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달다. (51/156)

51화. 달다.2020.12.26.

“그러니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그대가 도와줘.”

다른 상황이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혼할 사이인데 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냐며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말했겠지만, 문제의 ‘이혼’이 걸려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칼베른이 말한 것처럼 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이혼할 수 있으니까. 물론 칼베른이 어려졌다는 걸 공개하고 증명하면 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이혼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증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위험하다는 거지.’

당장 내일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는데 판사에게 칼베른이 어려졌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순히 말로 설명해선 믿어주지 않을 테고. 어쨌거나 당장 내일 이혼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증명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 사이 칼베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엘리사는 평생 클라우드 공작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건 싫어.’

평생 엘리사 클라우드로 살고 싶은 마음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생각을 마친 엘리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도와줄게요. 그런데 제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죠?”

“공작저에 머물려면 위장 신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만들기 위해선 에드윈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제야 엘리사는 칼베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항상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에드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아론 경, 어디 갔나요?”

“볼일이 있어서 클라우드 공작저로 내려갔다. 어려지기 전에 다시 불렀으니 늦어도 모레까진 돌아올 거다. 그러니 그동안 지낼 곳이 필요해.”

한마디로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해달라는 의미였다. 조금 난감한 요구에 엘리사는 미간을 좁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집은 무려 차기 클라우드 공작인 칼베른이 머물기엔 너무 작고 허름했으며 다른 문제도 있었다.

“그런 부탁은 제가 아니라 차기 공작부인이 될 분에게 하셔야죠.”

재혼할 남자가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전처가 될 여자의 집에서 머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솔레이가 알면 크게 상심하거나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칼베른이 고개를 기울였다.

“차기 공작부인이 될 사람? 누굴 말하는 거지?”

“누구긴요. 솔레이 양을 말하는 거죠.”

“그녀가 차기 공작부인이 될 거라고?”

칼베른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그는 팔짱을 끼고 삐딱한 시선으로 엘리사에게 되물었다.

“설마 그대는 내가 솔레이와 재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닌……가요?”

“아니야. 도대체 날 어떻게 보았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표정이나 말투를 보아하니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내가 뭘 착각한 거지. 이해하지 못한 엘리사가 눈만 깜빡이며 칼베른을 쳐다보자 헤리엇이 조심스럽게 뒤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레이 님은 작은 주인님과 외사촌 관계이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엔티스라는 성,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클라우드 공작부인이 미혼이었을 적 가지고 있었던 성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이 결혼할 거라고 착각했던 게 부끄러워 엘리사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전 소공작님이 솔레이 양에게 안살림을 맡긴다고 하시길래 결혼할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결혼하지 않더라도 안살림은 맡을 수 있어. 고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죠. 정말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엘리사가 거듭 사과하자 칼베른이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른 모습일 때도 오만해 보였던 행동은 아이 모습으로 보니 더 건방져 보였다.

“그럼 아론 경이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머무시려고요?”

“안 되는 건가?”

“아니요. 안 될 건 없는데,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보다시피 집이 작고 허름하거든요.”

칼베른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는 엘리사가 아닌 소파 테이블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 말한 건 실수였다. 비하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

그러고 보니 칼베른은 저택을 떠나기 전, 이 집이 작고 허름하다는 말을 했었다.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 쓰지 말라더니 그가 더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이곳에서 머물러도 괜찮다. 그대가 허락만 해 준다면.”

“괜찮다면, 그래요. 그렇게 해요.”

칼베른이 괜찮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거절해서도 안 되는 상황인지라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법원에 가서 이혼 숙려 기간을 늘려달라고 해야겠네요.”

“한 달이나 늘일 수 있는 건가?”

“아니요. 제가 알기로 늘릴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예요.”

“그럼 취소하는 게 낫지 않나?”

“혹시 일주일 안에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으니, 일단 늘이고 기다려보려고요.”

“……그렇게도 나와 이혼하고 싶은 건가.”

“네? 뭐라고 하셨어요?”

