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소중한 부인. (33/156)

33화. 소중한 부인.2020.10.24.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다음 날, 다시 만난 클라우드 공작은 평소처럼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좌관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어젯밤에 봤던 그 안쓰럽고 처량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곤 하나 제 두 눈으로 똑똑히 새긴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클라우드 공작이 겁에 질려 뱉었던 말들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멀찍이 서서 어젯밤 클라우드 공작이 했던 말과 테레사 부인의 일기장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렸다. 테레사 부인의 죽음에 새빨간 마녀가 관련된 게 분명했다. 더 나아가 그 새빨간 마녀는 클라우드 공작의 목숨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 혹시 전에 아빠가 말했던 공작가의 저주도 새빨간 마녀랑 관련이 있는 건가?’

클라우드 공작과 칼베른을 사랑했던 여자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던 그 저주. 마리아가 무사해서 단순히 불행한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 생각하며 넘겼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 참,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새빨간 마녀의 정체와 공작가의 비밀 등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했고. 칼베른이나 클라우드 공작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에 답답했던 마음은 바쁜 일상에 금방 잊혔다. 엘리사는 그동안 쌓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더욱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애도 기간이 끝나고 외출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애도 기간 동안 엘리사도, 클라우드 공작도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칼베른은 아니었다. 칼베른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외출했고 돌아오는 시간은 제각각 달랐다.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일도 허다했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일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

이른 아침, 외출하고 돌아온 칼베른과 마주하기 전까진. 칼베른의 몸에선 짙은 백합 향이 났다. 그가 저런 향기가 나는 향수를 뿌렸을 리는 없고.

‘백합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린 여자를 만나고 온 모양이네.’

그것도 향기가 이렇게 진동하는 걸 보면 아주 격렬하게 안고 온 모양이다. 애도 기간이 끝나고 외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여자를 만나고 오다니.

‘심하네.’

엘리사는 작게 인상을 쓰며 소매로 코를 막았다. 오늘부터 백합이 싫어질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엘리사는 입가에 억지 미소를 그리며 칼베른에게 인사하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부인.”

곧바로 저택의 장부들을 보관하고 있는 기록실로 가려고 했는데 칼베른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바쁘십니까.”

“조금요.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음.”

어떤 어려운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궁금하면서도 긴장됐다.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칼베른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차가, 떨어졌습니다.”

“차요? 그걸 왜 저한테…… 아 설마 제가 조합한 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설마 했는데 그게 맞는지 칼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칼베른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에도 계약을 지키기 위해 공작가의 안주인의 역할을 다 했다. 그 역할에는 칼베른이 마시는 차를 준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처럼 티타임을 가지진 않아도 찻잎이 떨어지지 않게 넉넉하게 여유분을 만들어두었다. 그랬는데, 제르나 남작이 죽고 슬픔에 빠지면서 찻잎 준비를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두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게 넉넉한 양을 만들어뒀었는데, 그걸 다 마셨다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차를 마시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줬거나.

“오랜만에 차를 마시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요. 재료는 있으니 조합해서 하녀에게 전달해두겠습니다.”

엘리사는 기록실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답한 대로 약초와 찻잎들을 조합해서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오랜만에 힘을 써서 힘들 테니 기력을 북돋아 주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을 잔뜩 넣었다.

‘먹고 또 여자나 안으러 가라지.’

엘리사는 입술을 한껏 비틀며 남은 재료들을 정리했다.

“……,”

그러다 제르나 남작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 둔 약들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누군가 소금을 뿌린 것처럼 가슴이 아리고 따끔거렸다. 엘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빠를 보러 가야겠어.”

지금 당장, 제르나 남작이 너무 보고 싶었다. 엘리사는 하려고 했던 일도 미뤄두고 외출 준비를 했다. 제르나 남작의 무덤은 수도 외곽에 있는 공동묘지 있었다. 보통 귀족들은 가문이 소유한 땅에 묘지를 만들었지만, 제르나 남작은 소유한 땅이 없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공동묘지를 선택했다. 클라우드 공작과 칼베른이 묘지를 만들 땅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동묘지라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매달 일정한 금액을 내야 하므로 보통 평민들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보통 부유한 상인들 혹은 제르나 남작처럼 이름뿐인 귀족들이 공동묘지를 사용했다. 엘리사는 공동묘지로 가는 길에 꽃가게에 들려 새하얀 국화 꽃다발을 샀다. 흐드러지게 핀 국화를 보니 기분이 더욱 울적해졌다. 울적한 기분은 공동묘지 앞에 도착했을 때 바닥을 내리찍었다. 아직 제르나 남작의 묘지 앞에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기분이라니.

‘묘지 앞에 가면 완전히 울겠네.’

엘리사는 그 모습을 호위 기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명령했다.

“안에는 저 혼자 들어갈 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네, 마님.”

엘리사는 홀로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회색의 높은 벽으로 쌓여 있는 공동묘지는 입구부터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일렬로 나열된 묘지를 보니 더욱 소름이 돋았다.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더욱 음산했다. 제르나 남작의 묘지는 이곳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었다. 특별하게 돈을 많이 낸 것도 아닌데 클라우드 공작의 사돈이라는 이유만으로 공동묘지 관리인이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준 것이다. 제르나 남작의 묘지에 도착한 엘리사는 비석 앞에 고이 놓인 백합 꽃다발을 보고 멈춰 섰다. 백합이 시들지 않고 싱싱한 걸 봐서 가져다 둔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누가 가져다 둔 거지?’

묘지 관리인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그 남자인가……?”

칼베른. 오늘 아침에 만났던 그의 몸에서 짙은 백합 향기가 났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나중에 묘지 관리인에게 물어봐야지.’

