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그대가 도와줘. (50/156)

50화. 그대가 도와줘.2020.12.23.

“…….”

깊은 수마 속에 잠겨 있던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엘리사는 초점이 흐린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봤다. 낡고 허름한 천장. 자신의 집 천장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네.’

그렇다면 칼베른이 어려져서 나타난 건 꿈이었던 걸까.

‘아니, 꿈이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어려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꿈이라서 다행이다.’

진짜였으면 정신이 나갔을 거야. 엘리사는 가슴 깊이 안도하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악몽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지금 몇 시지……?”

“밤 11시다.”

“!”

혼자 중얼거린 말에 누군가 대답하자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꿈속에서 봤던 그 소년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째서, 왜, 당신이 여기에…….”

너무 놀라 말이 스타카토처럼 끊어졌다. 설마 아직도 꿈을 꾸는 건 아닐 테고.

‘전부 현실이라고?’

정말로 칼베른이 어려졌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됐다. 엘리사는 부디 꿈이길 바라며 볼을 세게 꼬집어봤지만 얼얼한 통증만 느껴질 뿐, 눈앞의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칼베른이, 진짜로…….

“어려지셨군요…….”

“그 정도 확인했으면 이제 믿을 때도 되지 않았나?”

소년, 칼베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엘리사는 울컥하는 마음에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어른일 때도 얄미웠는데 어린 모습으로 저러니 더 얄미웠다.

“작은 마님께서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시니 주인님께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어느덧 엘리사의 옆으로 나타난 헤리엇이 연륜 있는 미소를 지으며 칼베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님께서도 차를 드시겠습니까?”

“네? 아, 네. 그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주방으로 들어간 헤리엇은 마치 이 집이 그의 집인양 능숙하게 차를 준비했다.

“엘리사.”

얼떨떨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리사는 칼베른이 부르자 그를 돌아봤다. 어려진 그의 모습이 눈에 박혔다. 현실을 인정하고 난 뒤에도 적응되지 않는 모습에 엘리사가 시선을 길게 내리깔자 칼베른이 작게 웃었다.

“많이 어색한 모양이지?”

“당연하죠.”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어려졌는데 어색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진짜 칼베른 클라우드 소공작님 맞으시죠?”

“아직도 안 믿는 건가?”

“안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거예요.”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 소년은 칼베른이 확실했다. 엘리사는 그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어쩌다가 어려진 거냐고 물어보려다 문득 칼베른이 입고 있는 옷이 굉장히 낯익다는 걸 알아챘다. 자신의 눈이,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소공작님께서 입고 계신 그 옷, 제 셔츠 아닌가요?”

“맞아.”

엘리사는 당황하며 물었지만, 칼베른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마땅히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실례인 줄 알지만, 허락도 없이 그대의 옷을 빌렸다.”

내용은 사과인데 말투와 표정은 오만하고 권위적이었다.

“욕실도 사용했고.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하지.”

어린 소년이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게 놀라우면서도 상대가 칼베른이라고 생각하니 납득이 됐다. 본 적 없는 그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분명 애늙은이였겠지. 엘리사는 칼베른이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건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칼베른은 비를 맞아서 홀딱 젖은 상태였으니까. 그 상태로 계속 있다간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씻고 갈아입을 옷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해하지만, 그래도 신경 쓰여!’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남편이 제 옷을 입고 있는 데 신경이 안 쓰이면 그게 더 이상했다. 엘리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칼베른이 입고 있는 제 셔츠를 흘겨봤다. 엘리사에게 딱 맞는 셔츠는 어린 칼베른에게 다소 컸다. 셔츠 끝이 무릎까지 내려와 마치 치마 같았다.

‘귀엽긴 하네.’

어른 칼베른 모습이었다면 징그러웠을 텐데 어려져서 그런지 귀여웠다. 작아져도 줄어들지 않은 눈부신 외모도 귀여움을 돋보이는데 한몫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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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흘겨보는 거지?”

“네, 네? 제, 제가 언제요?”

“방금 그랬는데.”

“그, 그럴 리가요! 그, 그런 적 없어요!”

당황한 만큼 목소리가 커졌다. 엘리사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부정했다.

“아님 말고.”

그런 엘리사의 반응은 누가봐도 이상했지만, 칼베른은 더 캐묻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엘리사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섭섭했다. 이 남자,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구나.

“여기 있습니다, 마님.”

“아, 고마워요, 헤리엇.”

찻잔을 받아들던 엘리사는 그제야 헤리엇이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헤리엇도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얼른 갈아입어요.”

엘리사의 재촉에 헤리엇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마님의 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 그냥 이대로 있겠습니다.”

“아아, 아빠의 옷이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네? 하지만 그건 유품인데…….”

“괜찮아요. 자자, 옷은 욕실 앞에 둘 테니 헤리엇은 들어가서 씻어요.”

엘리사의 성화에 헤리엇은 어쩔 수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엘리사는 제르나 남작의 옷을 욕실 앞에 내려놓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왜 어려졌는지 아세요?”

그리고 아까 그가 자신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미처 묻지 못했던 걸 물었다.

“몰라. 자고 일어나 보니 이런 상태였어.”

“그렇군요.”

하긴, 왜 어려졌는지 이유를 알면 자신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러 갔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됐을 리는 없고. 되기 전에 뭔가 징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거 없었나요?”

