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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 (6) (40/156)

40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 (6)2020.11.18.

닉이라고? 내 손을 잡고 있으면서 내가 아니라 닉의 이름을 부른다고? 달콤한 사탕인 줄 알고 먹었는데, 쓴 환약이었다는 걸 알게 된 아이의 기분이 이럴까. 칼베른의 눈매가 좁아지면서 입술이 비틀어졌다.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렇게 배신당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

칼베른의 상태를 모르는 엘리사는 그의 손을 붙잡고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런 말을 들어놓고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그녀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또옥 떨어졌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바보였어. 나 때문에 아빠가 죽은 거라고.”

“…….”

“아빠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말이 채 맺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칼베른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엘리사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눈물 젖은 고개가 맥없이 옆으로 기울어지려고 하자 칼베른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그 바람에 놓친 우산이 바람에 저만치 날아갔다. 빗방울이 세차게 그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줄기가 엘리사의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칼베른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젖은 얼굴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를 들어 안았다. 넓은 어깨를 좁히며 최대한 엘리사가 비를 맞지 않게 만들었다.

“소공작님!”

칼베른이 엘리사를 안고 공동묘지를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위 기사가 다급히 달려왔다. 마부는 우산을 들고 뛰어와 칼베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난 말이지. 칼베른은 주어를 생략하고 엘리사를 슬쩍 내려다 봤다. 맞닿은 부위가 뜨거웠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뜨거운 숨도 예사롭진 않았다.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지.”

칼베른은 엘리사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마차로 향했다. 그때,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누군가 젖은 땅을 달음박질하는 소리도 들렸다. 칼베른은 누가 뛰어다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사를 이리 주시죠, 클라우드 소공작님.”

그가 닉이었으니까. 칼베른은 천천히 닉을 돌아봤다. 어지간히도 다급하게 달려온 건지 닉의 머리는 제멋대로 흩날린 채 흠뻑 젖어 있었다. 터져 나오는 거친 숨과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그가 얼마나 빨리 뛰어왔는지 알려주었다. 수도를 나갔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의아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엘리사를 제게 주세요.”

저 건방진 말이었다. 칼베른은 눈썹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닉에게 되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야 엘리사가 절 찾았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엘리사가 정신을 잃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그럴 수가 없었다. 칼베르는 그 점이 더 짜증났다. 그렇게 아파하는 순간에도 닉을 찾았다는 건, 그만큼 닉에게 의지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이게 정말 단순한 친구 사이란 말인가? 보통 친구 사이에 이렇게까지 하나? 의심과 의문이 뒤엉키면서 짜증을 더욱 유발했다. 칼베른은 인상을 팍 쓴 채 닉을 무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소공작님!”

“어딜!”

닉이 칼베른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호위 기사가 검을 빼 들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닉도 검을 빼 들고 호위 기사를 겨눴다. 두 검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칼베른이 다시 마차에서 내렸다.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칼베른은 호위 기사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한 뒤, 닉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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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경. 그대가 부인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잘 알겠다.”

“…….”

“하지만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 물러나. 더 이상 간섭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닉이 입술을 기울이며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제 죄를 물으실 생각인가요? 죄명은 뭐죠? 친구를 너무 위한 죄?”

“경은 부인을 단순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텐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국에선 암묵적으로 정부의 존재를 인정해주긴 하지만, 성국은 아니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다.”

“…….”

“게다가 경은 신을 모시는 순결한 성기사. 다른 남자의 부인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곤란해지겠지.”

닉은 불만스레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여태까지 엘리사에게 제대로 된 고백도 하지 못했던 거였고.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싫다면 물러나. 더 이상 그녀에게 접근하지 마라. 그게 그녀를 위해서도, 경을 위해서도 좋을 거다.”

언뜻 들으면 닉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엄연히 협박이었다. 칼베른은 분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쥔 채 파르르 떠는 닉을 뒤로한 채 마차에 발을 올렸다.

“소공작님께선.”

칼베른이 마차에 완전히 올라타기 직전, 닉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엘리사를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마차에 반쯤 몸을 넣은 칼베른이 멈칫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칼베른은 몹시 성가시다는 눈으로 닉을 한 번 흘겨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곧 마차 문이 닫히고, 칼베른과 엘리사를 태운 마차는 무심하게 닉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닉은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점점 멀어지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이 분노와 슬픔으로 잔뜩 얼룩졌다. 머릿속에는 마법 전령석이 부서지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엘리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정말 보고 싶어…….”

  그 말을 듣자마자 닉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수도로 돌아왔다. 수도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멀리 가지 못하고 인근 마을의 여관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덕분에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 남자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꽈악, 쥔 손에 푸른 힘줄이 섰다. 닉은 눈동자에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중얼거렸다.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 엘리사.”

  ****

“마님께선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리셨습니다.”

엘리사의 진찰을 마친 주치의가 진단한 내용을 칼베른에게 보고했다.

“손의 상처도 심해 처치를 해뒀습니다. 피멍까지 든 걸 봐서 무언갈 세게 계속 두드리신 것 같은데,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호위 기사가 말하길 울면서 바닥을 계속 내리쳤다고 하더군.”

“그럼 파상풍에 걸릴 수도 있으니 약을 처방해야겠군요. 곧바로 약을 조제해서 올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주치의가 나가고 칼베른은 엘리사가 누워 있는 침대 맡에 앉았다. 식은땀에 젖어 찡그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칼베른은 하녀들이 두고 간 물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주고, 약간 흘러내린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다. 그답지 않은 살뜰한 모습에 하녀들은 눈동자를 굴리며 눈빛으로 대화하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칼베른은 주치의가 지은 약도 손수 먹이는 등 밤이 깊도록 엘리사를 직접 돌봤다. 칼베른의 정성에도 높은 열은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열제를 먹이고 차가운 물수건으로 수시로 몸을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하아, 하아.”

