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이게 사랑인가. (8)2020.10.17.
별장을 나온 칼베른이 향한 곳은 크라임이 머무는 여관이었다.
“소공작님?”
방에서 오늘 하루도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넘어간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던 크라임이 무척 놀라며 칼베른을 맞이했다.
“어째서 이곳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방해한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칼베른이 다소 투박한 나무 의자에 앉자 크리암이 차를 가져왔다. 향긋한 국화차였다. 크라임은 웃으며 칼베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정말로 놀랐습니다. 이곳에서 소공작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무슨 일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 작은 마을까지 오신 겁니까?”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겁니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곳은 수도에서도, 클라우드 공작령에서도 멀리 떨어진 제국 끝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 않습니까.”
크라임이 산뜻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가다가 들를 만한 장소는 아닌 것 같아 약간 의아해서 물어본 겁니다.”
“…….”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졌지만, 상대가 칼베른이라서 차마 묻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잘 넘어갔는데 크라임에게서 막혔다. 칼베른이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었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당신은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요.”
“제가 호기심이 많아서요.”
어서 답을 해달라는 듯한 시선에 칼베른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당신의 예상대로 지나가다가 들렀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요? 혹시 ‘그 일’을 말하는 거라면 괜찮다고 연락을 드렸을 텐데요.”
“가문의 일입니다.”
“아아, 그런 거라면 더 묻지 않겠습니다.”
크라임은 눈치 있게 빠지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부인과는 만나보셨습니까.”
“방금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더군요. 감사합니다.”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크라임이 찻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부인의 상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안색이 약간 어둡긴 했지만, 소공작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죠.”
약 3주 전, 엘리사가 요양을 가기로 결정한 날. 칼베른은 크라임에게 연락해서 엘리사의 상태가 굉장히 안 좋으니 피안트로 와서 그녀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크라임은 칼베른과 알고 지낸 지 어언 7년째였지만, 이런 부탁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엘리사의 상태가 안 좋다는 의미이니 크라임은 하던 것도 멈추고 단걸음에 달려왔다. 그랬는데, 실제로 만나본 엘리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멀쩡했다. 엘리사의 연기력이 무척 뛰어나서 겉으로 봤을 때 티가 나지 않는 건가 싶어 대화도 나눠 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칼베른은 다급하게 엘리사를 봐달라고 부탁했던 걸까. 의아했었는데 피안트에 온 칼베른을 보고 알 것 같았다.
“소공작님은 부인을 굉장히 아끼시는 군요.”
“그렇지요. 그녀는 앞으로 저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니까요.”
“단순히 그 이유뿐입니까?”
칼베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무슨 의미냐는 듯한 시선에 크라임이 웃으며 되물었다
“부인을 사랑하시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제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하지만 지금 소공작님께서 보이시는 행동은 부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크라임은 평소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칼베른은 차를 마시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게 사랑인가?’
그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들과 감정, 그리고 다른 것까지 모두 되짚으며 고민하던 칼베른은 과거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었다.
“이번만큼은 잘못 짚으셨습니다. 전 부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크라임이 영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칼베른을 빤히 바라봤다. 어쩐지 불편한 시선에 칼베른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게 번거로웠을 텐데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선뜻 와주신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제국에 볼일이 있었던 터라 괜찮습니다.”
“제국에 볼일이요? 무슨 볼일입니까?”
“신전 일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크라임이 이미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려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크라임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칼베른이 데리고 온 호위 기사였다. 다급하게 뛰어온 건지 기사의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소공작님!”
“무슨 일이지?”
“방금 클라우드 공작가에서 연락이 왔는데…….”
호위 기사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숨을 한 번 가다듬은 뒤 크게 소리쳤다.
“조, 조금 전에 테레사 부인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테레사 부인이 돌아가셨다고?”
칼베른과 싸운 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온천욕을 하고 있던 엘리사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하녀를 돌아봤다.
“정말로 테레사 부인이 돌아가셨단 말이야?”
“네. 방금 헤리엇 집사님께서 마법 전령새로 부고를 알리셨습니다.”
“허.”
피안트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테레사 부인은 어디 아픈 곳 없이 굉장히 정정했다. 특유의 재수 없는 얼굴로 떠나기 직전까지 엘리사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죽었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아픈 곳이 없었으니 병사는 아닐 테고.
“사고로 돌아가신 거니?”
“자세한 건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구나.”
테레사 부인과 친하지 않을뿐더러 그녀에게 좋은 감정도 없었지만, 그래도 죽었다고 마음이 안 좋았다. 얼마 전에 부친을 떠나보내서 더욱 기분이 안 좋았다. 애써 가슴에 묻어두었던 부친의 일이 떠오른 엘리사는 물기 젖은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알았다. 바로 나갈 테니 먼저 나가 있으렴.”
“네, 마님.”
하녀가 나가고, 온천에서 나온 엘리사는 대충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왔다.
‘저택으로 돌아가야겠지?’
테레사 부인이 죽었는데 계속 요양할 수는 없으니까.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중으로 떠나야 했다. 언제 출발할지 결정하는 건 칼베른이니 그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칼베른은 아직 외출 중이라고 했다. 호위 기사가 그에게 테레사 부인의 소식을 전해주러 갔고.
‘그럼 곧 돌아오겠지.’
그동안 젖은 머리를 말리려고 했는데, 머리가 채 다 마르기도 전에 칼베른이 돌아왔다. 머리를 말리는 것보다 언제 출발할지 물어보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엘리사는 곧바로 칼베른을 만나러 나갔다. 칼베른은 외투도 벗지 않고 하인과 호위 기사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상당히 심각했다. 아무래도 테레사 부인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아 엘리사는 칼베른의 뒤에 서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뒤늦게 엘리사가 온 걸 눈치챈 칼베른이 그녀를 돌아봤다. 칼베른의 얼굴을 보니 아까 그와 싸웠던 게 떠올라 엘리사는 바로 말을 걸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몹시 껄끄러웠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저…….”
