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Come back. (7)2021.01.23.
섬뜩하게 뜬 눈이 기괴했다. 몇 년 전, 무더운 여름 날 제국을 찾은 어느 유랑 극단이 더위를 잊을 만큼 무서운 공포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공연에 나오는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말해, 칼베른 어디 있어?”
게다가 팔은 어찌나 세게 잡는지 부러질 것 같았다.
“놓으세요!”
엘리사는 미간을 확 좁히며 마리아의 손을 뿌리쳤다. 밀치는 힘에 주춤 뒤로 물러난 마리아가 두 손을 옴팡지게 쥐고 회랑이 떠날 정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날 좋아하는 게 그렇게 배가 아팠어? 그래서 그를 숨긴 거야? 나한테 가려는 그를 붙잡고 숨긴 거냐고!”
마리아가 칼베른의 사랑을 갈구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회가 날 때마다 칼베른에게 그녀를 사랑해달라고 애달복달했고, 그 모습은 굉장히 간절하고 처절했다. 엘리사는 마리아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칼베른의 사랑을 갈구하는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칼베른을 돌려줘! 그를 돌려달란 말이야!”
표정이나 말투를 보아하니 마리아는 진심으로 칼베른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지?’
혹시 칼베른이 마리아에게 여지를 준 건가?
‘그건 아닐 거야.’
그동안 칼베른이 얼마나 철벽을 쳤는데 이제 와서 여지 같은 걸 줬을 리는 없었다. 만약 줬다고 하더라도 그건 순전히 마리아의 망상일 가능성이 컸다.
‘칼베른에게 확실히 물어봐야겠네.’
뭐든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좋았으니까.
“어째서 황녀 전하께선 소공작님이 전하를 좋아한다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엘리사는 마리아에게도 물어봤다. 그러자 마리아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도도하게 치켜 들었다.
“그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 줄 알아? 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걸.”
엘리사의 귀엔 마리아가 단순히 칼베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아닌 마음을 얻기 위해 이상한 짓을 했다고 들렸다. 여자의 감이 뭔가 있다고 맹렬하게 소리쳤다.
“어떤 노력을 하셨죠?”
마리아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녀가 한 짓을 말할 리가 없었다. 이상한 짓을 했다면 더더욱. 하지만 지금은 반쯤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였고, 이 상태라면 대답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엘리사는 슬쩍 운을 뗐다.
“그건……!”
“마리아.”
마리아가 말을 하려는 그때, 그녀의 뒤에서 불쑥 손이 뻗어나와 마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 있었구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외모 역시 유하고 순해 보였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 다음엔 황자인가. 엘리사는 속으로 혀를 차며 격식에 맞춰 인사했다. 2황자, 데아른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입니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 그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무탈해 보여 다행이네요.”
“황자 전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황녀 전하!”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웬 중년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여자는 마리아의 상태를 요리조리 확인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황녀 전하.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유모, 저 여자가 칼베른을……!”
“네, 네. 무슨 말씀인지 다 알아요.”
유모가 자상하게 마리아를 달랬다.
“방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황녀 전하. 예쁘게 치장도 하고요. 설마 이 초라한 모습을 클라우드 소공작님께 보여드릴 생각은 아니시죠?”
유모의 말에 마리아는 움찔하며 제 손과 옷을 내려다보니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유모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마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 어서 가요. 황녀 전하.”
“응.”
마리아는 순순히 유모를 따라났다. 그들이 떠나고, 데아른과 둘이 남은 엘리사는 곁눈질로 데아른을 흘겨봤다. 데아른과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인상이나 목소리 등 지금까지 본 그는 착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호탕하고 유쾌한 오스카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그 성격이 진짜 그의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타입이 엉큼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은지라 엘리사는 데아른의 성격을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아니, 진짜 성격이 맞나?
“결혼 때문에 심경이 복잡해서 그런지 마리아가 가끔 이상한 행동을 보입니다. 그래서 잘 다독이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정말 미안합니다, 부인.”
엘리사는 데아른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그럴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을 기울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것 말고 아무 이상이 없으니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리아가 잘못한 일을 데아른에게 사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묵과하고 그냥 넘길 생각도 없어 엘리사는 적당히 받아쳤다. 그러자 데아른의 눈매가 예쁘게 휘었다.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습니다, 부인. 그런데 여긴 어쩐 일입니까?”
“황태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부인 혼자서요? 클라우드 소공작은 같이 안 왔습니까?”
“소공작님은 일이 있으셔서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무척 아쉬워하셨지요.”
“그럴만 하지요. 형님은 동생인 제가 질투할 정도로 클라우드 소공작과 친하게 지냈으니까요.”
데아른이 씁쓸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정확히는 황후와 오스카의 사이가 안 좋은 거였다. 황후가 그녀의 소생인 데아른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안달복달하다 보니 관계가 틀어져버렸다. 그러다 보니 데아른과 오스카의 사이도 자연스럽게 틀어졌다. 그런데 저런 소리를 하니 의아했다. 엘리사는 눈에 보이는 저 성격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을 다시 기울였다.
“마리아도 참, 이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텐데 아직 그 남자를 잊지 못해서 이런 소동을 벌이다니.”
데아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짐짓 얼굴을 굳히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부인,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요?”
“네. 이번에 마리아가 결혼할 때, 소공작이 마리아에게 결혼 축하 선물을 보내줬으면 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부탁이었다. 지방 귀족이 결혼해도 안면이 있다면 선물을 보내는 와중에 황녀가 결혼하는데 선물을 보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런 부탁을 하는 이유가 뭘까. 엘리사가 말없이 쳐다보자 데아른이 이유를 덧붙였다.