워낙 작은 목소리인지라 엘리사에게까진 들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되묻자 칼베른은 고개를 저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니, 아무것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미심쩍은 눈으로 칼베른을 바라보던 엘리사는 문득 그의 얼굴이 상당히 붉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열 있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다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붉은데요. 헤리엇이 보기에도 붉죠?”

“네. 평소보다 붉으시군요.”

“아무렇지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려는데 이마에 엘리사의 손이 닿았다. 칼베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마에 닿은 손이 굉장히 차가웠다.

“역시 열이 있네요.”

그 손이 떨어져 나갔을 땐 아쉬운 기분이 들어 칼베른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만졌다.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린 건가.”

“난 그런 거 안 걸려.”

“네, 네. 그러시겠죠.”

“안 믿는 눈치군.”

“당연히 안 믿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살면서 감기는 한 번씩 다 걸린다고요.”

엘리사는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공작님은 예전에도 감기에 걸리신 적이 있잖아요.”

“내가?”

“네. 분명 5년 전, 그러니까 결혼 초였을 걸요. 그때도 지금처럼 열이 많이 나셨죠.”

”아.“

엘리사가 말하는 때가 언제인지 떠올린 칼베른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이 나는 이유가 감기 같은 게 걸려서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말할 수 없는 이유인지라 칼베른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칼베른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다가 헤리엇을 돌아봤다.

“헤리엇도 비를 많이 맞았는데 괜찮아요?”

“전 괜찮습니다.”

“다들 말은 잘하네요.”

엘리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2층 계단 쪽으로 돌아섰다.

“해열제랑 감기약을 만들어 올 테니까 두 사람 다 마셔요.”

“전 괜찮…….”

“헤리엇도 마셔요. 알았죠?”

엘리사가 강조하듯 말하니 헤리엇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엘리사가 약을 가지러 2층으로 올라가자 칼베른이 혀를 쯧, 찼다.

“감기일 리가 없는데 괜한 짓을 하는군.”

“그래도 마님께서 약을 가져오시면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칼베른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헤리엇을 쳐다봤다.

“내가 아플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하는 건가?”

“그건 압니다만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주인님께서 어려지신 것만 봐도 이례적인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칼베른은 제 손을 바라봤다. 검 한 자루도 제대로 쥘 수 없을 것 같은, 쓸데없이 작은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도 그 마녀가 건 저주의 일종인 걸까?”

“저의 짧은 식견입니다만 아닌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어려진 분은 없었으니까요.”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의아한 거다. 만약 마녀가 건 저주의 일종이라면 왜 나한테만 발현됐는지, 그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저주나 마법을 건 거라면 그 마녀를 이길 수 있을 만큼 힘이 강력하다는 의미이니 어떤 놈일지 궁금해.”

그래, 몹시 궁금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혹 클라우드 공작가의 혈족에게 내려오는 빌어먹을 저주를 풀 수 있는지 상당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른 알아봐야겠군.”

“그 전에 주변을 정리하셔야 합니다. 주인님이 어려진 걸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요.”

“알아. 그래서 말인데 헤리엇, 그대는 날이 밝자마자 공작저로 돌아가도록 해. 가서 사용인들에겐 내가 급한 볼일로 새벽에 떠났다고 말해둬.”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써줄 테니 성국으로 보내. 기사단엔 하인을 보내서 급한 용무로 당분간 쉰다고 말하고.”

또 명령할 게 없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엘리사가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가지고 온 약병을 칼베른과 헤리엇에게 각각 나눠주었다.

“자, 마셔요.”

“색깔이 다르군.”

헤리엇의 물약은 연한 보라색이었고 칼베른의 물약은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똑같은 감기약 아닌가?”

“약간 달라요. 헤리엇의 물약에는 해열제가 안 들어 있거든요.”

“흠.”

칼베른이 미묘한 눈으로 약병을 쳐다보자 엘리사가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독 같은 거 안 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뭐, 정 못 믿겠으면 제가 기미라도 해드릴게요.”

“됐어.”

칼베른은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 시원하게 약을 마셨다. 헤리엇도 전부 다 마셨다.

