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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Come back. (5) (57/156)

57화. Come back. (5)2021.01.16.

엘리사는 에드윈이 어려진 칼베른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도 미리 그들과 의논해서 계획해두었다.

‘이번에는 부디 계획대로 행동해줬으면 좋겠는데.’

엘리사는 에드윈이 아까처럼 말도 없이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마님!”

홀에 서 있던 솔레이가 반갑게 엘리사에게 인사했다.

“솔레이 양이 왜 여기 있죠?”

“아론 남작님께서 오셨다길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솔레이가 서류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혀를 내밀고 귀엽게 웃었다.

“장부 관리는 몇 번을 해도 여전히 어렵네요. 숫자가 너무 많아 계산이 복잡해요. 이 모든 걸 혼자 하신 마님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존경할 것까지야…….”

“아니에요! 정말 존경스러워요! 저도 부인처럼 되는 게 꿈인걸요!”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엘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솔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아,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무엇이 말이죠?”

“일 말이에요. 그동안은 부인께서 안 계셔서 제가 대신 일 했지만 이제 부인께서 계시니 다시 직접 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당분간은 솔레이 양이 계속 맡아주세요.”

칼베른이 얼마나 일을 맡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가문의 안살림까지 맡을 여력은 안 될 것 같아 엘리사는 솔레이에게 안살림을 맡겼다. 솔레이가 시무룩해하며 말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잘할 수 있어요. 지금처럼만 하면 되니까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요.”

“앗,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용기를 내서 최선을 다해 볼게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솔레이는 참으로 파이팅 넘치는 아이였다. 친화력도 좋았고.

“그래서 말이에요…….”

적당히 솔레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데 에드윈이 홀로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는 한 꼬마가 있었다. 저 꼬마가 바로 칼베른일 것이다.

“이런, 부인.”

에드윈은 무척 놀라며 엘리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공작가에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전부 계획에 맞춘 입에 발린 거짓말이자 연기였다. 엘리사도 에드윈의 장단에 맞춰 싱긋 웃었다.

“네. 그이가 계속 보살펴 준 덕분에 잘 지냈어요. 그런데 그이는 같이 오지 않은 건가요?”

“소공작님께선 급한 일이 생겨 수도를 떠나셨습니다. 안 그래도 마님을 굉장히 보고 싶어 하셨는데, 만나러 오지 못하는 걸 무척 아쉬워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일 때문인데. 저 때문에 그이가 발목이 잡히는 걸 원하지 않아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식으로 똘똘 뭉친 대화이건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매끄럽고 좋아 보이니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옆에 그 아이는 누구죠? 아론 경의 동생인가요?”

엘리사는 누가 봐도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었다. 지난 5년간 갈고 닦았던 연기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분은 소공작님의 당숙이 되시는 브리슈 백작님의 손자이신 카일 브리슈 님이십니다. 브리슈 백작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 남으셨는데 그걸 가엽게 여기신 소공작님께서 거두셨습니다.”

“그렇군요.”

그새 이름에 사연까지 만들다니. 하여간 치밀한 성격이었다. 엘리사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환하게 웃으며 카일의 연기를 하는 칼베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카일 군. 엘리사 클라우드라고 해요.”

그러자 칼베른은 움찔하며 에드윈의 뒤로 숨었다. 전형적으로 낯선 환경에 겁을 먹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칼베른이 연기를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 연기까지 잘할 줄이야. 놀라웠다. 내심 칼베른이 너무 애늙은이처럼 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건데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요.”

“…….”

“괜찮아요.”

엘리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달래자 칼베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엘리사가 내민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이었다. 몸은 어려졌어도, 손에 박힌 굳은살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이 정도면 보여주기식 인사는 충분하겠지. 엘리사는 칼베른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칼베른이 꽉 잡고 있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매몰차게 뿌리친다면 놓을 수 있겠지만, 그것보단 그냥 잡고 있는 게 칼베른이 아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엘리사는 내버려 두었다.

“헤리엇, 카일 군의 방을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님.”

“그럼 방 준비가 될 동안 응접실에 가 있도록 하죠. 아, 후드는 벗어서 하인에게 주면 돼요.”

엘리사의 말에 하인이 다가와 공손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칼베른은 꼭 붙잡고 있던 엘리사의 손을 놓고 후드를 벗었다.

“……!”

후드 안에 숨겨진 외모가 드러나는 순간 주변 분위기가 변했다. 지나가다가 혹은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굳어 서서 칼베른을 쳐다봤다.

‘다들 왜 저래?’

그런 사용인들의 반응이 의아한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찬가지로 굳은 솔레이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토끼만큼 커져 있었다. 함박만큼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질 줄 몰랐다.

“솔레이 양?”

“아!”

엘리사가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솔레이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누가 붙잡을세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굳어 있던 사용인들도 제각각 갈 길을 갔다.

“다들 왜 저러는 거죠?”

“글쎄요.”

에드윈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그래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대처할 수 있을 테니, 엘리사는 에드윈을 슬쩍 찌르며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지만, 에드윈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 칼베른을 방에 데려다주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방문 앞에 서 있는 솔레이를 보고 멈춰 섰다.

“솔레이 양?”

“부인!”

솔레이는 엘리사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뭐야, 왜 저래. 엘리사는 당황하며 솔레이아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왜 그래요? 누가 괴롭혔어요?”

“흐으윽, 부인.”

“무슨 일인데 그래요?”

솔레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이러니까 마치 자신이 울린 것 같아 찝찝했다.

