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내가 있다는 걸. (37/156)

37화. 내가 있다는 걸.2020.11.07.

촉,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짧은 감촉에 엘리사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굳은 엘리사를 바라보는 칼베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난 분명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어.”

그의 손이 거미줄처럼 엉켰다.

“그 경고를 어긴 건 너니까, 날 탓하지 마.”

뭣도 모르고 날아다니다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는 연약한 날개를 팔랑거리며 파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손이 얽히긴 했지만, 강제성은 없었다. 뿌리치고 밀어내려고 한다면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흣.”

난 이 남자를 밀어내지 못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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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이 포개지면서 숨과 숨이 얽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탕을 베어 물듯 엘리사의 입술을 가볍게 베어 문 칼베른이 좀 더 본격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는 그때.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엘리사는 있는 힘껏 칼베른을 밀어냈다.

“아, 드디어 열었다.”

엘리사에게 떠밀린 칼베른이 벽에 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에드윈이 들어왔다. 에드윈은 클라우드 공작이 칼베른과 엘리사에게 미약을 먹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온 거였다. 혹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

아니, 다행인 게 맞는 건가? 엘리사와 칼베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읽은 에드윈의 눈 사이가 좁아졌다.

“세상에, 소공작님!”

그것도 잠시, 피로 얼룩진 칼베른의 손등을 본 에드윈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칼베른에게 다가왔다. 엘리사는 에드윈이 다가오자 몸을 감싼 이불을 더욱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엘리사가 다급하게 지혈한다고 했지만, 붕대가 아닌 데다가 천이 얇아 제대로 지혈이 되지 않았다. 천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합방이 아니라 결투를 하러 이곳에 들어오신 겁니까?”

“실없는…… 농담하지 말고.”

칼베른이 꽉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정염이 꺼지지 않는 눈동자와 마주한 에드윈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엘리사에게 말했다.

“소공작님의 손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소공작님을 모시고 가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서 나가세요.”

엘리사는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은 충분히 이상해 보였지만, 에드윈은 엘리사가 미약을 먹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겼다.

“그럼 이만.”

에드윈이 칼베른을 데리고 나가자 엘리사는 크게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큰일 날 뻔했네.”

에드윈이 타이밍 좋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칼베른과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으으으.”

문득 칼베른과 침대 위에서 뒹구는 제 모습을 상상한 엘리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로 가렸다. 기껏 가라앉힌 미약의 효능이 다시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 그때의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님, 괜찮으신가요?”

곁에 다가온 하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엘리사는 픽 웃었다.

“너희가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는 건 처음인 것 같네.”

그만큼 하녀가 당황했다는 의미였다. 표정만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드윈, 그 남자 때문이겠지.’

클라우드 공작이 칼베른과 자신이 성공적인 거사를 치르도록 잘 감시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방해받았으니 그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내 잘못은 아니야.’

모든 건 에드윈의 잘못이었다. 칼베른이 다친 것도 원인 중 하나였고. 그러니 나중에 클라우드 공작이 뭐라고 하더라도 할 말이 있었다.

“이상한 잔소리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엘리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여전히 이불은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갈래.”

“그럼 숄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하녀가 나가려고 하자 엘리사가 손을 내저었다.

“숄 말고 잠옷을 가져와. 여기서 갈아입고 갈 테니까.”

하녀는 엘리사가 굳이 이곳에서 잠옷을 갈아입겠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면서 알게 됐다. 엘리사의 잠옷이 제법 많이 찢어져 있다는 걸. 하녀는 설마 엘리사가 스스로 제 옷을 찢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칼베른이 그랬을 거라고 여기며 몰래 볼을 붉혔다. 보기와 달리 칼베른에게 짐승같은 면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품으며. ****

“마치 짐승이 물어뜯은 듯한 잇자국이군요.”

칼베른의 손등 상처를 본 주치의의 첫 마디였다. 에드윈도 마음속으로 동의하며 주치의에게 물었다.

“소공작님께서 미약을 드신 듯한데, 해독제가 있습니까?”

“미약은 해독제가 따로 없습니다.”

주치의가 칼베른의 상처를 치료하며 대답했다.

“그냥 한 번 해소하고 나면 말끔하게 사라질 테니,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마님께서 계시니…….”

“네놈 짓이군.”

칼베른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주치의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네놈이 그런 거지?”

“고, 공작 각하의 명령이었습니다.”

주치의가 겁이 질린 눈을 연신 깜빡이며 빠르게 변명했다.

“저, 저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공작 각하께서 워낙 완고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더듬더듬 말하는 모양새가 불쌍하기도 했고, 클라우드 공작의 명령 때문이라는데 추궁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칼베른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후우.”

미약 때문에 어지럽기 때문이기도 했다. 칼베른이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멀쩡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주치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치료를 마쳤다.

“그, 그럼 전 잠시 약재 창고에 다녀오겠습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항생제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주치의는 칼베른과 에드윈이 붙잡을세라 재빠르게 도망쳤다. 에드윈이 한숨을 푹 내쉬며 창문을 열었다.

“여자를 데리고 올까요?”

에드윈의 질문에 칼베른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테니 참으면 돼.”

“그동안 괴로우실 텐데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게 생길 리가 없잖아.”

칼베른이 작게 실소하며 초라한 나무 의자에 기댔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핏줄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아아, 그렇죠. 제가 잠시 망각했습니다.”

에드윈은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럼 수면제를 처방해달라고 할까요? 미약의 효과가 다 떨어질 때까지 푹 주무시는 게 좋으실 것 같은데.”

“괜찮은 생각이군.”

“방으로 돌아가 계시면 가지고 가겠습니다. 아, 혹시나 해서 하녀들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가시면 됩니다.”

