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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격변. (7) (47/156)

47화. 격변. (7)2020.12.12.

마차에서 내려 따로 말을 타고 칼베른이 향한 곳은 약간 외곽 지역에 있는 작은 여관이었다.

“각하.”

그곳엔 이미 에드윈이 와 있었다. 칼베른은 말 고삐를 여관의 마굿간지기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말 조심해라. 난 아직 공작이 아니야.”

“아직은 아니지만 거의 된 거나 다름없으시죠. 한 달 뒤면 확실하게 공작 각하가 되실 거고요.”

“한 달 뒤의 일이다. 그때까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에드윈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했다. 그들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허름하고 작은 여관과 어울리지 않는 귀족의 등장에 주인이 헐레벌떡 달려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어서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조용히.”

에드윈이 두툼하고 거친 손에 금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금화를 본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이 다물어졌다. 에드윈이 원하는 대로 주인은 입을 꿰매기라도 한 듯 꼭 감쳐물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놈은?”

“2층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칼베른은 에드윈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발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걸어가던 에드윈이 멈춰 선 곳은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방앞에는 허리춤에 검을 찬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에드윈이 붙여둔 공작가의 기사였다. 칼베른은 검을 빼들고 기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기사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벌컥 열었다.

“꼼짝 마!”

기사의 우렁찬 외침이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엉망진창인 방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기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눈에 띄게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윈이 성큼 들어와 옷장과 침대 밑 등 사람이 들어갈만한 장소를 샅샅이 살펴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군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기사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 남자가 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고, 다시 나온 적은 없습니다!”

“창문으로 뛰어내렸을 가능성은?”

“그건 아닐 겁니다.”

에드윈은 손바닥만한 창문을 열어 밖을 보며 말했다.

“어린 아이라면 모를까, 어른은 통과할 수 없는 크기니까요. 그리고 희미하지만 마나를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남자가 마법사라는 건가?”

“마법사일 수도 있고 마법 물품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텔레포트 스크롤 같은 거요.”

텔레포트 스크롤은 아주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동 마법 스크롤이었지만 대신 가격이 매우 비쌌다.

“그 정도의 재력이 있는 남자가 이런 허름한 여관에 머물 거라곤 생각지 않는데.”

“용병들이 위급 상황일 때 살기 위해서 전재산을 다 털어 하나 쯤 준비해두는 것처럼 그 남자도 그랬을 수 있죠.”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동시에 목표했던 남자를 놓쳤다는 의미이니 칼베른은 짜증스레 혀를 찼다.

“방을 뒤져봐라. 그 남자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네, 소공작님.”

기사와 에드윈, 그리고 칼베른은 물건이 난잡하게 뒤엉킨 방을 샅샅이 뒤졌다. 칼베른은 탁자 위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작은 상자에는 정체불명의 푸른 구슬들이 담겨 있었다.

“에드윈, 이게 뭔지 알고 있나?”

“잠시만요.”

에드윈은 푸른색 구슬을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보석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구슬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만드는 데 쓰는 재료가 아닐까요?”

“재료?”

“물론 제 추측입니다. 확실한 건 연금술사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제조법들의 정체도 알아보고요.”

연금술사. 칼베른은 그 단어를 듣자마자 엘리사를 떠올렸다.

‘그녀에게 물어볼까.’

괜히 다른 연금술사들에게 물어봤다가 계획이 들통날 수도 있으니 엘리사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칼베른은 푸른 구슬이 든 상자와 제조법들을 챙겨 들고 여관을 나섰다. ****

‘설마 그동안 아빠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둔 사람이 그 남자일 줄이야.’

처음에는 칼베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닉이 그가 했다고 당당히 말해서 엘리사는 의심을 지웠었다. 그랬는데, 그게 거짓말이었을 줄이야. 엘리사는 황당한 웃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집무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을 통해 그녀의 등 뒤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닉은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혹시 닉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우연히 겹친 게 아닐까? 아니지, 아니야. 그럼 관리인이 두 명이 그랬다고 말했을 텐데 그동안 꾸준히 찾아온 사람은 한 명 뿐이라고 했잖아. 즉, 닉이 거짓말을 한 게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엘리사는 닉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궁금했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지.’

어차피 닉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으니, 겸사겸사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엘리사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고 깃펜을 들었다. 펜촉에 잉크를 묻힌 뒤, ‘사랑하는 닉에게’라는 의례적인 인삿말을 썼을 때였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별 생각없이 들어오라고 대답한 엘리사는 칼베른을 보고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바쁜가?”

“아니요. 무슨 일이에요?”

“물어볼 게 있어서.”

칼베른은 가지고 온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고 열었다. 푸른색 구슬이 햇빛을 반사해서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인어의 눈물이네요.”

“단번에 알아보는군.”

“그야 아버지의 약 재료로 많이 썼거든요.”

“그 말은 이건 륀벤 병의 치료제를 만들 때 쓰는 재료라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고 다방면에 쓰여요. 치료제를 만들 때도 쓰고 마법 물약이나 독약을 만들 때도 쓰죠. 활용 범위가 넓은 재료예요.”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구하기 어려운 재료인데 이렇게 많다니.

“어디 재료상을 털어온 거예요?”

“아니. 어떤 남자한테 빼앗아왔어.”

“와,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연금술사인가보네요. 보통 이렇게까지 모으기 쉽지 않은데.”

엘리사가 순수하게 감탄하며 인어의 눈물들을 살펴보자 칼베른이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궁금하지 않나?”

“뭐가요?”

“내가 어떤 이유로 그 남자한테 이걸 빼앗아왔는지, 나쁜 의도는 없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래야 하는 건가요?”