“젖은 머리로 돌아다니면 감기 걸립니다.”
엘리사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칼베른이 물었다. 그 때문에 엘리사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반쯤 마른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 말리고 있다가 당신이 왔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그렇게도 제가 보고 싶었던 겁니까?”
“…….”
아무리 연기라지만 저런 말을 어떻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렇게 쉽게 하는 건지.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음, 그것도 있고요.”
저 연기에 맞춰 연기하는 것도 힘들었고. 지금 제 행동이 어색하다는 건 알지만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지 몰라 대충 얼버무린 뒤, 본론을 꺼냈다.
“테레사 부인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 저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테레사 부인께서 왜 갑자기 돌아가신 건가요?”
“저도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사고사라고 하더군요.”
사고사라니. 어떤 죽음이든 다 슬펐지만, 사고사는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는 거니 어떻게 보면 병사보다 더 슬펐다. 엘리사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슬픈 얼굴로 말했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칼베른도 슬픈 얼굴을 하며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언제 수도로 출발하나요? 바로 떠나는 건가요?”
“그러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합니다. 해가 뜨자마자 출발할 예정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지금 잠깐 나가서 닉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올까. 아까 못 했던 이야기도 마저 나누고.
‘좋아, 그러자.’
이대로 닉과 헤어진다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하녀에게 말했다.
“잠시 외출할 거니까 말을 준비해 줘.”
그동안 외출 준비를 하고자 방으로 가려는데 칼베른이 그녀에게 물었다.
“외출하는 겁니까?”
“네. 친구 좀 만나고 오려고요.”
“친구라면 그 성기사를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칼베른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친구를 만나러 가기엔 늦은 시간일 텐데요.”
현재 시각 밤 10시. 확실히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죠. 지금이 아니면 닉에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게 그 성기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중요합니까?”
“중요해요. 하나뿐인 친구거든요. 그러니 잠시 다녀올게요.”
엘리사는 칼베른의 뒷말을 듣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축축한 머리의 물기를 대충 털어낸 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하녀들이 쪼르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작은 주인님께서 지금 당장 수도로 떠나시겠다고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뜬금없는 말에 엘리사는 인상을 팍 쓰며 곧장 칼베른을 찾아갔다. 칼베른은 별장 입구에서 사용인들이 마차에 짐을 싣고 있는 걸 보고 있었다. 그 앞에 다가가 선 엘리사는 무심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칼베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쏘아붙이듯 물었다.
“방금 하녀가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왜 갑자기 변경된 거죠? 아까는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했잖아요.”
“생각해보니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게 조카 된 도리인 것 같아서요.”
갑자기 말을 바꾼 것도 그렇고, 아니꼬운 표정도 그렇고. 순전히 자신이 닉을 보러 가는 게 싫어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지만 저 말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었기에 엘리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0분 뒤면 떠날 준비가 완료됩니다. 바로 출발할 테니 중요한 짐만 챙겨서 나오세요, 부인.”
“…….”
“부인?”
“……당신, 정말 이상한 거 알아요?”
엘리사가 욱하며 뱉은 말에 칼베른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 옆을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알아.”
****
“후아암.”
이른 아침, 닉은 찢어질 듯이 하품을 하며 새벽 기도를 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닉, 잠깐 이리 오거라.”
크라임이 그런 그를 따로 불렀다. 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자 크라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클라우드 소공작 부부가 피안트를 떠났다.”
“네?”
그 말은 엘리사도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분명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당황스러운 소식에 닉은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냈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부가 왜 갑자기 피안트를 떠난 겁니까? 클라우드 소공작은 그렇다 쳐도 소공작 부인은 2주 더 이곳에 있는 거로 아는데요. 게다가 저한테 아무런 말도 없었고…….”
“그만.”
크라인이 손을 들어 닉의 말을 잘랐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았으니까 진정해라.”
“…….”
“클라우드 소공작 부부가 어젯밤 갑자기 피안트를 떠난 건 그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요?”
“클라우드 공작의 여동생인 테레사 부인이 어젯밤,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구나.”
불만스레 툭 튀어나왔던 입이 그제야 들어갔다. 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크라임이 닉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라.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
“그럼 새벽 기도를 하러 가지.”
기도할 땐 잡생각을 지우고 오로지 신을 위하며 기도해야 했지만, 닉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젯밤 엘리사와 칼베른 사이에 흘렀던 기묘한 분위기가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드 소공작인 칼베른이 이름뿐인 남작가의 영애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건 대륙 전체가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그 상대가 엘리사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닉은 처음으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뜬소문을 믿고 싶었다. 칼베른과 엘리사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 거라던 그 소문을. 두 사람을 실제로 봤을 때도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뜬소문이 신뢰가 갔다. 엘리사가 들킬 때까지 칼베른의 존재를 숨긴 것도 한몫했다.
‘그럼 왜 결혼한 거지?’
엘리사, 도대체 뭐 때문에 그 남자랑 결혼한 거야. 알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대주교님.”
닉은 새벽 기도가 끝나자마자 크라임을 찾아가 선포했다.
“휴가 좀 다녀오겠습니다.”
“갑자기 휴가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 휴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휴가를 떠나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막무가내 요구에 크라임은 당황스러웠다. 다른 동료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닉은 짐을 챙겨 내려와 크라임을 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닉!”
닉이 여관을 나가기 직전, 정신을 차린 크라임이 다급하게 물었다.
“갑자기 휴가를 가겠다는 이유가 뭐지?”
그 말에 우뚝 멈춰 선 닉이 선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첫사랑을 되찾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