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격변. (4)2020.12.02.
건국제 파티는 황실에서 주최하는 파티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규모 파티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파티에 참가했다. 커다란 연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남자를 흘겨보며 수군거렸다.
“웬일로 클라우드 소공작님께서 혼자 파티에 참석하셨을까요?”
그 남자는 바로 칼베른이었다. 칼베른은 결혼 이후, 모든 파티에 항상 엘리사를 파트너로 데리고 왔었는데, 왜인지 오늘은 혼자였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글쎄요. 아프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은데. 감기 몸살이라고 했던가요?”
“어머나, 이 따뜻한 날씨에 감기 몸살에 걸리다니. 믿기지 않는데요. 혹시 감기 몸살은 핑계고 두 분, 싸운 게 아닐까요? 아니면 사이가 소원해졌거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벌써 결혼한 지 4년이 넘었으니 아무리 뜨겁게 불타오르던 사이라도 식을 때가 됐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결혼 기념일이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역시 그런 걸까요?”
사람들은 칼베른과 엘리사의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온갖 루머를 만들어냈다.
“그럼 오늘 소공작님과 처음 춤을 추는 영광의 레이디는 누가 되려나요?”
어떤 귀부인이 꺼낸 말에 다른 귀부인들과 귀족 영애들이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칼베른을 쳐다봤다. 칼베른은 항상 엘리사와만 춤을 췄기 때문에 다른 귀부인들에겐 그와 춤 출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랬는데 모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귀부인들과 귀족 영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칼베른과 춤출 기회만 봤다.
“아.”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마리아가 움직이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오랜만이에요, 칼베른.”
마리아는 칼베른을 보며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뭇 남자들을 설레게 할 만큼 예쁜 미소였지만 칼베른은 아무 감흥 없는 표정을 지으며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하.”
“혼자 파티에 온 건가요? 소공작 부인은요?”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습니다.”
“저런. 안 좋은 소식이네요. 소공작 부인이 빨리 쾌차하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대화가 끝나자 마리아는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럼 같이 춤 출 사람이 없겠네요. 괜찮다면 내가 그 상대가 되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레이디가 먼저 춤을 신청할 땐, 레이디가 민망하지 않도록 거절하지 않는 게 예의이건만 칼베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리아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내둘렀고, 칼베른에게 춤 신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들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마리아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럼 누구랑 첫 번째 춤을 출 건가요? 나 말고 달리 춤 출 사람이 있나요?”
거절당했는데도 포기할 수가 없는지 마리아는 끈질기게 물었다.
“오늘은 아무와도 춤을 추지 않을 겁니다. 첫 번째 춤은 부인하고만 추기로 다짐했거든요.”
칼베른 역시 끝까지 철벽을 쳤다. 파고 들 틈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마리아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마리아의 어깨 위로 올라오는 손이 있었으니.
“좋은 날에 우리 공주님이 왜 이렇게 우울해 하실까.”
바로 2황자인 데아른이었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근사했다. 마리아가 물기 젖은 눈동자로 데아른을 돌아봤다.
“오라버니…….”
“그래, 무슨 일이지? 혹시 클라우드 소공작이 널 슬프게 만든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 오라버니가 귀여운 동생을 위해 혼쭐을 내줘야겠군.”
데아른은 허리 춤에 손을 가져가더니, 아주 중요한 걸 잊은 사람처럼 눈살을 찡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 이런. 공주님을 지키기 위한 검을 방에 두고 왔군. 지금 당장 가서 가지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됐어요. 안 그러셔도 돼요.”
데아른이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가 전부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는 걸 아는 마리아는 옅게 웃으며 데아른의 팔짱을 꼈다.
“그럼 다행이고.”
데아른도 웃으며 마리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누가봐도 다정한 남매의 모습에 구경하는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 클라우드 소공작. 요즘 무척 바쁘다고 들었는데, 잘 지냈나?”
“황자 전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야. 클라우드 소공작은 장차 제국의 검이 될 중요한 인재니까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항상 걱정했는데, 잘 지낸다고 하니 정말로 다행이야.”
겉보기엔 칼베른을 걱정해주는 것 같았지만, 곳곳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꾸해봤자 자신만 피곤해질 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칼베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럼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건배나 할까.”
데아른이 손짓하자 귀족들에게 샴페인을 돌리고 있던 시종이 다가왔다. 데아른은 샴페인 잔을 마리아와 칼베른에게 각각 나눠 주고, 그의 몫도 챙겼다.
“그럼 건배하지.”
짠, 유리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칼베른은 샴페인을 마시며 이 자리를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태자, 오스카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칼베른은 다 비운 샴페인 잔을 시종에게 건네주고 오스카에게 다가갔다.
“나중에 또 이야기하지.”
칼베른을 본 오스카는 이야기 하던 상대를 보낸 뒤, 칼베른을 돌아봤다.
“그 녀석과 재미있게 이야기 나눴나?”
칼베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 보고 계셨으면 도와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안 도와줘도 잘 빠져나오는데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나?”
“…….”
“그렇게 얼굴 굳히지 마, 칼베른. 정말 네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땐 무조건 도와줄 테니까. 내가 설마 형제와 다름 없는 자네를 위험 속에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말이나 잘 하면 밉지나 않지. 칼베른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스카는 그런 칼베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지? 소공작 부인은?”
“몸이 안 좋아서 쉬는 중입니다.”
“아아.”
이해했다는 듯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몸살이 걸렸다고 들었는데 아직 안 나은 모양이지?”
“네.”
“저런. 그러길래 비를 그렇게 맞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지. 동행했던 호위 기사가 크게 잘못했어.”
