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격변. (1)2020.11.21.
칼베른은 엘리사가 쓰러졌던 날,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 엘리사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물어봤다.
“마님께선 평소와 똑같이 일어나셔서 아침을 드시고 집무실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점심쯤, 돌연 엔피트 상단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죠.”
“엔피트 상단엔 왜 간 거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갑자기 만나러 가신다고 하셔서요. 하녀도 데리고 가지 않으시고 호위 기사와 마부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한마디로 비밀의 열쇠는 엔피트 상단에서 쥐고 있다는 의미였다. 칼베른은 바로 엔피트 상단을 찾아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늦어 그러지 못했다. 대신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엔피트 상단을 찾아가 상단주를 만났다.
“오랜만이군, 니케.”
클라우드 공작과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여성이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작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안부를 물으며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눌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칼베른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닷새 전에 부인이 엔피트 상단을 찾아왔다고 하던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필 제가 없었던 날인데다가, 소공작 부인께서 만난 직원도 그 다음날 그만 둔 직원인지라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상단을 그만뒀다고?”
“네. 아, 혹시나 해서 말씀 드리지만 부인께 어떤 잘못을 해서 그만둔 게 아닌 원래 그만두기로 예정되어 있던 직원입니다.”
어쨌거나 현재 그 직원은 이곳에 없다는 의미였다.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는 사실에 칼베른은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칼베른을 대신해서 에드윈이 물었다.
“그 직원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글쎄요.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아마 제국의 서쪽령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그 직원의 출신이 그쪽이거든요.”
한마디로 확실하게는 모른다는 의미였다. 물론 니케의 말대로 서쪽령으로 갔을 수도 있지만, 정확한 지명을 모르는 이상 찾기는 무척 힘들었다. 서쪽령은 광활하고 넓었으니까.
‘그래도 찾아야겠지.’
칼베른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걸 테니까. 에드윈은 곁눈질로 칼베른을 흘겨 본 뒤, 니케에게 다시 물었다.
“그 직원의 이름이 뭐죠? 나이랑 생김새도 알려주시죠.”
**** 수면향 때문에 강제로 잠이 들었던 엘리사가 다시 깨어난 건 만 하루가 지난 이른 오후였다.
“…….”
어제와 달리 정신을 차리자마자 모든 게 다 기억난 엘리사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엘리사는 붕대 감긴 제 양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종줄을 잡아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하녀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지금…….”
꽉 잠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제 귀로 듣기에도 거북해서 엘리사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뒤, 다시 물었다.
“공작 각하께선 지금 집무실에 계시니?”
“네. 지금 각하의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럼 세숫물을 가져올래? 공작 각하를 뵈러 갈 거니 옷도 준비해오고.”
하녀는 곧바로 엘리사가 말한 걸 가지고 왔다. 엘리사는 빠르게 씻고 준비한 뒤, 클라우드 공작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클라우드 공작에게 확실하게 물어보고 싶어 가는 거지만, 막상 그의 집무실이 가까워지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만나면 뭐부터 물어봐야 하지?’
일단 왜 그랬냐고 이유부터 물어볼까. 클라우드 공작이 이유를 대답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하고 싶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클라우드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울렁이는 마음을 다스린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흠?”
집무실에서 보좌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클라우드 공작은 약간 의외라는 듯 엘리사를 흘겨보곤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나가 봐라.”
“네, 각하.”
보좌관이 나가고, 클라우드 공작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클라우드 공작의 잘난 낯짝을 보니 기껏 진정시켰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머리는 이성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그러셨죠?”
엘리사는 금방이라도 울분을 토해낼 것처럼 물었다.
“왜 약속을 어기신 건가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무슨 약속을 어겼다는 거지?”
“주치의가 가지고 있던 이중 장부를 봤습니다.”
클라우드 공작은 그제야 엘리사를 쳐다봤다. 표정은 그녀가 들어왔을 때와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역시 그 이중 장부가 맞구나.’
정황상 거의 확실했지만 그래도 아니길 간절히 바랐는데 전부 산산조각났다. 엘리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에 힘을 줬다.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 아버지에게 돈을 쓰는 게 그렇게 아까우셨나요?”
엘리사의 질문에 흔들리던 자색 눈동자가 굳었다. 클라우드 공작은 엘리사를 관찰하는 듯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등받이에 비스듬하게 기대며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깝긴 했지. 돈을 쏟아부어서 살 수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니까.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고 있는데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엔피트 상단의 단장에게 이미 들었던 말이지만, 클라우드 공작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 충격적이었다. 엘리사는 피가 날 정도로 입안의 연한 살을 꽉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쥔 손에 감은 붕대가 약간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내가 아니라 엘리사 양인 걸로 아는데.”
새아가라는 호칭은 금방 벗어던졌다.
“제가 약속을 어겼다고요?”
“그래. 엘리사 양의 부친의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대신 가문의 후계를 낳아주기로 하지 않았나?”
“…….”
“그런데 4년간 소식이 없다니. 이건 엄연히 계약 위반일세.”
분하고 화가 나지만 사실이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아이를 가지지 못한 건 칼베른의 잘못도 있지만, 엘리사 역시 가지려고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클라우드 공작이 그 점에 대해 걸고 넘어지면 할 말이 없어졌다.
“쯧.”
클라우드 공작은 고개 숙인 엘리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일어나더니 뒷짐 지고 창밖을 내다봤다.
“말 나온 김에 확실하게 이야기해두는데 빠른 시일 내에 후계를 가져.”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이를 가지란 말이세. 엘리사 양의 부친에게 쏟아부은 돈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또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들킨 이상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클라우드 공작은 대놓고 협박했다. 그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했으며 화가 났다. 속이 마그마처럼 들끓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정신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차분해진다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풀렸다. 클라우드 공작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었는데, 이제 확실하게 내릴 수 있었다.
