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Come back. (2)2021.01.06.
“오랜만이군, 소공작 부인.”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황태자, 오스카였다. 마차가 화려해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설마 황태자일 줄이야.
“황태…….”
“됐어.”
엘리사가 놀란 마음을 삼키며 인사하려고 하자 오스카가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인사는 생략해도 돼. 호칭도 조심하도록. 지금 난 정체를 숨기고 있으니까.”
정체를 숨긴다면서 저렇게 화려하고 눈에 띄는 마차를 타고 나타난 건가. 오스카가 입고 있는 옷 역시 화려했기 때문에 엘리사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오스카는 누가 봐도 황족처럼 보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엘리사는 오스카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칼베른이 보낸 편지를 보고 온 게 분명했다.
“나도 여기까지 오고 싶지 않았는데, 궁금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오스카의 대답이 이상했다.
“마리아를 말릴 겸 겸사겸사 아파서 연차까지 낸 친구의 병문안을 가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감쪽같이 사라졌지, 뭐야.”
“…….”
“뭐, 원래 행적을 알리지 않는 놈이긴 한데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지. 그래서 찾고 있어.”
말하는 걸 들어봤을 때 오스카는 칼베른이 어려졌다는 것도, 그리고 이곳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칼베른이 보낸 편지를 보지 않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칼베른이 아파서 연차를 낸 건 알고 있으니까.
‘혹시 날 떠보는 건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걸까. 엘리사는 어느 쪽일지 생각하며 오스카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건가요?”
“맞아. 그래서 묻는 건데, 클라우드 소공작이 어디 갔는지 알고 있나?”
오스카는 칼베른이 여기 있는 걸 모르는 게 확실했다.
“모릅니다.”
칼베른이 무슨 이유에서 오스카에게 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하는 대로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아 엘리사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잡아뗐다.
“아하, 혹시 그래서 이혼 숙려 기간을 늦춘 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엘리사는 오스카가 불과 2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가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클라우드 소공작의 일이라서 그런지 대법관이 나한테 바로 보고를 하더군.”
“……그런가요.”
“걱정하지 마.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굳이 소문내지 않아도 내일이면 다 알려지겠지만.”
“무슨 의미죠?”
“무슨 의미긴. 부인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대들의 이혼을 주시하고 있다는 거.”
그 말에 엘리사는 법원 앞에서 만난 기자, 제임스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부인이 이혼 숙려 기간을 늘린 것과 칼베른이 법원에 나타나지 않은 걸 알아채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생각해 낸 이유를 가지고 추측 기사를 쓰겠지.”
“할 짓 없는 사람들이네요.”
“할 짓 없긴. 그게 그들의 일인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아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베른이 정말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 거지?”
“네.”
“그럼 이혼 숙려 기간을 늘린 건 순수하게 부인의 생각인가? 칼베른의 의견은?”
“그럴 리가요. 소공작님께선 어젯밤 헤리엇을 통해 편지를 보냈어요. 좀 더 의견 조율이 필요한 것 같으니 이혼 숙려 기간을 늘려달라고 말이죠. 그래서 기간을 늘린 겁니다.
“흠, 그래?”
오스카가 눈을 가자미처럼 얇게 뜨고 엘리사를 쳐다봤다. 엘리사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여기서 어색하게 웃거나, 시선을 피하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걸 보여주는 꼴이 되니 엘리사는 최대한 담담하게 오스카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군.”
오스카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이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들킨 건가?’
더 자세히 묻지 않는 걸 봐서 그건 아닌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엘리사는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오스카를 주시했다. 오스카가 마차 앞에 서자 마부가 문을 열었다. 오스카는 한 발을 마차 계단에 걸치고 엘리사를 돌아봤다.
“혹 칼베른을 만난다면 날 만나러 와달라고 전해주게. 이틀 내로 말이지.”
“알겠습니다.”
엘리사는 오스카 굳이 이틀이라고 시간 제약을 붙이는 게 껄끄러웠지만, 그 사실을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부탁하지. 그리고 부디 이혼 문제도 잘 해결됐으면 좋겠군. 되도록 하지 않는 쪽으로 말이지. 난 부인이 무척 마음에 들거든.”
