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Come back. (4)2021.01.13.
어젯밤, 엘리사가 에드윈에게 들은 계획은 이랬다. 오후에 헤리엇이 공작가의 마차를 끌고 엘리사를 데리러 온다. 엘리사가 그냥 마차만 타고 홀연히 떠나면 그들이 화해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모를 테니, 헤리엇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엘리사에게 화해의 선물을 준다. 그럼 엘리사는 화해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만, 아닌 척 새침하게 굴다가 이내 화해의 선물을 품에 꼭 껴안고 흐뭇하게 웃으며 공작가의 마차에 올라탄다.
‘그래, 그런 단순한 계획이었지.’
이런 요란한 계획이 아니라! 엘리사는 황당해하며 헤리엇이 두 손 공손히 들고 있는 새하얀 유리구두를 내려다 봤다. 실제로 신을 수 없는 장식용 신발이었다. 신발 선물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 유리구두 같은 장식용 신발은 신발을 신고 걸을 일이 없을 정도로 평생 잘 모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 화해의 선물로 장식용 유리구두를 가지고 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문제가 많았다. 우선 클라우드 공작의 수많은 마차중에서 왜 하필 저 크고 화려한 마차를 끌고 온 건지 모르겠다. 기사들을 끌고 온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차를 호위할 목적이었다면 한두 명만 데리고 오면 될 텐데 저렇게 무더기로 데리고 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헤리엇이 유리구두를 붉은 쿠션에 올려 공물 바치듯이 주는 것도 이상했다. 눈에 띄기도 했고.
‘성심성의껏 준비한다는 게 이런 거였나.’
에드윈의 목적이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거였다면 성공했다. 어느덧 엘리사의 집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으니까. 그들은 화려한 마차와 정복을 입은 기사, 그리고 엘리사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헤리엇을 보며 쑥덕거렸다.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갑자기 기사들이 우르르 오더니 저 여자한테 유리구두를 바쳤어.”
“공작가의 마차인데…… 혹시 저분이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 아니셔?”
“그럼 소공작께서…….”
쏟아지는 시선과 수군거리는 말에 엘리사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이자 그걸 쑥스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한 헤리엇의 볼에 깊은 보조개가 새겨졌다. 헤리엇은 흐뭇하게 웃으며 유리구두가 있는 붉은 쿠션을 좀 더 높이 들었다.
“어서 받아주십시오, 마님.”
“…….”
그래, 받아줘야지. 그래야 이 광대 같은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끝날 테니까. 엘리사는 냉큼 유리구두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아차, 한 번 새침하게 퉁겨야 했는데.’
너무 창피해서 그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인제 와서 퉁기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고, 마무리라도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어쩜, 제 마음에 딱 드는 선물이에요.”
억지로 잡아당긴 안면 근육이 땅겼다. 입꼬리가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 입술 끝에 힘을 딱 주고 있어야 했다.
“그이가 이렇게까지 노력해주는데 화를 풀어야죠. 암, 그럼요.”
엘리사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말하며 유리구두를 잡아들었다. 짝, 짝짝-. 그 순간 누군가 손뼉을 쳤다. 짚더미에 던져진 불씨가 커지듯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손뼉을 치는 바람에 누가 먼저 손뼉을 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행복하게 사세요!”
“항상 응원할게요!”
박수갈채와 함께 쏟아지는 함성에 엘리사는 유리구두를 품에 꼭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창피해!’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솟든 상관없으니 지금 당장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 엘리사의 집 앞에서 있었던 일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속보 신문에 실려 제국 전역에 퍼졌다. 제국민 모두가 칼베른이 엘리사에게 화해의 선물로 장식용 유리구두를 선물한 걸 알게 됐다.
“그럼 두 분, 이혼 안 하시는 건가?”
“듣자 하니 소공작 부인께서 소공작님의 선물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하셨다고 하더라고. 냉큼 마중 온 마차에도 타시고 말이야. 그럼 이혼 안 하시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부인께서 이혼 신청을 취소하신 게 아니라 숙려 기간을 일주일 뒤로 미루기만 하셨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약간 아리송하다.”
“숙려 기간을 미루고 난 뒤에 소공작님께서 사과하신 거잖아. 그럼 조만간 취소하시겠지.”
“그렇겠지?”
