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이게 사랑인가. (7)2020.10.14.
곧장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닉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안녕, 닉.] 일단 처음에는 의례적인 인사말부터 넣고. [많이 놀랐지? 이해해.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나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아, 이게 아닌데.”
너무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리사는 편지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은 뒤, 새로운 편지지를 꺼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해가 질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지만, 엘리사는 끝내 만족스러운 편지는 쓰지 못했다. 변명을 늘어놓자니 너무 구차한 것 같았고, 사과만 하자니 바보 같아 보였다.
‘원래 성격대로 뻔뻔하게 나가볼까?’
아니야. 그럼 닉이 정말 화를 내며 두 번 다시 나랑 보기 싫다고 할지도 몰라. 시간이 많다면 느긋하게 화해할 텐데 그게 아니니 마음이 조급했다.
“으아아, 미치겠다.”
엘리사는 머리를 싸매며 탁자 위에 엎드렸다. 사과 편지를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차라리 직접 보고 사과하는 게 낫겠어.”
아, 그게 더 어려우려나. 닉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지만, 막상 그 화난 얼굴을 보면 말이 안 나올 것 같았다. 시간이 충분히 있으면 느긋하게 고민하고, 닉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릴 텐데 그게 아니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더 생각이 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어렵다, 어려워.”
어떻게 하면 닉과 화해할 수 있을지 끙끙 앓으면 고민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창문 쪽이었다. 그쪽을 돌아보니 창틀에 앉아 있는 닉이 보였다. 엘리사는 닉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닉!”
엘리사는 닉이 자신을 먼저 찾아왔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두려워 창문을 열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닉이 또 창문을 두드렸다. 어서 열어달라는 의미였다. 고맙게도 먼저 찾아와 준 닉을 이대로 보낼 수 없을 뿐더러, 밖에 오래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엘리사는 바로 창문을 열었다. 훌쩍 창문을 넘어 들어온 닉이 휘파람을 불며 엘리사를 위 아래로 훑어봤다.
“뭐야, 잠시 못 본 사이에 더 못생겨졌네.”
아까 일을 설명하라든가, 정말 네가 소공작 부인이냐고 화내거나 따질 줄 알았는데 닉은 그러지 않고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 닉의 행동에 안심이 되긴커녕 더 불안해진 엘리사는 두 손을 꼭 마주 쥐며 닉의 눈치를 살폈다.
“화 안 났어?”
“내가 왜 화가 나야 돼?”
“내가 널 속였잖아.”
유쾌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약간 내려갔다. 닉의 표정이 약간 굳자 엘리사는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물론 일부러 속인 건 아니야.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내가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인 걸 밝히면 네가 격식을 차릴 것 같았으니까.”
편지를 적을 때도 느꼈지만 변명을 늘어놓는 건 너무 구차해보였고,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변명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엘리사는 열심히 변명했다.
“난 격식 따위는 차리지 않고 지금처럼 너와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어.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
“물론 잘못했다는 건 알아. 그래도 나는.”
“알아.”
닉이 굳어 있던 입꼬리를 풀며 아까부터 가늘게 떨리고 있던 엘리사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겠으니까 진정해.”
“닉.”
“괜찮아. 이해해. 내가 네 입장이라도 그랬을 거야. 뭐,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닉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너한테 내가 성국의 귀족이고 곧 성기사가 될 거라는 걸 말 못 하고 그냥 떠났었잖아.”
“…….”
“게다가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일개 하녀가 이렇게 좋은 방에 머무는 것도, 그리고 자유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도 말이지.”
엘리사를 바라보는 닉의 눈동자엔 그녀를 향한 분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이 진심 어린 유쾌한 감정안 보일 뿐이었다. 그 사실에 엘리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걸 느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 어? 야, 갑자기 왜 울어?”
엘리사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자 닉은 당황하며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도 참, 못 본 사이에 눈물이 많아졌구나.”