오스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열어 마부이자 호위 기사에게 명령했다.
“저 여자, 뭔가 숨기는 게 있다. 사람을 붙여서 그게 뭔지 알아내.”
**** 황족이 탄 마차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배웅하는 게 예의였기 때문에 엘리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긴장하느라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주방으로 가려는데 커튼을 친 창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
칼베른이었다. 엘리사가 칼베른을 보고 탄성을 뱉으며 멈춰 선 건 그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아침만 해도 칼베른은 엘리사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검은색 줄무늬 조끼에 레이스가 달린 셔츠, 조끼와 세트로 맞춘 반바지와 무릎까지 오는 양말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었다.
‘귀여워!’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귀여운 옷차림에 시선을 빼앗긴 엘리사가 멍하니 쳐다보자 칼베른이 그녀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네? 아, 아무것도요.”
차마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봤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엘리사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다행히 칼베른은 그에 대해 깊게 캐묻지 않았다.
“황태자를 만났더군.”
“보셨어요?”
“그래.”
칼베른은 오스카의 마차가 엘리사의 집 앞에 멈춰 섰을 때부터 마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무슨 말을 했지?”
창문의 위치가 절묘하기도 하고 커튼 덕분에 들키지 않고 오스카와 엘리사가 대화를 나누는 걸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대화 내용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별 이야기 안 했어요.”
엘리사는 오스카와 나눈 대화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대처를 잘했군. 수고했다.”
겉모습은 6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인데 말하는 건 어른이니 듣는 입장에선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신 건가요?”
“그래.”
“어째서요? 황태자 전하의 도움을 받는 편이 더 좋지 않나요?”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지. 하지만 어디서 누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데 섣불리 말을 밖으로 옮기는 건 위험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그건 그렇지. 엘리사는 칼베른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 계속 숨기실 건가요?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 방금만 해도 이틀 내로 황궁으로 오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칼베른이 이틀 내로 오스카를 만나러 가지 않으면 오스카의 성격상 다시 그를 찾아 나설 게 분명했다. 칼베른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틀 동안 기다려보고,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가 없으면 그땐 황태자에게 사실대로 말하도록 하지. 그대가 수고 좀 해줘.”
“제가요?”
“그래. 편지로 사실을 전하기엔 누가 훔쳐볼 수도 있고, 증거가 남을 수 있으니 그대가 직접 황태자에게 가서 말을 전해 줘.”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꼭 제가 해야 하나요? 아론 경을 시키면 안 돼요?”
“에드윈은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니 이 일은 그대가 맡아줘.”
“으음, 알겠어요.”
오스카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하니 엘리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원에 간 일은 잘 해결됐나?”
“네. 일주일 뒤로 미뤘어요. 아, 그러고 보니 내일 그에 관해서 기사가 날 것 같은데 괜찮나요?”
“괜찮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언론을 함부로 통제했다가 오히려 상황이 악화할 수도 있으니 일단 내버려 두는 수밖에.”
“막을 방법이 없다는 의미군요.”
하긴 언론은 황실도 통제하기 힘든데 칼베른이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상한 기사만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자들도 생각이 있다면 너무 이상한 기사는 내지 않을 거다. 만약 그런다면 그땐 명예 훼손으로 전부 잡아들이면 돼.”
“그러려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셔야겠네요.”
엘리사가 정곡을 찌르자 칼베른이 입을 다물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턱에 불만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어른 모습으로 저런 표정을 지었다면 몹시 얄미웠을 텐데, 어려져서 그런지 얄밉긴커녕 귀여웠다. 마시멜로우 같아 보이는 새하얀 뺨을 쭉 잡아당기고 싶다고나 할까.
“왜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지?”
“흠, 흠. 아무것도요.”
음흉한 속마음을 들킨 엘리사는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럼 점심 먹을까요?”