지금은 그것보다 오랜만에 만난 부친에게 인사하는 게 우선이었다. 엘리사는 백합 꽃다발 옆에 가지고 온 국화 꽃다발을 내려놓고 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빠, 저 왔어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 딸 왔냐고. 오늘은 뭐 했냐고. 또 연금술에 쓸 약초를 캐러 갔었냐고. 그러다 피부가 다 타면 어쩌냐고. 손톱이 다 깨져서 이게 뭐냐며 구박했었는데. 매정하게도 딸을 내버려 두고 사랑하는 아내의 곁으로 간 부친은 답이 없었다.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엘리사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감쳐 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흑, 흑흑…….”

결국, 참지 못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을 훔쳐낸 손수건이 빨래한 것처럼 축축하게 젖었다.

“하아.”

코가 빨개질 때까지 한참을 울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엘리사는 새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우중충한 그녀의 기분과 다르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

멍하니 하늘을 보던 엘리사는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야, 괜찮아.”

엘리사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일어섰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약간 저렸다.

“그대는?”

“이 묘지의 관리인인 베르크라고 합니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일 것까지야.”

엘리사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제르나 남작의 묘지를 내려다 봤다. 자연스럽게 시야에 백합 꽃다발이 들어왔다.

“저 백합 꽃다발을 가져다 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은데.”

“백합 꽃다발이요?”

관리인은 사슴처럼 목을 빼고 꽃다발을 확인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온 남자가 가져다 둔 모양입니다.”

“남자?”

“네.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찾아와서 꽃다발을 두고 갔습니다. 부인께서 보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무덤 관리인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칼베른은 아닌 모양이다.

“그 남자, 어떻게 생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엘리사는 관리인에게 남자의 생김새를 물어봤다. 관리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자인 건 어떻게 알았지?”

“키도 크고 체격도 컸거든요.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이 남자 옷이었습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던가?”

“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안 되네. 엘리사는 혀를 차며 백합 꽃다발을 다시 내려다 봤다.

‘누가 가져다 둔 거지?’

일주일 동안 매일 온 걸 보면 제르나 남작을 무척 좋아했던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군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제자들 중 한 명인가?’

그러고 보니 그 제자들에게 답례품을 보내야 하는데. 장례식이 끝난 지 한 달이 훌쩍 지나서야 답례품을 보내는 건 다소 이상했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다행히 누가 찾아온 건지, 그리고 어디 사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상업 거리에 들려서 답례품을 골라야지.’

“아버지의 무덤을 잘 부탁해.”

관리인과 인사하고 돌아선 엘리사가 공동묘지 입구를 막 나왔을 때였다.

“……!”

후드를 얼굴을 가릴 정도로 깊게 눌러쓴 누군가 불쑥 나타나 엘리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엘리사는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고, 입구에서 기다리던 호위 기사들은 검을 빼 들고 엘리사의 앞을 막은 정체불명의 인영을 겨눴다.

“누구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쏟아지는 살기에도 인영은 유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진짜 소공작 부인 같네.”

이 목소리는, 설마? 엘리사는 손을 뻗어 인영이 쓰고 있는 후드를 벗겼다.

“닉.”

엘리사의 앞을 가로막은 인영은 다름 아닌 닉이었다. 특유의 익살스러운 얼굴을 보니 반가웠지만, 그보다 놀란 마음이 더 컸다. 대주교를 따라 성국으로 돌아갔을 닉이 여기 있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했고.

‘혹시 가짜인가?’

닉을 닮은 사람이라던가, 아니면 닉의 분장을 한 사람이라던가. 엘리사는 확인하기 위해 닉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얼굴이 찹쌀처럼 쭉 늘어난 닉이 바람 새는 소리로 말했다.

“머 하느거야.”

“네가 진짜 닉인지 확인하는 중.”

변장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닉과 닮은 사람인가?

“내 생일은?”

“11월 26일.”

“내가 좋아하는 건?”

“음, 나?”

“…….”

뻔뻔한 대답을 보니 닉이 맞네. 엘리사는 그제야 잡고 있던 닉의 뺨을 놔주었다. 닉은 약간 빨개진 뺨을 매만지며 툴툴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환영 인사가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헛소리하지 말고.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야 너 보러 왔지. 아직 우리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데, 네가 그냥 떠났잖아.”

“고작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고작 그거라니. 나한텐 중요하다고.”

그랬던가. 엘리사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법이니 말을 덧붙이지 않고 넘어갔다.

“자, 이제 확인 다 됐으면 저 기사들한테 검 좀 내리라고 할래?”

닉은 아직도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저러고 있으니까 나도 검을 뽑고 싶잖아.”

“헛소리하지 말랬지. 그리고 당신들도 검을 치워요. 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니까.”

엘리사의 말에 호위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실력은 형편없지만, 말은 잘 듣네.”

닉의 노골적인 비난에 호위 기사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엘리사도 한숨을 쉬며 닉을 말렸다.

“괜히 시비 걸지 마. 그들이 실력이 형편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지.”

닉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엘리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의 위치가 엘리사의 목을 쥐는 것처럼 절묘했다.

“아까 내가 널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죽일 수 있었어. 저놈들이 내게 검을 겨누기 전에 말이지”

“!”

“그런데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작 한다는 게 검을 겨누는 거라니. 이거야 원, 너무 흠이 많아서 일일이 입을 대기도 버겁네.”

입은 웃고 있었지만, 호위 기사들을 훑는 눈동자는 섬뜩했다.

“도대체 누가 저딴 놈들을 호위 기사라고 뽑은 거야? 나라면 절대 저런 놈들은 안 뽑았어.”

엘리사를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닉은 미소까지 거두며 호위 기사들을 쭉 훑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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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뽑았다고 하더라도 내 소중한 부인을 저런 어중이떠중이를 맡기지 않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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