타박하는 목소리와 달리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으면 울긴커녕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오히려 화를 냈었는데.”
“……내가 언제? 난 항상 눈물 많은 가녀린 소녀였어.”
“망각은 자유지만 기억을 왜곡하진 마라.”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엘리사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닉의 행동은 얄미웠지만 덕분에 어색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눈물도 쏙 들어갔다.
“그나저나 네가 그 유명한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라니. 신기하고 이상하네.”
“신기하다는 건 이해하는데 이상하다는 건 뭐야?”
“뭐긴 뭐야. 말 그대로지. 네가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인 게 이상하다고.”
닉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안 어울려. 네가 소공작 부인으로 있어도 괜찮은 거 맞아?”
“안 괜찮을 건 뭐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뭐, 너 보기보다 머리는 좋으니까 일은 잘할 것 같다.”
언뜻 들으면 칭찬 같았지만 엄연히 욕이었다. 엘리사는 팔짱을 끼고 닉을 노려봤다.
“그럼 넌 뭐 성기사랑 잘 어울리는 줄 알아? 너 같이 술 좋아하고 방탕한 놈이 성기사라니. 신께서 통곡하실 거야.”
“에헤이, 날 너무 무시하는데. 나 이래 뵈도 1급 성기사야.”
성기사에도 급이 있었는데 특급, 1급, 2급과 3급 이렇게 4개로 나뉘었다. 그런데 닉이 1급 성기사라니. 믿기지 않았다.
“진짜야? 거짓말이 아니라?”
“물론이지. 성기사단증이라도 보여줄까?”
“보여줘.”
“쯧, 사람 참 못 믿긴.”
닉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제복 갈아입으면서 제복 외투 주머니에 넣어뒀다. 내일 보여줄게.”
“됐어. 장난이야. 네 말 믿어.”
“그럼 다행이고.”
닉이 웃으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근데 정말 놀랐어. 네가 벌써 결혼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
“벌써라니. 내 나이 올해 23살이야. 이미 결혼하고도 남을 나이지.”
“하긴. 귀족들은 보통 성인식만 치르면 다 결혼하니까.”
“그래서 묻는 건데 넌 결혼 안 해? 아, 성기사라서 결혼 안 하나?”
신관들은 결혼하지 않고 신에게 평생을 바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성기사들도 그런지는 알지 못했다. 엘리사가 애매하게 묻자 닉이 고개를 저었다.
“신관들과 달리 성기사들은 결혼할 수 있어. 우리 아버지도 성기사인데 결혼해서 나랑 형을 낳은 거고.”
“아, 그래? 그럼 너도 곧 결혼하겠네.”
“글쎄. 난 아직 생각 없는데.”
“비혼인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닉은 시선을 길게 아래로 내리고 발을 앞뒤로 흔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든.”
“뭐라고?”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한 엘리사는 귀에 손을 대고 닉 쪽으로 들이밀었다. 닉이 픽 웃으며 그런 엘리사를 밀어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얼른 말해 봐. 뭔데?”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는, 뭐 그런 시시한 이야기야.”
아, 이런. 그런 건 줄 알았다면 묻지 않았을 텐데. 엘리사는 의도치 않게 닉의 아픈 곳을 찌르게 되자 콧잔등을 찌푸렸다.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미안하긴. 네가 사과할 이유가 뭐가 있어.”
닉도 콧잔등을 찌푸리며 입을 일자로 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사과해라. 넌 나한테 사과 많이 해야 해.”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푸핫.”
엘리사가 두 손을 모으고 사과하자 닉이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뭐야.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웃어.”
엘리사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고, 방안에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한참을 웃다가 먼저 웃음을 그친 닉이 약간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왜 그래?”
“음,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물어봐.”
엘리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려운 질문인지 닉이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그게, 이번엔 내가 미안해질 수도 있는 질문이라서.”
