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게 사랑인가. (3)2020.09.30.
“휴양 왔어.”
“휴양? 아아, 조만간 별장에 어느 지체 높은 귀부인이 휴양 온다고 하더니, 그 귀부인의 하녀가 된 모양이지?”
아니, 그 귀부인이 나야.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닉에게 자신이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 됐다는 건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닉이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되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사실을 밝히면 지금처럼 닉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닉과의 관계는 지금이 딱 좋았다. 이 이상도, 이 이하로도 나빠지지 않았으면 했다.
“이야, 철들었네.”
엘리사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닉이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되지도 않은 연금술의 거장이 될 거라며 소리치고 다니길래, 언제 철드나 걱정했는데 역시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달라지나 봐.”
“……야.”
“음, 음. 좋아. 그래야지. 암, 그렇고 말고.”
후, 이걸 때려, 말아?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펴며 얄밉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닉을 노려보고 있던 엘리사는 뒤이은 말에 그대로 굳었다.
“아저씨는 잘 지내시지? 아저씨도 오랜만에 보고 싶다.”
“…….”
아빠, 아빠, 아빠. 어렵사리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제르나 남작의 모습이 떠오르자 엘리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 어? 왜, 왜 그래?”
엘리사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자 닉은 어쩔 줄 몰라하며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엘리사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런 닉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빠는…… 돌아가셨어.”
허공에서 공기를 가르며 팔딱거리던 손이 멈췄다. 닉의 눈동자가 슬프게 젖어가는 엘리사의 표정을 담은 채 굳었다.
“얼마 전에…… 륀벤 병에 걸리셔서 돌아가셨어.”
“…….”
“그래서, 그래서…….”
와락-. 돌연 닉이 끌어안는 바람에 엘리사는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미안.”
닉은 엘리사의 등을 꼭 끌어안으며 장난기가 쏙 빠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닉이 잘못한 건 없었다. 그는 몰랐던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고, 사과할 필요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안해, 엘리사. 내가 나쁜 놈이야.”
닉은 엘리사의 등을 토닥여주며 연거푸 사과했다.
“그러니까 날 욕하고 싶으면 욕해도 돼.”
“…….”
“울고 싶으면 참지 말고 마음껏 울어. 그래야 속에 담긴 게 풀어질 테니까, 울어도 돼.”
닉이 그렇게 말해서일까. 수도꼭지가 풀린 것처럼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편안하게 운 건 오랜만이었다. 얼마 전에 칼베른의 앞에서 울긴 했지만, 그땐 칼베른이 뭐라고 할까봐,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참았었다. 제르나 남작의 장례식에서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오열하며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싶은데, 주변에서 하도 눈치를 주니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도 미처 참지 못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을 만큼 엘리사는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것들이 무척 많았다.
“흐엉, 흐어엉.”
그 모든 것들을 비로소 쏟아낼 수 있게 된 엘리사는 닉의 품을 더욱 파고들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주치의가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계속 속에 담아두는 게 아니라 눈물이든 뭐든 어떤 형태로 표출하라고 말했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그저 닉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기만 했을 뿐인데 답답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굉장히 부끄럽다는 것. 축축하게 젖은 그의 가슴팍만큼이나 창피함이 몰려왔다. 할 수 있다면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때문에 엘리사는 다 울고 난 뒤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닉의 얼굴을 어떻게 표정으로 봐야할 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실태라처럼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다 울었어?”
“어? 아, 어, 응.”
“그럼 좀 떨어져 줄래. 무거워서.”
닉은 그런 엘리사를 휙 떼어내고 손수건으로 젖은 옷깃을 닦았다.
“어휴, 뭐야. 너 설마 콧물도 흘린 거야?”
“…….”
조금 전까지 엘리사를 부드럽게 다독여주던 다정하고 자상한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장난꾸러기 닉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침까지 흘린 것 같은데.”
“침 안 흘렸거든!”
“콧물 흘린 건 부정 안 하네.”
“콧물도 안 흘렸어!”
덕분에 엘리사는 어색해하지 않고 예전처럼 닉을 대할 수 있었다. 닉은 눈물 자국을 닦았던 손수건을 엘리사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자, 너 때문에 더러워진 거니까 네가 빨아 줘.”