“부인도 알겠지만 마리아는 아직 클라우드 소공작을 잊지 못했습니다. 전 그런 마리아가 너무 안쓰러워요.”
안쓰러워야 해야 할 대상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인 것 같은데.
“그러니 마리아가 클라우드 소공작을 잊을 수 있게 선물을 보내줬으면 합니다. 소공작이 마리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아주 근사한 선물을 말이죠.”
도대체 어떤 선물을 보내야 마리아가 칼베른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엘리사는 의아하고 궁금했다.
‘그럼 당사자한테 물어보면 되지.’
데아른도 생각한 게 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것일 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번엔 엘리사의 뒤에서 손이 불쑥 뻗어나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부인.”
칼베른이었다. 엘리사를 담고 있던 데아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칼베른에게 옮겨졌다.
“음?”
데아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칼베른을 위아래로 훑었다. 눈동자에 호기심과 함께 이채가 서렸다.
“이 작은 신사 분은 누구죠?”
칼베른이 앞으로 나와 직접 자기소개를 했다.
“카일 브리슈라고 합니다. 부모님과 조부님께서 돌아가셔서 클라우드 공작가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황자 전하를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린아이답지않게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인사에 데아른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브리슈 가문의 영식이었군요. 엄한 상상을 했었는데, 다행입니다.”
엘리사는 굳이 묻지 않아도 데아른이 말한 엄한 상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어린 칼베른을 어른 칼베른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게 당황스러웠는데 다들 그러니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오해가 더 커지지 않고 저기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럼 성인이 될 때까지 클라우드 공작가에서 지내는 건가, 카일 군?”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럴 것 같습니다.”
그 특별한 일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라는 건 데아른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칼베른의 대답에 데아른이 무척 잘됐다는 듯 박수를 짝 치며 웃었다.
“그럼 아고라 사교 클럽에 다니겠네?”
뜬금없이 나온 말에 칼베른의 눈썹이 올라갔다. 엘리사도 놀라며 데아른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데아른은 흐트러짐없이 웃으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부인도 카일 군을 아고라 사교 클럽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죠?”
엘리사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 귀족이나 하급 귀족들이 무리를 해서라도 수도에 올라와 사교 클럽에 보낼 만큼 아고라 사교 클럽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에게 필수 코스가 됐다. 그런데 카일을 아고라 사교 클럽에 보낼 생각이 없다고 하면 데아른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보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겠지. 생각만 해도 싫어서 엘리사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며 어떤 변명을 할지 생각했다.
“……당연히 카일 군을 아고라 사교 클럽에 보낼 겁니다.”
마침내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은 엘리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일단 카일 군이 클라우드 공작저에 적응을 한 뒤, 그 다음에 보낼 겁니다.”
완벽한 변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할 수는 있었다.
“카일 군은 이미 완벽하게 적응한 것 같습니다만.”
……모면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엘리사는 데아른이 제 말을 물고 늘어지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입니다만, 애석하게도 카일 군은 아직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로 밤마다 배겟잎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울어요.”
엘리사는 칼베른이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외면했다.
“저런, 밤마다 울다니.”
데아른이 무척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칼베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칼베른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걸 본 건 엘리사 뿐이었다.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군요. 안타깝습니다.”
“갑자기 환경이 달라졌으니까요.”
엘리사는 칼베른의 어깨를 끌어 안고 그녀 쪽으로 당기며 데아른의 손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그러니 적응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괜찮아지면 사교 클럽에 보내려고요.”
“아닙니다, 부인. 이럴수록 혼자 있는 것보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그건…….”
“제 말을 믿으세요, 부인. 카일 같은 아이들을 많이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허어, 생긴 것과 다르게 고집은 왜 이렇게 황소 고집인지.
“어머니께 말해서 바로 사교 클럽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저, 그러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인. 마리아가 실수한 것에 대한 보답이니까요. 그럼 나중에 또 뵙죠.”
데아른은 그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홀연히 떠났다. 뭐 저렇게 제멋대로인 놈이 다 있어? 엘리사는 황망함에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짚었다. 이로써 데아른이 착한 놈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왜 온 거예요.”
데아른이 벌인 짓에 대한 황당함은 칼베른의 원망으로 변질됐다. 엘리사는 작게 툴툴거렸다.
“칼이 오지 않았다면 저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을 텐데.”
칼베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엘리사를 올려다봤다.
“내 잘못이라는 건가?”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원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죠.”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일 텐데.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하더니 왜 2황자랑 있는 거지?”
“저도 좋아서 그러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엘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황녀 전하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자 전하께서 갑자기 등장하신 거예요.”
“황녀도 만났던 건가?”
“네. 아, 물론 이것도 우연입니다. 전 두 분 다 만날 생각이 없었어요. 만나고 싶지도 않고요.”
오스카도 포함인 건 비밀이었다.
“그래서 칼은 여긴 왜 오신 거예요?”
“그대를 찾으러 온 거야. 그리고 내가 안 왔더라도 2황자는 이미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대가 황궁에 왔다는 것도.”
하긴, 그러니까 마리아가 여기까지 온 거겠지. 마리아와 있었던 일을 떠올린 엘리사는 칼베른에게 물었다.
“혹시 마리아 황녀 전하께 여지를 준 적 있어요?”
“무슨 여지?”
“내가 널 사랑한다, 뭐 이런 여지요.”
칼베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반응을 보아하니 여지를 준 적은 확실히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더욱 마리아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의 입장에선 아니었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선 맞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황녀의 호감 같은 걸 받아준 적이 없어요?”
칼베른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