“괜찮아. 오늘 내가 잘못한 게 많으니까 한 번은 눈 감고 너그럽게 봐줄게.”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을게.”
닉은 크게 심호흡한 뒤 입을 열었다.
“엘리사, 정말 클라우드 소공작을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
닉이 뜸들이는 걸 봐서 의미심장한 질문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저런 걸 물어볼 줄이야. 엘리사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창틀에서 내려온 닉이 눈썹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엘리사의 양 어깨를 잡았다.
“아니지? 그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지?”
“닉, 그게…….”
“뭐가 아니라는 거지?”
“!”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엘리사는 닉의 질문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닫힌 문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는 칼베른이 보였다. 언제 들어온 거지? 문 열리는 소리나 들어오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점심 때 카페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구경꾼이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닉의 반응도 달랐다.
“클라우드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닉은 가슴에 손을 얹고 공손히 인사했다. 칼베른은 그런 닉을 향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엘리사만 보며 물었다.
“저자가 왜 그대의 방에 있는 거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목소리에 화가 묻어 있었다. 표정도 썩 좋지 않았고. 뭐가 또 저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엘리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친구에게 놀러온 것뿐이에요.”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담을 넘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와 칼베른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닉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주인이 허락했으니 문제가 될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주인? 누가?”
“누구긴요. 제 오랜 친구이자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인 엘리사 클라우드죠.”
칼베른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미간 사이의 간격이 더욱 좁아졌다.
‘저 남자를 더 화나게 하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엘리사는 닉을 창문 쪽으로 떠밀었다.
“닉, 이만 돌아가.”
“하지만 엘리사…….”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엘리사가 애원하듯 말하자 닉은 못마땅한 얼굴로 칼베른을 한 번 흘겨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꼭 연락해야 해. 기다리고 있을게.”
닉이 떠나고 방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칼베른은 아까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엘리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에는 여전히 불만과 화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진짜 왜 저러는 건지. 엘리사는 약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칼베른에게 물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엘리사가 묻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칼베른이 대답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뭘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저 성기사, 정부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또 그 이야기인가. 엘리사는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야심한 시각에 여기 있는 거지?”
“저녁 6시를 야심한 시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엘리사는 짜증이 났지만 침착하게 오류를 정정했다.
“그리고 설령 닉이 제 정부가 맞다고 해도 소공작님이 저에게 뭐라고 하실 입장은 아니신 걸로 아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지?”
“주기적으로 환락가에 드나드는 것보다 차라리 정부를 만드는 게 더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
한순간 칼베른의 얼굴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됐다. 자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가 주기적으로 환락가에 다니는 걸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없죠. 주기적으로 외박하는 데다가 그때마다 낯선 향수 냄새를 묻히고 오는데요.”
“내가 그랬다고?”
“그럼 제가 없는 말을 지어냈을까봐요?”
사실 약간 과장한 거였다. 엘리사가 지금까지 맡은 건 딱 두 번뿐이었지만, 그 두 번 다 외박하고 돌아온 칼베른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였다. 그리고 그 두 번 다 칼베른의 몸에선 다른 향수 냄새가 났었다. 여자가 쓸 법한 달콤하고 짙은 향기가.
“소공작님께서 환락가에 다니시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성욕을 풀려면 당연히 가셔야겠죠.”
“…….”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소공작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공작 각하께서도 뭐라고 하실 거고요.”
칼베른의 표정이 점점 더 구겨졌다.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깊게 파였다.
‘나한테 말할 땐 당연한 것처럼 말해놓고, 막상 들으니 잔소리처럼 들리는 모양이지.’
그래서 인정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 엘리사는 작게 실소하며 문을 열었다.
“제가 이만 쉬고 싶어서요.”
“…….”
“더 볼일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시겠어요?”
칼베른은 엘리사를 빤히 쳐다보다가 휙, 밖으로 나갔다. 약 한 시간 뒤, 칼베른이 별장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하녀를 통해 엘리사에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