“에라이, 그래! 내가 빨아줄게! 아예 그 셔츠도 벗지 그러냐! 내가 다 빨아줄 테니.”
“어허, 외간 남자의 옷을 함부로 벗기려고 그러네.”
“네가 외간 남자야?”
“내간 남자는 아니잖아?”
닉은 되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엘리사의 헝클어진 머리를 더욱 헝클어뜨렸다.
“그럼 내일 가지러 올 테니까 내일까지 깨끗하게 빨아서 잘 말려 놔.”
“몇 시에 올 건데?”
창문을 열고 창틀에 앉은 닉이 잠시 고민했다가 대답했다.
“글쎄. 점심 쯤?”
“뭐? 너무 일러. 그때까지 손수건 안 마를 거야.”
“일단 말려 봐. 정 안 되면 그 다음날 다시 가지러 오면 되니까.”
“그럼 처음부터 그 다음 날 오면 되잖아. 왜 번거롭게 두 번 왔다갔다 하려는 건데?”
궁금해서 묻자 닉이 봄날의 봄바람처럼 산뜻하게 웃었다.
“그럼 내일 널 볼 핑계가 사라지잖아.”
“어……?”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닉은 그런 엘리사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내일 점심 때 데리러 올게, 엘리사.”
닉이 훌쩍 창문을 넘어간 뒤, 혼자 남은 엘리사는 멍하니 닉의 자취를 쫓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입에 버터를 발라놨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상대가 닉이다 보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저랬던 녀석이니까. 나중에 결혼할 상대가 없으면 자신과 하자는 말도 심심치 않게 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저런 말을 들으니 약간 설레긴 했다. 잊었던 연애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닉을 남자로 보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엘리사에게 있어 친구이자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가족이라.”
제르나 남작이 죽은 지금, 엘리사가 가족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법적인 가족은 있었다. 호적상의 남편. 칼베른 클라우드. 하지만 엘리사는 그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믿지 않고 철저하게 계약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를 어떻게 가족이라고 지칭하겠는가.
“…….”
그 사실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저녁 먹은 게 얹힌 건지 체증이 느껴져 엘리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열린 창문을 닫았다. ****
“이번 겨울은 생각보다 따뜻하군.”
제국의 황제, 드리미어가 어린 사슴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그 옆에 봄이 찾아온 것처럼 노란색으로 화사하게 차려입은 마리아가 다소곳이 웃으며 드리미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요. 덕분에 올해는 맹추위에 얼어 죽는 제국민들이 적을 테니 다행이네요.”
“허허, 우리 마리아는 마음씨가 참 곱구나.”
“어머나,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바마마.”
누가 봐도 사이좋은 부녀 지간 모습에 다들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봤지만 단 한 명, 칼베른 만큼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묵묵히 차만 마셨다. 에드윈은 드리미어가 칼베른을 점심 만찬에 부른 이유가 ‘그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단순히 마리아가 칼베른과 같이 점심을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걸 예상했으면서도 와야 하는 현실이 성가시고 짜증났다. 이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고, 서류를 읽는 게 더 생산적이었다.
“소공작은 어떻게 생각하지?”
불쑥 들어온 질문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칼베른은 드리미어를 쳐다봤다. 드리미어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마리아 말일세. 좋은 아내가 될 것 같지 않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심 따위는 한 스푼도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대답이었지만 드리미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허허, 슬슬 마리아도 혼기가 차서 시집을 보내야 하는데 누구한테 보내야 할지 고민되는 구나.”
드리미어의 말에 마리아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칼베른을 흘끗 쳐다봤다. 누가 봐도 칼베른을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칼베른은 물론 드리미어도 무시했다.
“마침 헤센 제국의 황태자가 혼자라고 하니 그곳에 국혼 신청을 해볼까 하는데. 클라우드 소공작, 그대의 의견은 어떻지?”
“아바마마…….”
마리아가 약간 젖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드리미어는 여전히 마리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칼베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식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대답했다.