**** 만약 칼베른이 갑자기 어려진 이유가 마법 때문이라면 마법을 이용해 만든 약을 먹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엘리사는 어려지는 마법 약이 있는지 찾기 위해 점심을 먹고 2층 연구실로 향했다. 원래는 혼자 가려고 했지만, 칼베른이 그도 같이 찾아보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갔다.
“조금 어지러울 텐데 괜찮아요? 정리를 전혀 안 했거든요.”
“상관없어.”
“그래요…….”
제르나 남작 말고 다른 사람에게 연구실을 보여준 적이 없어 약간 긴장됐다. 엘리사는 괜히 말라오는 입을 축이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
나무문 너머로 드러난 풍경을 본 칼베른은 헛웃음을 지었다. 바닥엔 발 디딜 틈도 없이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책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었다. 방 한쪽엔 정체불명의 마법 진이 그려져 있었으며, 마법 진의 중심에는 마법 약을 만들 때 쓰는 거로 추정된 낡은 가마솥이 있었다.
“조금 어지러운 정도가 아닌데.”
“저, 정리하려고 했어요.”
이럴 줄 알고 안 보여주려고 한 건데. 엘리사는 얼굴을 붉히며 발로 종이를 옆으로 밀었다.
“종이는 적당히 밀고 앉으면 돼요. 깔고 앉아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괜찮나? 중요한 종이 아닌가?”
“바닥에 널브러진 건 대부분 실패한 제조법이라서 상관없어요. 아, 한 가지 주의를 드리자면 마법 진 안으론 들어가지 마세요. 마나 충돌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난 연금술사도 마법사도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거예요.”
칼베른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종이를 밀어내고 바닥에 앉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문 아래였다. 엘리사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칼베른에게 건네줬다.
“연금술 기본 책이에요. 연금술사가 아니라서 어려운 책은 읽기 힘들 테니 여기서 찾아봐요.”
“그러지.”
칼베른은 진지한 얼굴로 책을 읽었다. 엘리사는 그 옆에 앉아 좀 더 어려운 연금술 책을 펼쳤다.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봤지만, 어려지는 약에 대한 건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일렀다.
‘다른 책을 확인해봐야겠네.’
엘리사가 보던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을 때, 팔에 무언가 닿았다.
“어?”
칼베른의 머리였다. 책이 지겨웠는지 그는 책을 읽다 잠들었다. 거참, 이럴 거면 왜 따라오겠다고 한 건지. 엘리사는 혀를 차며 칼베른을 불렀다.
“저기요.”
“…….”
“저기요?”
어지간히도 깊이 잠들었는지 몇 번을 불러도 칼베른은 미동이 없었다. 길게 내려 앉은 속눈썹은 좀처럼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흔들며 깨우면 깰 것 같았지만 그러기엔 왠지 미안해서 엘리사는 칼베른을 내버려 두고 책을 읽었다. 어느덧 저문 석양의 붉은 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에드윈이 헤리엇과 함께 엘리사의 집을 찾아온 건, 자정이 조금 지난 늦은 밤이었다.
“……정말이었군요.”
헤리엇에게 미리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덕분인지 에드윈은 어려진 칼베른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갑자기 어려진 이유는 찾으셨습니까.”
칼베른이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럴 찾았다면 내가 이러고 있지 않지.”
“그건 그러시겠죠.”
에드윈은 잠시 생각했다가 다시 칼베른에게 물었다.
“뭔가 전조 현상 같은 건 없으셨습니까?”
“평소보다 피곤하다는 것 말곤 없었다.”
“그 말씀은 혹…….”
에드윈은 말을 하다 말고 한 발 떨어져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엘리사를 흘겨봤다.
‘내가 있는 곳에서 말하기 곤란한 내용인 모양이네.’
그럼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지. 엘리사는 군말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헤리엇도 올라가자 에드윈이 칼베른이 들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날이 오신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야. 주기가 아직 되지 않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해볼까요?”
에드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소공작님을 좋아하는 여자들의 수명을 흡수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칼베른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무거운 입을 뗐다.
“8일 뒤에 시도해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