 사용인들과 재단사들도 흐뭇하게 칼베른을 바라봤다.
“…….”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행복한 오로라를 내뿜고 있는 가운데, 칼베른만 불만스레 인상을 쓰며 손까지 덮은 소매를 걷어올렸다. 똑바로 쓴 모자도 괜히 툭툭 거리며 성질을 부렸다.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도련님.”
이에 재단사가 걱정스럽게 묻자 칼베른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그럼 치수를 재겠습니다.”
재단사는 빠르게 치수를 재고 옷맵시를 확인했다. 단복의 기본적인 디자인은 똑같았지만 체형과 가문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브로치에 새길 문양은 브리슈 백작가의 문양으로 하면 될까요?”
엘리사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칼베른을 쳐다봤다. 이건 그의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문양으로 하겠습니다.”
**** 그날 저녁, 부재중인 칼베른을 대신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가 돌아온 에드윈은 곧바로 칼베른을 찾았다. 지금 칼베른은 카일의 모습으로 있어 예전에 지냈던 방의 반 정도 되는 작은 침실에 머물렀다. 에드윈은 그게 성에 차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칼베른은 단순한 식객일 뿐이었으니까. 이보다 더 좋은 방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왔군.”
방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칼베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에드윈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그가 처리한 일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고 보니 아고라 사교 클럽에 다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래. 황후가 초대장을 보내서 어쩔 수 없이 가야 해.”
“황후가 좋은 마음으로 초대장을 보냈을 리는 없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한 번 알아볼까요?”
“아니.”
칼베른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에드윈이 눈을 깜빡였다.
“이대로 묻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괜히 들췄다가 내가 어려진 사실이 들통날 수도 있으니 일단 묻어둬.”
그건 그렇지. 에드윈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드윈은 다시 보고를 이어갔다. 하늘 높이 뜬 보름달이 약간 기울어진 늦은 밤, 길게 이어지던 보고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난데없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자요?”
엘리사였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안 자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이거요.”
그리고 가지고 온 약병을 칼베른에게 건네주었다. 투명한 크리스털 약병에는 초록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몸에 쌓인 나쁜 독소를 제거해주는 마법 약이에요. 혹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만들어왔어요. 그리고…….”
엘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는데……취소 해야겠죠?”
엘리사의 얼굴에 씁쓸함과 좌절감이 묻어났다. 그 얼굴을 보는 칼베른의 표정 역시 엄숙해졌다. 칼베른은 두 손을 꼭 마주 쥐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미안.”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잘자요.”
엘리사가 떠나고 칼베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약병을 흔들었다. 초록색 액체가 불빛을 반사하며 흔들리는 모습이 약간 기괴했다. 에드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눈매를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드실 겁니까?”
“먹으라고 가지고 온 거니까 먹어야겠지.”
초록색 액체가 역하게 보일 법도 한데 칼베른은 망설임없이 전부 삼켰다. 에드윈은 그런 칼베른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혼자 남은 칼베른은 좀 더 서류를 보다가 새벽녘의 어르스름한 기운이 방안에 스며들 쯤 침대에 누웠다.
“……덥군.”
그대로 자려고 했는데, 너무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벌써 여름이 오려는 건가. 칼베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옷을 벗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해서 창문도 열고, 물을 마셨지만 여전히 더웠다. 뜨거운 마그마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입이 바짝 마르고 갈증이 들끓었다. 때문에 칼베른은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다가 동이 틀 무렵에서야 기절하듯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창밖으로 막 떠오른 해가 웅크려 잠든 칼베른의 아래에 그린 그림자의 길이는 어린아이의 그림자라고 하기엔 상당히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