“자자,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거기 차와 과자를 가져오렴. 아주 달콤한 차로.”

엘리사는 지나가는 하녀에게 부탁한 뒤, 솔레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솔레이를 소파에 앉힌 뒤, 친절하게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서럽게 울어요?”

“소공작님이, 소공작님이 너무하신 것 같아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엘리사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래서 소공작님과 이혼하려고 하셨던 거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전 내심 부인을 원망했었어요.”

“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부인께서 이렇게 돌아오시기도 했고, 모든 이유를 다 알았으니 부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엘리사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물론 부인께서 소공작님을 용서하신 건 알아요. 그러니 그 아이도 받아주신 거겠죠.”

그 아이라면 어려진 칼베른을 말하는 건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맞는 것 같았다.

“저라면 절대 용서하지 못했을 텐데, 부인께선 정말 마음이 넓으시군요. 존경스러워요.”

“저 솔레이 양.”

“네, 부인.”

“미안하지만 솔레이 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음, 그러니까 제가 소공작님을 용서한 거랑 카일 군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엘리사의 질문에 솔레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남아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설마, 부인. 아무것도 모르시는 건가요?”

“뭘 말이죠?”

“아아, 모르시는군요. 하긴 부인께선 소공작님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이 없으시니 모르실 만하죠.”

솔레이는 한숨을 푹 쉬다가 미간을 찡그리다가 이내 다부진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제 말 들으시고 너무 충격받지 마세요, 부인. 카일 군은 소공작님의 사생아가 분명해요!”

  **** 난데없이 등장한 어린 칼베른이 누군가의 사생아 취급을 받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그 자신의 사생아 취급을 받을 줄이야. 예상 밖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나뿐인지도.’

에드윈은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헤리엇도 예상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너무 바빠 물어보지 못했다. 칼베른도 예상하였는지, 그의 집무실에서 다시 만난 엘리사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그다지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소공작님도 예상하고 있었나 봐요?”

“어느 정도는. 내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의심을 할 거라고 예상은 했어.”

하긴 헤리엇도 칼베른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어서 그가 어려졌다는 말을 큰 의심 없이 믿었다고 했었다. 그러니 솔레이처럼 칼베른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카일이 칼베른의 사생아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큰일이네요. 그냥 사생아라고 소문이 나도 골치가 아플 판에 소공작님의 사생아라고 소문이 나면…… 사교계가 한바탕 뒤집힐 것 같은데요.”

“신경 쓰지 마. 내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조용해질 거다. 그동안만 참으면 돼.”

“그럴까요.”

“그래. 그것보다 호칭을 정리해야겠군.”

“호칭이요?”

“혹 그대가 날 소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걸 누군가 들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니 앞으론 칼이라고 부르도록 해.”

칼. 카일과 칼베른을 아우르는 애칭이었다.

“그럴게요, 칼 님.”

“칼 님이 아니라 칼.”

“님도 붙이지 말라는 건가요?”

“그래. 이 모습에선 호적상 그대가 더 높은데 호칭을 높이는 건 이상하잖아.”

“음, 그건 그렇죠. 그럼 존댓말은 괜찮나요?”

“그건 괜찮아.”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칼.”

‘님’도 붙이지 않고 애칭을 부르는 게 조금 낯간지럽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인지라 엘리사는 군말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걸 보도록.”

칼베른이 책상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손떼가 묻은 가죽 수첩에는 그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하루라도 비는 날이 없네.’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스케줄이 가득했다. 쉬는 시간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게 정령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스케줄이 맞단 말인가. 칼베른이 바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엘리사는 기함하며 수첩을 앞으로 넘겼다.

‘어?’

그렇다 넘기며 보다 3개월 이전을 보니 스케줄이 빈 부분이 있었다. 그것도 하루를 통째로 비웠다.

‘이날, 칼베른이 저택에서 쉬었던가?’

“예전 스케줄은 볼 필요 없다.”

기억을 되짚고 있는데, 수첩 위로 올라온 작은 손이 모든 걸 현재로 되돌려놓았다.

“그대가 눈여겨 봐야 할 스케줄은 빨간색 줄이 그어져 있는 스케줄이다.”

엘리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빨간색 밑줄이 그어진 글자들을 따라갔다.

“당장 다음주에…….”

엘리사는 칼베른이 말하는 걸 귀담아 듣고 필요하면 메모도 했다. 궁금한 건 물어봤고. 그렇게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리엇이었다.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마님.”

“바로 갈게요.”

엘리사와 칼베른은 하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한 칼베른은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엘리사는 그런 칼베른의 팔을 잡았다. 클라우드 소공작 칼베른이라면 상석에 앉는 게 맞지만 소년 카일은 상석에 앉아선 안 됐다.

“……실수했군.”

칼베른도 그의 실수를 자각하고 돌아섰다. 뒤따라 온 헤리엇이 공손히 칼베른을 자리로 안내했다.

“…….”

의자에 고이 놓인 키높이 방석을 본 칼베른의 얼굴이 굳었다. 엘리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칼베른은 당장이라도 키높이 방석을 치우고 싶었으나, 식탁이 어려진 그의 눈높이에 너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일단 앉았다. 이것만 해도 몹시 창피했는데 그의 수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칼베른이 쓸 식기들은 전부 어린이용이었다.

“푸핫.”

그걸 본 엘리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의 맑은 웃음 소리가 식당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하.”

칼베른은 보기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앙증맞은 손에 잘 어울리는 작은 포크를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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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서 이런 수치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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