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 (4) (38/156)

38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 (4)2020.11.11.

엘리사는 닉을 배웅해주고 싶어 일정을 조정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무리였다. 그동안 닉을 만난다고 일정을 너무 많이 뺀 탓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다 내 업보인걸.’

엘리사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

가던 와중,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부터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칼베른과 정면에서 마주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평소라면 사이좋은 부부인 척 연기하며 살갑게 인사했을 텐데, 근래 칼베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인사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칼베른이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요즘 연기를 하지 않길래 포기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어디 가는 길입니까.”

“집무실에요.”

“오늘은 외출 안 하는 겁니까?”

‘내가 외출한 것도 알고 있네.’

그동안 아는 척도 하지 않길래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엘리사는 약간 떨떠름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분간은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칼베른의 대답을 끝으로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만 인사하고 가봐도 되겠지?’

엘리사가 칼베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내려는 찰나, 칼베른이 먼저 말했다.

“오늘 함께 저녁을 먹고 싶은데, 시간 괜찮습니까?”

갑작스럽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엘리사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후, 칼베른과의 사이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슬아슬할 때도 주기적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했으니까.

“그래요.”

“그럼 집사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칼베른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뭘 달라는 거지? 영문 모를 행동에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칼베른이 그녀의 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손을 달라는 의미인 것 같아 엘리사는 칼베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칼베른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날, 찰나의 입맞춤을 연상돼서 엘리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칼베른이 그런 엘리사를 올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그럼 저녁에 보죠, 부인.”

  **** 황녀의 궁, 비밀의 정원.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날카로운 고함에 반응한 듯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단정하게 정리했던 마리아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거짓말쟁이!”

마리아는 들고 있던 브로치를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을 향해 집어 던졌다. 브로치는 인영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하고 떨어졌다. 그 바람에 후드가 흘러내리면서 인영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달빛을 부숴 놓은 듯한 눈부신 은발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동자 역시 은색이었다. 외모는 10대 후반 정도 되는 앳된 외모였지만 눈빛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처럼 깊었다. 그 눈과 마주한 마리아는 흠칫 놀라며 잠시 몸을 굳혔다가 다시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난 반년간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해봤는데, 칼베른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야. 나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고!”

그 기세가 빨간색 천을 본 황소처럼 굉장히 드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처음 만났을 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돌아설 거라고 장담하더니, 어떻게 된 거냔 말이다!”

하녀들은 일찌감치 도망쳤고, 소년을 데리고 온 호위 기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마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반면 소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똑바로 서서 마리아를 바라봤다.

“뭐야, 왜 그렇게 봐? 할 말이 있으면 해!”

“…….”

소년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글을 적었다. 그리고 호위 기사에게 보여주자 호위 기사가 소리 내서 또박또박 읽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알고 있지. 그래서 널 믿고 맡겼던 거고.”

마리아가 오렌지색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정작 중요한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데.”

“…….”

“왜지? 왜 다른 사람들에겐 다 통하는데 칼베른, 그 남자한테는 통하지 않는 거지? 넌 이유를 알고 있나?”

소년은 다시 수첩에 글을 적어 호위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확실한 건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그 남자분의 곁엔 뛰어난 해독 능력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독 능력자?”

소년은 다시 수첩에 글을 적었다. 그걸 호위 기사가 읽으려고 하자 마리아가 인상을 팍 쓰며 다가와 수첩을 가져갔다.

“답답해서 못 기다려주겠구나.”

마리아는 직접 수첩에 적힌 글을 직접 읽었다. [연금술사 중에 해독하는 능력이 뛰어난 자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연금술사라.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연금술사라고 했었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이 전부 실패한 건 전부 그 여자, 엘리사 제르나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하, 짜증 나는 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든다 싶더니, 이렇게 제 발목을 잡을 줄이야. 하여간 제 인생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년이었다. 마리아가 고운 입과 어울리지 않게 작게 욕설을 읊조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헤집고 있는데 소년이 수첩에 글을 적어 내밀었다. [원하신다면 해독 능력자도 어찌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런 게 있으면 왜 진작 만들어 오지 않은 거지?”

  [이 묘약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거든요.]  

“어떤 부작용?”

  [먹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니. 생각보다 더 치명적인 부작용에 마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되지?”

  [20% 정도 됩니다.] 결코 낮은 확률은 아니었다. 그런 위험한 약은 쓰지 않는 게 좋지만, 그러기엔 칼베른의 마음이 절실했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 그의 옆에 있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 약은 확실히 효과가 있는 거지?”

  [네.] 어차피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가지지 못해. 마리아의 눈동자가 질투로 번뜩였다.

“그럼 만들어줘. 기간은 얼마나 걸리지?”

  [조금 복잡한 약이라 최소 한 달은 잡으셔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만들어 와.”

  [분부대로.] 이만 가보라는 듯 마리아가 손짓했다. 소년은 후드를 꼼꼼하게 눌러 쓰고 호위 기사의 안내를 받아 황녀의 궁을 나왔다. 호위 기사는 소년을 황궁 밖까지 친절하게 데려다주었다. 소년은 후드를 다시 꾹 눌러 쓴 뒤 근처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 남자가 반색하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능청스러운 행동에 소년이 작게 실소했다.

“방금까지 자다가 온 것 같은데 거짓말하지 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꽤 미성이었다.

“티가 납니까?”

“눈곱 붙었어.”

“헉.”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눈곱을 뗐다. 소년은 그런 남자가 더럽다는 듯 인상을 팍 쓰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그럭저럭.”

“잘 끝나셨다는 의미군요. 다행입니다.”

남자는 안도하기 무섭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주인님, 황녀랑 2황자는 동복 남매죠?”

“내가 알기론.”