열이 오른 몸은 굉장히 뜨거웠다. 높은 열 때문인지 엘리사는 반나절이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와중에 눈물을 흘리며 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빠, 미안해요.”

이게 벌써 몇 번째 듣는 사과인지 모르겠다.

“정말 미안해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무의식 속에 저렇게 사과를 한다는 건, 그만큼 가슴에 맺힌 일이라는 의미. 사랑하는 부친의 죽음에 대한 일이니 가슴에 맺힌 건 이해했지만, 사과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르나 남작이 죽은 건 그녀 때문이 아닌 병 때문이었으니까. 오히려 엘리사가 제 인생을 던진 덕분에 제르나 남작은 예고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살았다. 그러니 그녀가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단순히 아버지를 보낸 슬픔에서 비롯된 허상 감정인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엘리사는 제르나 남작이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오늘 아침에 만났을 때만 해도 엘리사는 저런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 갑자기 일정에도 없는 외출을 한 것도 이상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군.’

그걸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칼베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마.”

무의식중에 누군가 떠난다는 걸 알아챈 엘리사가 중얼거렸다. 붕대 감은 손이 그를 찾는 듯 허공을 더듬었다.

“혼자는 싫어.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그녀가 찾는 건 죽은 제르나 남작일까, 아니면 그 짜증 나는 성기사일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찾는 사람은 칼베른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럼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제발…….”

그래도 상관없는데 애절한 목소리와 손짓이,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이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칼베른의 눈가가 어둑해졌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 맡에 앉았다. 엘리사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몸을 살짝 웅크렸다.

“아빠, 아빠…….”

아무래도 그녀가 애타게 찾는 사람은 닉이 아니라 제르나 남작인 모양이다. 그 사실에 굳어 있던 눈매가 살짝 풀렸다. 칼베른은 다정한 손길로 엘리사의 얼굴에 제멋대로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 엘리사의 상태는 이틀이 지나서야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높은 열이 내리고, 비오듯이 쏟아내던 식은땀도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아빠, 미안해요…….”

무의식중에 제르나 남작에게 사과하는 것도 여전했다. 그 소리를 아랫것들에게 들려줘서 좋을 건 없으니 칼베른은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엘리사를 간호했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용인들은 칼베른이 엘리사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생각했다. 그건 클라우드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라우드 공작은 칼베른이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 써서 엘리사와 사이좋은 부부인 척 연기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베른이 가끔 이해 못 할 이상한 행동을 보여도 연기의 하나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이번 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아.”

클라우드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 녀석, 마음을 빼앗긴 건 아니겠지?”

곁에서 시중을 들던 헤리엇이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인님.”

“그럼 다행이지만, 걱정이군. 저러다 홀랑 마음을 빼앗기게 될까 봐.”

헤리엇은 아닐 거라고 말했지만 클라우드 공작은 좀처럼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저택 내에는 같은 걱정을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왜 저러시는 거지.”

바로 에드윈이었다. 클라우드 공작보다 칼베른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는 에드윈이 보기에도 지금 칼베른의 행동은 이상했다. 간호하는 거야 대외적으로 사이좋은 부부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하던 일까지 잠시 중단하고 그러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칼베른이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과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

“귀여운 손주를 보고 가고 싶었는데…… 힘들겠구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빠. 약속했잖아요. 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아 있기로 약속했으면서 그런 나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엘리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게 뭔지 아니?”

  알고 싶지 않아.

“하나는 네 엄마를 만난 거고, 다른 하나는 너를 만난 거란다.”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제르나 남작의 위태로운 게 눈에 보여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행복하고 기뻤단다. 네가 내 딸이라서, 내가 네 아빠라서…….”

  엄마, 제발 아빠를 데리고 가지 말아요. 하나뿐인 가족인데, 그가 죽으면 난 혼자가 되는데.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네가 죽였어.”

  인자하고 온화했던 제르나 남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카만 어둠으로 뭉친 괴물이 등장했다.

“네가 그를, 아빠를 죽였어!”

“……하악!”

벼락처럼 뇌리에 꽂힌 말에 엘리사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번쩍 떴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던 엘리사는 인기척을 느끼고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작은 소파에 기대 불편하게 자고 있는 칼베른이 보였다.

“…….”

자는 건 아니었나. 엘리사는 칼베른이 눈을 뜨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어난 거 다 알아.”

하지만 이미 칼베른에게 깬 걸 들킨 후였다. 엘리사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칼베른을 올려다 봤다. 크고 약간 거친 손이 엘리사의 이마에 닿았다. 차갑다. 기분 좋은 감촉에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

“열은 완전히 내렸군.”

“……제가 열이 났었나요?”

“그래. 그것도 굉장히 높은 고열이었지. 심한 감기몸살까지 걸렸고.”

그랬었나. 엘리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말없이 웃었다.

“주치의를 부르지.”

주치의. 그 단어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주치의가 나를 배신했다. 클라우드 공작이 나를 배신했다. 내가 아빠를 죽였다.

“아악!”

돌연 엘리사가 머리를 감싸 쥐며 고함을 지르자 칼베른은 당황하며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진정해.”

“아아악!”

“진정해라, 엘리사!”

칼베른이 아무리 달래도 엘리사는 좀처럼 진정하지 않았다. 결국 칼베른은 수면 향을 피워 엘리사를 재웠다.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잠이 든 눈물 젖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동시에 엘리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진 칼베른은 곧바로 에드윈을 불러 명령했다.

“나흘 전,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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