“딱히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없었을 리가 없잖아요. 마법이든 저주든 간에 분명 징조가 있었을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흐음.”

칼베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징조 같은 건 역시 없었던 것 같은데. 굳이 꼽자면 오늘따라 몸이 피곤했다는 것 정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래요?”

엘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칼베른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생각지 못한 격한 반응에 칼베른은 약간 떨떠름해 하며 입을 열었다.

“4시간 전의 일인데…….”

4시간 전, 칼베른은 하녀가 준 약차를 마시고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잠에서 깬 그는 손을 뻗었다. 탁자에는 목이 마를 때 언제든지 물을 마실 수 있게 물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위치는 그가 이 집무실을 사용했을 때부터 항상 똑같았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잡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잡히지 않았다. 누가 옮긴 건가? 그럴 리가. 눈을 감기 전에 그곳에 물병이 있는 걸 봤는데. 칼베른은 탁자를 더듬기 위해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탁자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마찬가지였다.

‘탁자가 아예 통째로 사라졌다고?’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칼베른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린애가 됐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하아.”

칼베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따.

‘큰일이네.’

어떤 징조가 있었는지 알아야 적어도 마법인지 저주인지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단서가 아무것도 없으니 답답했다.

‘일단 신관이나 마법사를 찾아가볼까.’

만약 저주라면 신관이, 마법이라면 마법사가 알아볼 것이다.

“신전에 연락해보셨나요?”

정황상 마법보단 저주일 가능성이 크니 신관에게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물었다.

“아니, 아직.”

“그럼 내일 날이 밝자마자 신전에 연락해보도록 하죠.”

“그건 안 돼.”

“어째서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지금 우리 가문은 약간 위태로운 상태다. 수많은 승냥이들이 호시탐탐 가문을 노리고 있지. 그런데 나까지 이런 상태가 됐다는 게 알려진다면, 승냥이들은 바로 우리 가문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거다.”

그건 그렇지. 엘리사도 클라우드 공작가의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신전에 연락하는 건 안 돼. 연락하는 순간 내가 어려졌다는 게 만 천하에 공개될 테니까.”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건가요?”

“그럴 리가. 내일 성국에 연락할 생각이다.”

성국? 아, 크라임 대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거구나.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성국까지 편지를 보내는 데 일주일, 크라임 대주교가 편지를 받고 준비해서 제국으로 오는 데 못해도 2주는 걸려요.”

텔레포트 스크롤을 쓰면 조금 단축할 수는 있지만,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려도 괜찮나요? 당장 일주일 뒤에 작위 계승식인 걸로 아는데요. 설마 작위 계승식 때 어린 모습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죠?”

“그럴 리가. 작위 계승식은 황태자 전하께 편지를 보내면 한 달 정도는 미룰 수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그리고 그대가 걱정해야 할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요?”

“내일 이혼 조정하러 법원에 가야 하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구나.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가 탄성을 뱉자 칼베른이 픽 웃었다.

“완전히 새카맣게 잊고 있었나 보군.”

“너무 놀라서 그만…… 그것보다 내일 어떡해요? 그 모습으로 법원에 갈 수는 없잖아요.”

가는 거야 가능했지만, 문제는 이혼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저 어린 모습으로 판사에게 가서 내가 칼베른 클라우드라고 말하는 것도 웃겼고, 판사가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러면 칼베른이 어려졌다는 걸 세상에 공개하는 꼴이 되니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혼을 미루는 수밖에.”

“말도 안 돼!”

기다리던 이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엘리사는 기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님?”

욕실에서 막 나온 헤리엇이 의아해하며 엘리사를 불렀다. 칼베른도 약간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흠, 흠.”

엘리사는 격하게 반응했던 게 부끄러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보는 눈이 있어 표정 관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내일 깔끔하게 이혼한 뒤, 엘리사 제르나로 돌아가 홀가분하게 제국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칼베른이 어려지면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그것만으로도 성가시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더 짜증 나는 건 기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칼베른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일주일 뒤가 될지, 일 년 뒤가 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운이 나쁘면 평생 돌아오지 않을 수도…….

‘아니지, 아니야. 말이 씨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런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긍정적인 생각만 해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엘리사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칼베른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자신이 어려졌다는 걸 알게 된 직후, 수많은 생각을 했다. 갑자기 왜 어려진 건지. 저주나 마법에 걸린 거라면 누가 그런 건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했지만,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돼.’

그 아무 속에는 공작가의 가신들과 사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말이 세어나갈지도 모르고.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어려진 모습을 그들에게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물론 개중에는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예를 들면 총괄 집사인 헤리엇과 자신의 비서인 에드윈. 그리고 자신의 부인인 엘리사.

‘그녀는 아니야.’

아직은 엘리사가 제 부인이긴 하지만 내일이면 남이 될 사이였다. 그러니 그녀는 제외하는 게 맞았으나, 이 순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엘리사 말고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헤리엇은 믿을 수 있지만, 귀족이 아닌지라 크게 도움을 줄 수 없었고, 에드윈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역시 엘리사에게 가야겠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칼베른은 곧바로 헤리엇을 불렀다. 어려진 칼베른을 본 헤리엇은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지만, 의외로 쉽게 칼베른의 말을 믿었다. 칼베른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칼베른은 헤리엇의 도움을 받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 엘리사에게 온 것.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가 이혼하려면 내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

칼베른은 두 손을 마주 쥐고 진지한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그대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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