“클라우드 공작 각하.”
다시 눈을 뜬 엘리사의 얼굴이 비장했다.
“전 클라우드 가문의 후계를 낳을 생각이 없습니다.”
엘리사는 클라우드 공작의 뒷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 그만두겠습니다. 클라우드 소공작님과 이혼하고 엘리사 제르나로 돌아가겠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어도 이혼하겠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가 평소 어려워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
그만큼 용기를 내서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클라우드 공작은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충격 받았거나 황당해서 말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기엔 침묵 시간이 너무 길었다.
“각하?”
“…….”
“각하.”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엘리사는 클라우드 공작에게 다가갔다.
“각……!”
엘리사가 클라우드 공작의 팔을 건드리는 순간, 클라우드 공작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에게 잡힌 어깨가 욱신거렸다.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엘리사는 눈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각하, 어깨를 놔주세…….”
“마녀!”
클라우드 공작이 눈을 희번뜩하게 뜨며 소리쳤다. 겁에 질린 자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새빨간 마녀가 왔어!”
그는 마치 엘리사가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세게 붙잡고 애원했다.
“날 구해주게!”
“각, 각하?”
“새빨간 마녀가 왔단 말일세! 이대로 있다간 저 마녀한테 잡아먹히고 말거야!”
클라우드 공작은 겁에 질린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도망쳐야 해. 그 여자가, 새빨간 마녀가……!”
클라우드 공작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비로소 클라우드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엘리사는 충격에 떨리는 두 팔을 감싸안으며 쓰러진 클라우드 공작을 내려다봤다. 그대로 기절한 건지 클라우드 공작은 미동이 없었다. 가슴이 작게 오르내리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하니 있던 엘리사는 곧 정신을 차리고 뺨을 가볍게 때렸다.
“주치의, 주치의를 불러야 해.”
부친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 클라우드 공작이 밉고 싫었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엘리사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는데, 문앞에 누가 서 있었다.
“부인.”
칼베른이었다. 그의 뒤에 에드윈도 보였다.
“큰일 났어요!”
엘리사는 칼베른의 옷깃을 꽉 붙잡고 목청 높여 소리쳤다.
“공작 각하께서 쓰러지셨어요!”
“!”
“네?”
칼베른과 에드윈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 칼베른은 안으로 들어가 클라우드 공작의 상태를 살폈고 에드윈은 주치의를 부르기 위해 복도 저편으로 달려갔다. 엘리사는 불안한 눈으로 칼베른을 쳐다봤다.
‘혹시 내가 해친 거라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집무실에는 그녀와 클라우드 공작, 두 명 밖에 없었으니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다.
“전 아니에요.”
괜히 오해를 사기 전에 미리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칼베른의 뒤로 다가가 말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각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거예요.”
칼베른은 엘리사를 흘겨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무뚝뚝하지만 안심이 되는 대답이었다. 비로소 마음을 놓은 엘리사가 크게 숨을 뱉는 것과 동시에 주치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주치의가 진료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 선 칼베른이 경직된 얼굴로 엘리사에게 물었다.
“혹 아버지가 이상한 소리나 행동을 하셨나?”
“아니요.”
상당히 이상한 행동과 말을 했지만 엘리사는 아닌 척 시치미를 딱 잡아뗐다. 그러자 칼베른은 안심한 듯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보도록.”
거의 내쫓기다시피 집무실에서 나온 엘리사는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어.’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자신을 내쫓을 리가 없었다. 클라우드 공작이 쓰러지기 직전 했던 이상한 말도 마음에 걸렸고.
“새빨간 마녀.”
대체 새빨간 마녀가 누구길래 테레사 부인과 클라우드 공작이 저렇게 난리인 걸까. 꾸깃꾸깃하게 접어두었던 호기심이 다시 펼쳐졌다.
“마님.”
방으로 돌아가며 새빨간 마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하인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와 편지를 내밀었다.
“이틀 전, 어느 성기사분께서 마님이 깨어나시면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인이 말하는 성기사는 닉이 틀림없었다.
“이리줘.”
엘리사는 방으로 들어와 편지 봉투를 뜯었다. 예상했던 대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닉이었다. [엘리사, 감기 몸살에 걸려서 크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내가 가면 치료해줄 수 있다고, 그러니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빌어먹게도 공작가에서 출입을 허락해주지 않더라.] [하인도 겨우 포섭했어. 망할, 무슨 공작가가 황궁보다 더 사람 포섭하기가 힘들어? 고작 편지 하나 전해주는 건데도 이리 힘들다니.] 꾹꾹 눌러쓴 글씨체에서 닉의 분노와 짜증이 보였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의미인데 읽는 입장에선 웃음이 나왔다. [……네가 다 나을 때까지 있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휴가 기간이 끝나서 가봐야 해.] 그러고 보니 공동 묘지에 찾아왔던 사람은 누구였지. 기억은 닉이었지만, 편지 내용을 봤을 때 닉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칼베른인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비석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부디 아니길 바랐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 하지 마. 휴가 받는 대로 또 놀러올 거니까. 그땐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난 항상 네 편이야.] 글씨가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닉이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는지 눈에 확실하게 보여 가슴이 뭉클해졌다.
“역시 이혼해야겠어.”
클라우드 공작과의 계약이 깨져도 칼베른과의 계약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혼하고 싶었다. 엘리사는 반드시 이혼하리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닉의 편지를 계약서가 있는 화장대 가장 아래 서랍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