칼베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복도를 지나 방으로 돌아온 칼베른은 쓰러지듯 소파에 앉아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잉크가 번진 듯 새카만 어둠 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엘리사였다.

“……그렇게 참기 힘들면 그냥 저질러도 돼요. 한 번 정도야 괜찮아요.”

  그녀가 했던 말과 순진무구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보드라웠던 입술 감촉. 칼베른은 저도 모르게 그 감촉이 남아 있는 입술을 만졌다가 흠칫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이건 마치 내가 그 여자를, 엘리사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그럴 리가 없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단순히 계약에 얽힌 관계였다. 클라우드 공작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클라우드 공작가의 안살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녀와 결혼한 거였다. 그러니 사랑일 리가 없었다. 아니, 사랑이 아니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살 수 있을 테니까.

“……아니어야만 해.”

칼베른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한참 동안 중얼거렸다. **** 다음 날, 아침. 클라우드 공작은 모처럼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에 몹시 노여워했지만, 그뿐이었다. 엘리사에게 이렇다 할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그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앞으로 칼베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했다.

‘그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리 미약에 고통받는 칼베른이 불쌍하게 보였다곤 하나 그런 소리를 하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다행히 칼베른이 아침 일찍 나간 덕분에 그와 부딪힐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손으로 출근해도 괜찮나?’

상처가 제법 심해 보였는데. 상처 치료는 잘된 걸까? 걱정된 엘리사는 고민 끝에 그날 저녁, 칼베른을 찾아갔다. 방에서 단둘이 보는 건 쑥스럽기도 하고, 오랜만에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칼베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홀로 마중을 나갔다.

“다녀오셨어요.”

“…….”

거짓 웃음 가면을 쓰고 상냥하게 말을 건넸건만 돌아온 건 싸늘한 침묵뿐이었다. 싸운 직후라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항상 뛰어난 연기 실력을 보여줬던 그였기에 엘리사는 칼베른이 저러는 게 의아했다. 기사단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곤해서 이만.”

칼베른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엘리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강가에 떨어진 오리 알처럼 남겨진 엘리사는 황망한 얼굴을 하며 칼베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칼베른의 이상 행동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사이좋은 부부인 척 연기하는 건 포기했는지 지나가다가 마주쳐도, 간단한 인사만 할 뿐 예전처럼 닭살 돋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엘리사도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으니 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날, 나랑 입 맞춘 게 창피해서 그러나?’

나랑 마찬가지로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후회하는 걸까? 아니면 생각해보니 끔찍하게 싫어서 도망 다니는 건가? 과연 어느 쪽일까. 엘리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칼베른이 왜 저러는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건 닉을 만나러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김없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엘리사를 바라보는 닉의 눈매가 얄팍하게 접혔다.

“엘리사.”

“응?”

닉이 부르는 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엘리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언가 볼을 푹 찔렀다. 닉의 손가락이었다.

“앗, 걸렸다.”

“…….”

“푸하핫, 여전히 잘 걸리네. 너 참 바보구…… 우억.”

엘리사는 망언을 쏟아내는 닉의 입에 머핀을 구겨 넣었다. 커다란 머핀을 한입에 삼키게 된 닉이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황급히 물을 찾았다.

“푸핫, 살았다. 너,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냐?”

“안 죽었어? 아쉽네.”

“어휴, 정말.”

닉이 불만스레 콧잔등을 실룩이다가 탁자에 팔을 괬다.

“그나저나 무슨 고민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하던 일이 잘 안 풀려?”

“일이야 항상 잘 안 풀리지. 골치 아프기도 하고.”

“헤에, 그렇게 할 일이 많아?”

“많다기보다 이게 문제야.”

엘리사는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곳저곳 돈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 돈의 액수가 워낙 커서 계산하기가 복잡해.”

“전담 회계사 없어?”

“당연히 있지. 하지만 회계사한테 전부 맡길 수도 없고, 그들이 제대로 작성했는지 확인하는 게 내 일이라서 말이야.”

“그런 것도 해? 어머니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나도 원래 안 했는데 6개월 전에 공작 각하께서 갑자기 맡기셨어.”

“저런, 힘들겠네.”

닉이 혀를 차며 빨대로 음료수를 휘휘 저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날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은 쌀쌀한데 그는 이상하게도 차가운 주스를 고집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계속.

“내일 성국으로 돌아가지?”

“응.”

닉의 휴가는 오늘로써 마지막이었다. 일주일이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시간은 성국으로 돌아가는 데 써야 하므로 실질적으로 그가 제국의 수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오늘로써 끝이었다.

“건국제를 보고 가면 좋을 텐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더 자리를 비우면 단장님이 노발대발할 거야. 갑자기 휴가 낸 것 가지고도 잔소리 엄청나게 했다고.”

“나 때문이지? 미안.”

“알면 샌드위치 좀 사라. 머핀으로는 배가 안 찬다.”

닉이 넉살스레 웃으며 말했다. 엘리사는 기꺼이 샌드위치를 샀고, 그걸 다 먹을 때까지 두 사람은 과거 추억을 회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돌아갈 시간이 됐다. 좀 더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것도 억지로 시간을 내서 나온 거였다.

“난 이만 가볼게. 아마 내일 배웅은 못 할 거 같아. 미안.”

“아니야. 바쁘니까 당연한 거지.”

“이해해주니까 고맙다.”

“엘리사.”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일어서려는데 닉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엘리사는 반쯤 일으켰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고 닉을 쳐다봤다. 닉은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혼은 여전히 생각이 없어?”

또 그 이야기인가. 엘리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역시 약속은 지키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잊지 마, 엘리사.”

닉이 엘리사 쪽으로 작은 돌멩이를 내밀었다.

“내가 있다는 걸.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어떤 일이든 간에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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