엘리사가 이혼 신청을 취소하지 않은 것 때문에 사람들은 잠시 헷갈렸지만, 대부분 두 사람이 화해하고 이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심 칼베른이 엘리사와 이혼하면 그 빈자리를 노리려던 사람들은 이 사실에 아쉬워했지만, 그들이 화해했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쨍그랑-. 그중 한 명이 바로 마리아였다. 어느 유명한 장인이 만든 비싼 화병이 마리아의 손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칼베른이 그 여자랑 화해했을 리가 없다고!”
그걸로는 화가 안 다 풀리는지 마리아는 손에 잡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다 집어 던졌다. 그 바람에 거울, 탁자, 소파 등 어느 하나 무사한 게 없었다. 시녀들은 구석에 틀어박혀 발발 떨었다.
“황녀 전하, 진정하세요.”
그나마 유모가 말렸지만,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다. 마리아는 손에 잡히는 게 더 이상 없자,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날 좋아한단 말이야. 나를, 나를 좋아한다고.”
연금술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약을 칼베른에게 다 먹이면 그가 마리아의 사랑의 노예가 될 거라고. 마리아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몇 달에 걸쳐 어렵사리 칼베른에게 모든 약을 다 먹였다. 게다가 칼베른은 마지막 약을 먹었을 때,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는 듯 막 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년의 모습을 보였었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며 조기 퇴근까지 했고.
‘약이 제대로 든 게 분명해!’
칼베른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혼란스러워 도망친 게 분명했다. 다음 날, 아프다고 출근을 하지 않은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한 마리아는 혼란에 빠진 칼베른을 구해주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가려고 했지만 빌어먹을 오스카가 막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곧 제 마음을 깨달은 칼베른이 알아서 자신을 찾아올 테니까. 마리아는 칼베른이 찾아오면 있는 힘껏 사랑하고 보듬어줄 생각이었다. 때마침 엘리사와 칼베른이 이혼한다고 하니, 빈 그의 옆자리를 자신이 꽉 차다 못해 넘칠 정도로 채워주리라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다짐을 보답받지는 못할망정 엘리사와 칼베른이 화해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렸다.
“뭔가 잘못됐어.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에게 푹 빠진 칼베른이 엘리사와 화해 따위를 할 리가 없었다.
“아악!”
모든 사람들이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마리아는 계속 패악을 부렸고, 그녀의 패악질에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황녀 전하, 진정하세요!”
그런 마리아를 말리던 유모조차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을 무렵 구세주처럼 데아른이 등장했다.
“모두 나가 봐.”
데아른은 유모와 시녀들을 내보낸 뒤, 엉망진창이 된 방의 중심에 주저앉아 있는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마리아, 괜찮니?”
“오라버니…….”
마리아의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붉어진 뺨을 타고 또르륵 떨어졌다.
“뭔가 이상해요. 칼베른이 그 여자랑 화해할 리가 없는데, 왜 다들 칼베른과 그 여자가 화해했다고 말하는 거죠? 칼베른은 날 좋아하는데, 날, 날 좋아한단 말이에요.”
“쉬이, 마리아.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보거라.”
흥분한 마리아가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자 데아른은 마리아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 역시 마리아에겐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계속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묻지도 않은 사실들을 쏟아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요. 혹시 그 여자가 나한테 가려는 칼베른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리아.”
“그래, 그런 게 분명해요. 화해도 그 여자의 생쇼가 분명해.”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마리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생각해보면 칼베른이 직접 사과한 게 아니라 공작가의 집사가 대신 사과한 거잖아요. 그 여자가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 봐 집사랑 작당해서 이상한 수를 쓴 게 분명해요!”
마리아가 눈물을 흩뿌리며 데아른의 가슴을 거칠게 잡았다.
“그러니 도와줘요, 오라버니. 그 여자한테서 칼베른을 구해줘요.”
“클라우드 소공작을 구해달라고?”
“네. 칼베른이 저한테 오고 싶어 하는데 그 여자가, 그 마녀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칼베른도 오라버니가 구해주면 무척 고마워하며 황태자를 버리고 오라버니의 편에 설 거예요!”
마리아의 애원에 데아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가 한 번 알아보고 정말 소공작 부인이 소공작을 붙잡고 있는 거라면 구해주도록 하마.”