“헤센 제국의 황태자라면 황녀 전하께 어울리는 짝이고 국혼을 하면 제국에도 도움되니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칼베른의 대답에 우울했던 마리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리아는 기대에 찬 눈으로 칼베른을 바라봤다. 반면 드리미어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는 수염이 길게 난 턱을 쓰다듬었다.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요. 좀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심각한 이야기는 잠깐이었다. 드리미어는 다시 마리아를 비롯한 자식 자랑을 늘어놓았고, 칼베른은 적당히 응수해주다가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 핑계를 대고 일어섰다.
“이거.”
곧장 기사단으로 가려는데 마리아가 쿠키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이번엔 쿠키인가.’
최근 마리아는 칼베른을 볼 때마다 먹을 거나 액세서리 등 뭔가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거절해도 황녀의 직위까지 이용해서 끈질기게 구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전 단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안 달게 만들었으니까, 하나만 먹어봐요. 먹어보고 마음에 들면 가져가요.”
거절하자니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드리미어의 시선이 걸렸다.
“딱 하나만 먹어보겠습니다.”
칼베른은 어쩔 수 없이 쿠키 하나를 먹었다. 마리아의 눈동자에 기대가 서렸다.
“어때요?”
“괜찮군요.”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쿠키는 달지 않고 적당히 바삭해서 먹을 만했다. 모처럼 진심을 말해줬는데,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마리아가 칼베른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은 그것뿐인가요?”
“달리 해야 할 말이 있습니까?”
칼베른이 의아해하며 묻자 마리아가 크게 실망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쁠 텐데 이만 가보세요, 칼베른.”
더 먹어보라거나, 쿠키를 가져가라고 성화를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리아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럼 이만.”
평소의 마리아 답지 않은 행동에 약간 의아했지만, 칼베른은 별말 하지 않고 물러났다. 황제가 기거하는 태양의 궁을 나온 칼베른이 향한 곳은 황태자의 궁이었다.
“어라, 칼베른?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마침 검술 훈련을 하고 있던 오스카가 마른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칼베른을 맞이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부황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었지.”
칼베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오스카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흘긋 쳐다봤다. 단 둘이 할 말이 있으니 그들을 물려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모두 물러나라.”
오스카의 명에 사람들이 물러났다. 칼베른은 잠자코 있다가 그들의 대화를 들을 만한 거리에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국혼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국혼? 누구의?”
“황녀 전하와 헤센 제국의 황태자입니다.”
“마리아와 헤센 제국의 황태자?”
오스카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마리아가 헤센 제국의 황태자비가 된다면 그녀의 모친인 황후는 외세의 힘을 얻게 된다. 그럼 황후는 그 힘을 이용하여 오스카가 아닌 그녀의 아들인 데아른을 황제로 만들려고 할 게 분명할 터.
“설마 부황 폐하께선 데아른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이신가.”
“제가 보기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께선 단순히 황녀 전하를 좋은 곳에 시집보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부황 폐하께선 그만큼 그 아이를 예뻐하시니까. 그 아이가 부탁한다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분이지.”
오스카가 픽 웃으며 파릇파릇한 잔디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런 부황 폐하께서 유일하게 들어주지 않은 마리아의 소원이 너와 결혼하는 거였지.”
“…….”
“뭐, 당연한가. 너랑 결혼하면 마리아는 틀림없이 죽게 될 테니까.”
칼베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걸 본 오스카가 손사래를 쳤다.
“미안. 장난이 심했네. 별뜻 없이 그냥 한 말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만 가도 좋아.”
“……실례하겠습니다.”
칼베른은 오스카에게 인사하고 황태자 궁을 나왔다. 곧바로 기사단으로 가고 있던 그는 기다란 회랑에서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정면에서 마주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2황자, 데아른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무시하고 갈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칼베른은 가슴에 손을 얹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군요, 클라우드 소공작. 잘 지냈습니까?”
“네. 황자 전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요. 그러고 보니 소공작 부인이 마음의 병을 얻어 몸이 약해지는 바람에 피안트로 요양을 갔다고 했죠?”
“네.”
“그거 정말 마음의 병이 맞습니까?”
칼베른이 무슨 의미냐는 듯 쳐다보자 데아른이 검지를 뺨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공작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소공작 부인도 소공작 때문에 몸이 약해진 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