엘리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칼베른은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지.”

그리고 상자와 함께 가지고 온 제조법이 적힌 종이를 엘리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럼 여기 적힌 제조법이 뭘 만드는 제조법인지도 알 수 있나?”

“일단 확인해 볼게요.”

엘리사는 칼베른이 가지고 온 제조법을 진지하게 정독했다.

“음, 죄송해요. 저도 처음 보는 제조법이라 뭘 만들려고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해독제일 가능성이 높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게 여기 쓰인 재료들, 전부 무언가를 해독할 때 쓰는 재료거든요. 예를 들면 이 백하초는…….”

칼베른의 시선은 종이를 짚은 새하얗고 가느라단 검지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붉은 입술로 옮겨졌다. 저 입술, 꽤 부드러웠는데.

“저기요, 제 말 듣고 있나요?”

달콤하기도 했었다. 평소 단걸 싫어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저 달콤함은 계속 맛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오래.

“저기요!”

가볍게 손등을 쥐는 감촉에 붉은 입술에 고정되어 있던 자색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사람이 말할 때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에요?”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은 갈색 눈동자가 한심한 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제야 자신이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칼베른은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흩뜨렸다.

“아무것도. 다른 생각을 한 건 미안하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당연히 없어야죠. 고의로 했으면 정말 무례한 거라고요.”

엘리사는 제조법이 적힌 종이를 칼베른 쪽으로 밀었다.

“하여간 제가 보기엔 이상한 약을 만드는 제조법은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연금술사 협회에 의뢰해봐요. 그럼 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러지.”

칼베른은 제조법이 적힌 종이를 집어들려다 그 옆에 있는 편지지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닉에게.]  

“…….”

편지지에는 한 줄 밖에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뭘 그렇게 보는…… 아.”

칼베른이 보고 있는 게 닉에게 보내려던 편지라는 걸 알아챈 엘리사는 황급히 편지지를 숨겼다.

“왜 남의 편지를 훔쳐보고 그래요?”

“훔쳐본 적 없어. 당당히 봤지.”

“그것도 잘못된 행동인걸요.”

모름지기 사람이란 실수를 하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칼베른은 반대였다.

‘자존감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실수를 모르는 건지.’

엘리사는 혀를 차며 편지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성기사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 사이가 아닌 건 아니죠. 친구 사이니까요.”

“그런데 편지에 사랑한다는 말을 적나?”

왜 또 저런 말을 꺼내나 싶었는데 저것 때문이었나. 엘리사는 차오르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진짜 닉을 사랑해서 적은 게 아니라 의례적인 인삿말이에요. 친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땐 다 이렇게 적어요.”

“나한테는 안 그랬잖아.”

“네?”

엘리사는 제 귀를 의심하며 칼베른을 쳐다봤고, 칼베른도 당황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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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해라.”

언뜻 본 그의 귀가 약간 붉었다.

‘설마 창피해하는 거야?’

저 뻔뻔한 남자가? 세상에 말도 안 돼. 엘리사는 신기해서 칼베른을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칼베른이 헛기침을 하며 상자를 들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일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

“그럴…… 아, 잠깐만요.”

칼베른에게 할 말이 떠오른 엘리사는 서랍에서 흰색 서류 봉투를 꺼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이게 뭐지?”

“이혼 서류예요.”

“……뭐?”

칼베른은 보기 드물게 놀라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1년 전에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 뭘 저리 놀라는 건지.

‘아, 혹시 잊고 있었던 건가?’

꽤 오래 전의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칼베른은 이혼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1년 전에 이야기 했었죠?”

엘리사는 칼베른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며 기억을 상기시켜주었다.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시면 이혼하기로.”

“…….”

“그러니 이제 그만 인장을 찍어주세요. 전 이미 찍었어요.”

엘리사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칼베른이 봉투를 열었다. 이혼 서류의 맨 아래에는 확실히 엘리사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분명 그런 약속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소공작님께서 정식으로 공작위를 받기 전에 호적이 정리될 테니까요.”

“…….”

“아니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지워야 하잖아요.”

엘리사는 왜인지 살벌하게 가라앉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부러 웃으며 농담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칼베른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혼 서류를 찢을 것처럼 노려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엄지에 끼고 있던 반지 도장을 뺐다.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찍어주지.”

‘칼베른 클라우드’라는 이름 옆에 그의 인장이 찍혔다. 칼베른은 인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서류를 봉투에 넣어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이러면 되는 건가?”

“네. 이제 한 달 뒤에 법원에 출석해주시기만 하면 돼요.”

혼인 신고는 쉬웠지만, 이혼 절차는 까다로웠다. 이혼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숙려 기간을 줬다. 자식이 있으면 3개월, 자식이 없으면 한 달. 그렇게 숙려 기간이 지나고, 당사자들이 법원에 출석해서 의사에 변함이 없다는 걸 발표하면 그제야 이혼이 성립됐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부재이거나, 반대하면 이혼이 성립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이혼하다니. 우리가 결혼했을 때처럼 또 한바탕 뒤집히겠군.”

“그래도 어쩔 수 없죠. 괜히 시간을 끄는 것보다 나으니까.”

엘리사가 담담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챙기자 칼베른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의미였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뭐, 이혼 이야기에 기분이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 기분 나쁜 티를 낼 필요가 있나.

“저택은 일주일 내로 나갈게요.”

칼베른이 기분 나빠한다고 해서 할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저택은 왜 나간다는 거지?”

“혹시 법원에서 위장 이혼이라고 생각할까봐요.”

재산 상속 등 여러 문제들 때문에 위장 이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법원은 위장 이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성격 차이로 싸워서 이혼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나갈…….”

“나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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