“꼭이에요. 약속했어요, 오라버니!”
마리아는 몇 번을 더 약속한 후에야 데아른을 풀어주었다. 데아른이 황녀의 궁을 나오자 심복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보고했다.
“그날 이후, 칼베른 클라우드가 돌연 모습을 감췄다고 합니다.”
“그 말은 칼베른이 죽었다는 건가?”
“거기까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약을 먹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요. 그 연금술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을 죽이기 위해 만든 특별한 약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려.”
데아른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묻는 건데, 그 남자는 찾았나?”
“송구합니다. 워낙 꼭꼭 숨기도 했고, 저쪽에서도 그 남자를 찾는 터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저런. 슬슬 내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는데.”
데아른이 농담처럼 뱉은 말에 심복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심복은 고개를 푹 숙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른 시일 안에 반드시 찾아서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 꼭 지키길 바라지.”
“물론입니다.”
데아른은 그제야 흡족하게 웃으며 황녀의 궁을 돌아봤다. 햇볕 아래 반짝이는 황녀 궁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번뜩였다. **** 엘리사는 문제의 마차를 타고, 수많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클라우드 공작저로 돌아갔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님.”
엘리사가 현관 홀로 들어서자 카펫을 중심으로 양쪽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찌나 크게 인사하는지 그들의 목소리가 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
칼베른과 결혼했을 때도 받아보지 못한 성대한 환영에 엘리사는 반쯤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봤다. 뒤따라오던 헤리엇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사용인들의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건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엘리사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그녀의 얼굴은 저 사이를 뻔뻔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전부 물러가.”
다행히 사용인들은 엘리사의 말을 잘 들었다. 엘리사는 안심하며 헤리엇에게 물었다.
“제 방은 그대로죠?”
“네. 아직은 그대로입니다.”
“아직은? 그게 무슨 의미죠?”
“그냥 한 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자, 피곤하실 테니 얼른 올라가시죠, 마님.”
아닌데, 뭔가 있는데. 엘리사는 찝찝했지만,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리엇을 따라 그녀가 머물던 방으로 향했다.
“부인!”
3층에 도착했을 무렵, 아래쪽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솔레이였다. 솔레이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와 엘리사의 앞에 섰다.
“부인께서 돌아오신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군요! 돌아오셔서 정말 기뻐요!”
순진무구한 얼굴에 악의는 보이지 않았지만, 에스타에게 크게 한 번 데인 엘리사는 솔레이의 환영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솔레이 양.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그래서 엘리사는 아쉬워하는 솔레이를 두고 돌아섰다. 그렇게 방에 도착한 엘리사는 크게 방을 둘러봤다.
‘변한 게 없네.’
그녀가 공작저를 나갔을 때와 거의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그녀의 물건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신문 좀 가져다줄래요, 헤리엇?”
“어떤 신문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전부 다 가져다주세요. 속보 신문도요.”
“알겠습니다.”
헤리엇이 나가고 엘리사는 하인들이 가지고 온 짐을 손수 정리했다. 중요한 물건들이 대부분인지라 하녀들의 손은 거의 빌리지 않았다.
“여기 말씀하신 신문입니다.”
그렇게 정리를 끝냈을 무렵, 헤리엇이 부탁한 신문들을 가지고 왔다. 엘리사는 소파에 앉아 가장 먼저 제임스가 있는 시벨 일보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경고했어도 기사를 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2면 끝에 엘리사의 이혼 숙려 기간을 뒤로 미룬 것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그래도 좀 겁을 먹긴 했나 보네.”
겁을 먹지 않았다면 1면에 큼지막하게 냈을 테니까. 다른 신문들도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대부분 조그맣게 기사를 냈고, 과격한 표현이나 과장은 없었다.
“다행이다.”
그 사실에 안심하던 엘리사는 속보 신문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속보 신문에는 칼베른이 대륙 최고의 사랑꾼이라도 되는 양 온갖 찬사를 늘어놓았다. 보기 민망할 정도라서 엘리사는 속보 신문을 구겨 바닥에 던졌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헤리엇이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마님, 아론 남작님께서 거의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엘리사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가 공작저로 돌아온 지 어언 4시간이 흘렀다. 에드윈이 왔다는 건 어려진 칼베른도 왔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크게 숨을 토해내며 일어섰다.
“지금 내려가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