“그녀가 비를 맞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자네의 부인이 부친의 비석을 붙잡고 엉엉 운 것도 알고 있는데.”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 칼베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곳엔 보는 눈이 많았으니 알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상황을 마주하니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녀가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만약 참석했다면 눈총이 따가웠을 테니까.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이들은 기회다 싶어 그녀를 마구 씹어댔을 것이다.
“지금 소공작 부인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귀신같이 칼베른의 마음을 꿰뚫어 본 오스카가 물었다. 이에 칼베른이 침묵으로 대답하자 오스카가 쯧, 혀를 찼다.
“칼베른, 소공작 부인을 너무 싸고 도는 거 아니야?”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적 없긴. 지금까지 소공작 부인의 그룹이 형성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소공작 부인 정도의 지위가 되면 원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4년이 넘도록 그룹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 물론 엘리사가 마리아의 눈을 벗어나서 몸을 사리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룹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건 이상했다. 마리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엘리사의 당돌한 행동을 환영하며 그녀의 편을 들었을 테니까. 그조차도 없었다는 건 누군가 중간에서 계속 방해했다는 의미였다.
“난 지금까지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의 그룹이 형성되지 않게 방해한 사람이 너라고 생각하는데. 칼베른, 네 생각은 어때?”
칼베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오스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룹이 형성되면 좋던 싫던 간에 그룹 싸움에 휘말리게 됐다. 그룹의 중심이라면 더더욱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칼베른은 엘리사를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되지 않게 막은 것이다.
“소공작 부인이 원래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걱정돼는 마음은 이해해.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이겠지.”
오스카는 칼베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싸고 돌 수는 없잖아. 게다가 결혼한 지 벌써 4년이나 됐어. 그 정도면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을 데리고 와서 교육을 시켜도 그럴싸한 귀부인 노릇을 할 거야.”
“…….”
“그러니 이제 그만 풀어주는 게 어때? 설마 평생 싸고 돌 생각인 건 아니겠지?”
칼베른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 표정이 상당히 어두웠다. 오스카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지만 더 말하면 칼베른이 폭발할 것 같아 삼키며 유연하게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클라우드 공작, 그 시기가 다 됐다고 들었는데…… 맞나?”
말을 돌린 주제도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다. 칼베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상태가 어떻지?”
“예상으론 내년 봄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 하긴 클라우드 공작부인이 죽은 지 10년이 넘었으니 그럴때가 되긴 했지.”
오스카는 무척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년 여름에는 그대가 클라우드 공작이겠군.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기뻐하실 필요도 슬퍼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한 게 아니니 말씀을 조심해주세요.”
“걱정하지 마. 다른 곳도 아니고 자네의 일인데 당연히 조심하지. 자네가 없으면 나 역시 없는 거니까.”
오스카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칼베른이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럼 더욱 소공작 부인을 풀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내년 여름 쯤엔 소공작 부인이 아닌 정식으로 공작 부인이 될 테니까. 지금부터 적응을 시켜야지.”
오스카의 충언에 칼베른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 눈이 소복히 쌓인 풍경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바라기가 피는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바깥 날씨는 옷을 홀딱 벗어도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더웠지만, 온도 조절 마법 장치 덕분에 클라우드 공작저는 시원했다. 웬만한 귀족들도 몇 개 방만 시원하게 만들지, 공작저를 통째로 시원하게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공작가 정도의 재력이 아니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부유한 공작가라 다르구나. 엘리사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위력을 실감하며 서류를 읽었다.
“마님, 초대장이 왔습니다.”
한참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하인이 초대장을 가져왔다.
‘나한테 초대장이 오다니 별일이네.’
마리아의 생일 파티 사건 이후, 엘리사에게 온 초대장은 모두에게 보내는 형식적인 행사 초대장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기에는 형식적인 행사가 없었다.
‘누가 보낸 거지?’
엘리사는 실링 왁스에 찍힌 문양을 확인했다. 황금색 백합. 황후의 문양이었다. 황후가 왜 나한테 초대장을 보낸 걸까. 그녀의 친딸인 마리아랑 그렇게 싸웠는데.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 칼로 봉투를 뜯었다. 황실에서 쓰는 고급스러운 편지지엔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지만 요점은 하나였다. ‘아고라 사교 클럽’에서 여는 자선 파티에 참가하라는 것. 아고라 사교 클럽은 3세에서 10세 미만의 어린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사교성을 기르고 교육을 받는 일종의 아카데미였다. 그곳에서 형성된 인맥 그룹은 데뷔탕트를 치르고 정식으로 사교계에 나갈 때까지 유효했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식에게 좋은 인맥 그룹을 만들어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아고라 사교 클럽은 작은 사교계 혹은 피가 나지 않는 작은 전쟁터라고도 불렸다.
‘지금 아고라 사교 클럽의 왕은 올랜드 공작의 손자였지, 아마.’
엘리사는 올랜드 공작의 손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저 밖에 모르는 독재자. 성격이 무척 더럽다. 올랜드 공작가의 미래가 걱정된다 등 하나 같이 안 좋은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다들 그 손자의 인맥 그룹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했다. 아고라 사교 클럽이 얼마나 개판인지 보여주는 예이기도 했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중요한 건 황후가 그 클럽에서 여는 자선 파티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거였다. 자선 파티 초대장은 종종 왔지만 엘리사가 직접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부 대리인과 기부금만 보냈다. 자선 파티의 주된 목적이 기부금이니 그래도 상관없었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가기 싫다.”
하지만 가야겠지. 황후의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자선 파티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찮았다. 엘리사는 오만상을 쓰며 초대에 응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