“그런데 어째서 2황자는 황녀 몰래 일을 진행하라고 했을까요? 게다가 그 약은…….”

“말이 길군.”

소년이 성가시다는 듯 말을 자르자 남자가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궁금해서…….”

“궁금해할 건 없어. 이유는 하나니까.”

“예? 그 이유가 뭔가요?”

“꼬리 자르기.”

간단명료한 대답이었지만 소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 그런……! 그러면 주인님께서 너무 위험해지시는 거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왜? 드디어 케케묵은 원한을 해소할 기회가 왔는데.”

“그러다 주인님까지 잘못되시면 어쩌시려고요!”

“상관없어. 그 남자만 죽일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골목 밖으로 나온 소년의 머리 위로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자 소년은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옅게 웃었다.

“그러니 인어의 눈물 좀 구해 와. 그 녀석을 죽이려면 인어의 눈물이 많이 필요한데 웬 녀석이 다 쓸어가는 바람에 구하기가 도통 힘들어졌어.”

  ****

“으으, 다 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을 다 처리하고 뻐근한 어깨를 만지던 엘리사의 시야에 들어온 건 닉이 준 돌멩이였다. 겉보기엔 평범한 돌멩이처럼 보였지만, 딱 한 번, 같은 돌멩이를 가진 상대와 통신하게 해주는 마법 통신석이었다. 마법 전령새나 마법 통신구보다는 저렴했지만, 그래도 사치품에 속하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게다가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마법 통신석을 쓰지 못했으며 통신 시간도 3분 남짓으로 아주 짧았다.

‘도움이 필요할 때 이걸로 도움을 청하라는 의미겠지.’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엘리사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자신을 생각하는 닉의 마음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마님, 다음 주 예산에 대한 계획서입니다.”

“이리 줘요.”

달콤한 휴식도 잠시, 엘리사는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일에 매달렸다. 한참 정신없이 장부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불현듯 손가락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베였다.”

깊게 베였는지 피가 제법 나왔다. 티슈로 감싸도 좀처럼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약 발라야겠네.”

그런 다음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사는 주치의를 찾아갔다.

“없네.”

벌써 점심을 먹으러 간 걸까. 점심시간이니 그럴 만도 했다. 주치의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엔 배가 고팠다. 얼른 치료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대충 내가 발라야지.”

깊은 상처도 아니고 이 정도는 혼자서 치료할 수 있었다.

“상처약이 어디 있지.”

상처약을 찾고자 서랍을 뒤적이던 엘리사는 약간 오래된 장부를 발견했다. 약재 장부였다. 그동안 주치의가 사들인 약재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주치의가 뭘 확인하려고 가지고 온 건가? 의아해하며 장부를 넘겨보던 엘리사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1663901717417.jpg

  그도 그럴 것이 약 6개월 전부터 석 달 전까지 주치의가 사들인 약재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제르나 남작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쓴 약초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효과가 없는 약재들이었다. 싸구려이긴 해도 약재였다. 그리고 륀벤 병에만 효과가 없는 거지, 다른 병에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 주치의가 이 약재들을 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엘리사가 제르나 남작을 위한 약재들을 산 날과 같은 날, 그것도 같은 수량을 사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부에 적힌 약재들이 그녀가 산 약재들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마음에 걸렸다.

‘뭔가 있다.’

그것도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졌다.

‘지금 당장 알아봐야 해.’

배고픔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사는 문제의 장부를 들고 빠르게 기록실로 향했다. 그리고 기록실에 있는 약재 장부와 들고 온 약재 장부의 내용을 비교했다.

“…….”

다른 내용은 다 일치하는데 제르나 남작의 약재를 산 부분만 내용이 달랐다.

‘이중장부구나.’

아마 주치의가 가지고 있던 게 진짜 거래 장부이고, 기록실에 있던 게 가짜 장부일 것이다.

‘그럼 지난 몇 개월간 아빠한테 쓴 약이 전부 가짜였다는 거야?’

혹시 그것 때문에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건 아닐까. 문득 든 생각에 엘리사의 눈동자가 부질없이 흔들렸다. 장부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지금 당장 외출하겠다!”

엘리사는 문제의 장부와 기록실에 있던 장부까지 챙겨 들고 그동안 제르나 남작의 약재를 조달해 준 엔피트 상단으로 향했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

“부단장을 불러주세요.”

엘리사가 잇새로 매섭게 말했다. 직원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두 손 비벼 사과했다.

“송구합니다만 지금 부단장님께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말씀해 주시면 일단 알아보고…….”

“필요 없습니다. 부단장이 없다면 단장이라도 불러주세요.”

그동안 클라우드 공작가에 약재를 조달하러 온 사람은 엔피트 상단의 부단장이었지만, 부단장이 하는 일을 단장이 모를 리가 없으니 어느 쪽이 나오든 상관없었다. 엘리사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직원은 당장 단장을 데리고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제가 엔피트 상단의 단장인 듄입니다.”

“인사는 됐어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여긴 번잡하니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듄은 작은 방으로 엘리사를 안내했다. 방문이 닫히고, 외부와 차단되자 엘리사는 가지고 온 장부를 듄에게 보여주었다.

“…….”

장부를 보자마자 듄의 표정이 바뀌었다. 잔뜩 굳은 얼굴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내가 뭘 물어볼지 알고 있죠?”

“송구합니다, 부인.”

듄이 허리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저희도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공작 각하께서 명령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변명하거나, 아니라고 부정할 줄 알았는데 놀랄 정도로 듄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그것보다 공작 각하의 명령이라니?

“그 말은 클라우드 공작 각하께서 이중장부를 만들라고 명령하셨다는 건가요?”

“네. 6개월 전, 공작 각하께서 쓸데없는 곳에 돈이 세는 걸 막고 싶으시다며 저를 직접 불러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