“수면제가 약간 들어가 있어서 잠이 올 거예요. 밤도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해요.”

“손님 방은 어디지?”

“손님 방 같은 거 없어요.”

이 집에 손님이 자고 간 적이 없으니 엘리사는 지금까지 손님방을 따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나랑 헤리엇은 어디서 자면 되지?”

“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을 어디서 재워야 하는 거지. 엘리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한 명뿐이라면 제르나 남작의 방에서 자라고 하면 되지만, 두 사람이 자기엔 좁았다. 침대도 하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헤리엇을 드레스 룸이나 연구실에서 자라고 할 수도 없고, 그곳엔 침대도 없었다.

‘그나마 이 소파가 있긴 한데…….’

문제는 헤리엇이 자기엔 소파가 작았다. 어려진 칼베른이 자기에 딱 맞는 사이즈였다. 그렇다고 차기 클라우드 공작인 그를 소파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

‘부부 침실에 있는 고급 소파 정도만 됐어도 이런 고민은 안 했을 텐데.’

지금 이 소파는 소파 구색만 갖추고 있는 싸구려 소파였다. 칼베른이 이곳에서 자는 건 마음이 걸렸다. 헤리엇도 바라지 않을 테고. 엘리사가 소파를 보며 고민하는 모습을 본 헤리엇이 웃으며 말했다.

“전 소파에서 자도 상관없습니다.”

“자네가 자기엔 소파가 작은 것 같은데.”

칼베른이 소파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자기에 딱 맞는 크기군.”

헤리엇이 반색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인님을 소파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괜찮아. 몬스터 토벌을 가면 이것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잔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오나…….”

“괜찮다고 말했을 텐데.”

칼베른이 단호하게 말하니 헤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칼베른은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우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피곤하군. 이만 잘 거니 모두 자러 가도록.”

  **** 달이 기우는 늦은 밤. 엘리사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난데없이 칼베른이 어려지는 바람에 그토록 바라던 이혼을 하지 못하게 돼서 마음이 심란한 탓이었다. 칼베른이 싸구려 소파에서 자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어떻게든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고 양을 세는 등 온갖 노력을 했지만,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 엘리사는 침실을 나섰다. 수면제 대신 우유를 데워 먹을 생각이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

주방으로 가려면 칼베른이 있는 거실을 지나가야 했으니까. 혹 자는 칼베른을 깨우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는 깨어 있었다. 창틀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던 칼베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돌아봤다.

“안 잔 건가?”

“자다가 깼어요. 소공작님은 안 주무세요?”

“낮잠을 잤더니 잠이 안 와서.”

“마음이 심란해서 못 주무시는 건 아니고요?”

정곡이었는지 칼베른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고 넘어갔으면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을 일이 없었을 텐데 엘리사는 괜한 말을 꺼낸 걸 후회하며 볼을 긁적였다.

“음, 몸은 어때요?”

엘리사는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면서 칼베른의 상태를 알기 위해 물었다.

“괜찮아.”

“열은요?”

“없어.”

“정말 없는 거 맞아요?”

있어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니 엘리사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칼베른의 곁으로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댔다.

“정말 열은 없네요.”

“…….”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아무것도.”

칼베른이 고개를 저으며 창문 유리에 머리를 기댔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심란하겠지.’

갑자기 어려져서 모든 게 다 틀어졌는데 심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이 안 오면 우유 따뜻하게 데워 줄까요?”

“내가 겉모습이 어려졌다고 해도 진짜 어린애가 된 건 아니니 어린애 취급하지 마.”

“어린애가 아니더라도 따뜻한 우유는 먹어요.”

엘리사는 잠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엘리사는 컵을 칼베른에게 건네주었다.

“드시고 주무세요.”

엘리사가 방으로 들어가고, 혼자 남은 칼베른은 우유를 마셨다.

“달아.”

꿀을 넣은 건지 우유는 굉장히 달았다. 이렇게 단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이건 싫지 않아 칼베른은 전부 다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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