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즐거운 생일 파티. (2)2020.09.19.
드레스가 에스타와 어울리지 않는 건 물론, 화장도 완전 이상했다. 보아하니 버건디 드레스에 맞춘 것 같은데,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엘리사 뿐만이 아닌지 다른 사람들도 에스타를 보며 수군거렸다.
“세상에, 저 꼴을 보세요. 누가 저렇게 꾸민 거죠?”
“스스로 한 게 아닐까요?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해맑게 웃을 리가 없잖아요.”
“진짜 보는 눈이 없네요.”
엘리사 때와는 달리 사람들은 대놓고 에스타를 비웃었다. 그들이 비웃는 소리를 들은 에스타는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한 중년 귀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스타에게 말했다.
“에스타, 이게 무슨 꼴이니.”
“네? 이상한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계절에 맞지도 않고, 무엇보다 버건디는 너랑 어울리지 않는 색이야. 화장도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잖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에스타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크게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요! 소공작 부인께서 저랑 잘 어울린다며 선물해주셨단 말이에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엘리사에게 향했다. 정확하게 ‘엘리사’ 혹은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이곳에 소공작 부인은 엘리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들 그녀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타겟은 에스타에서 엘리사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에스타 양,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의 보좌관이었죠?”
“어쩜, 자기 보좌관한테 이상한 옷을 입혀서 자기를 돋보이게 할 생각이었나 봐요. 심보도 고약하지.”
아니야. 그럴 생각 전혀 없었다고! 엘리사는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그때 사지 말라고 말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크게 후회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이미 돌이킬 수가 없으니, 후회하며 주저앉기 보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화장이야 지우고 다시 하면 된다지만, 문제는 드레스였다. 어디서 새로운 드레스를 가지고 온단 말인가. 물론 마리아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여분의 손님용 드레스를 몇 개 준비해뒀겠지만, 마리아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건 껄끄러웠다. 부탁한다고 해서 그녀가 빌려줄 지도 의문이었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며 비아냥 거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곤란해하며 고민하며 눈동자를 굴리던 엘리사의 눈에 들어온 건 매끄럽게 올라간 에스타의 입꼬리였다.
‘웃고……있어?’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 어째서? 혹시 잘못 봤나 싶어 엘리사는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다시 에스타를 쳐다봤다. 그러자 축 늘어진 입꼬리가 보였다. 역시 잘못 본 거였구나. 너무 당황해서 헛 게 보인 게 분명했다.
“…….”
그렇게 생각했는데, 순간 마주친 물기 젖은 눈동자에 서린 이채로운 빛을 본 엘리사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스타는 겉으론 곤란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이 상황을 즐기며 웃고 있었다. 그 말인즉, 저 드레스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고의로 입고 왔다는 의미였다.
‘어째서?’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설마 저 드레스를 선물해 준 날 욕먹이기 위해서?
“소공작 부인께선 잘못하신 게 없어요! 그냥 저와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라서 선물해주신 것뿐이에요! 그러니 욕하려면 저를 욕하세요!”
엘리사는 에스타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애써 부정했지만, 거듭되는 에스타의 행동과 표정을 보고 이 역시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건 계획적이었다. 저 드레스를 제게 선물 받았을 때부터 에스타는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에스타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들었다. 엘리사는 부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에스타 양.”
엘리사가 에스타를 부르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엘리사와 에스타를 번갈아 쳐다봤다. 쏟아지는 시선에 에스타는 불안해하며 눈동자를 굴렸지만, 엘리사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에스타만 쳐다봤다.
“정말 그 드레스를 고른 게 저인가요?”
“네?”
“제가 정말 그 드레스를 골라서 에스타 양에게 선물로 줬냐고 물어본 겁니다.”
“아, 그게 부인께서 선물로 주신 건 맞는데 고른 사람은…….”
엘리사가 조곤조곤 따지자 에스타는 아까처럼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런 에스타의 행동에 사람들이 더욱 웅성거렸다. 에스타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보다 엘리사가 뭐라고 하는 바람에 에스타가 겁을 먹어서 제대로 말을 못한다는 쪽의 여론이 더 많았다.
“말해봐요. 그 드레스를 먼저 고른 사람이 누구죠?”
“그게, 저…….”
에스타는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 눈동자로 누군가를 애타게 바라봤다. 엘리사는 에스타의 눈동자가 멈춘 곳을 슬쩍 바라봤다. 그곳엔 마리아가 있었다. 에스타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마리아를 애타게 바라보는 걸까?
“그만하세요.”
에스타와 눈이 마주친 마리아가 기다렸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두르고 있던 숄을 에스타의 어깨에 걸쳐주며 엘리사를 노려봤다.
“부인이 선물해준 옷 때문에 이 사달이 일어난 건데, 어째서 에스타 양을 탓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탓하는 게 아니라 잘못을 똑바로 가리려는 겁니다. 분명 저 드레스는 제가 선물해줬지만, 저 드레스를 고른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에스타 양, 본인이거든요.”
“그래도 부인이 선물해줬다는 사실은 변함없죠. 이 드레스가 에스타 양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한 눈에 알아봤을 텐데, 그걸 말하지 않고 선물해 준 부인의 잘못입니다.”
하. 엘리사가 작게 실소했다.
“뭘 해도 제 잘못이라는 거군요.”
“그대의 잘못이니까요. 정말로 부인이 에스타 양을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짚어줬어야지요.”
“맞아요. 어쩜, 저렇게 심보가 못됐는지…….”
“나 같으면 바로 말해줬을 텐데…….”
주변 사람들이 마리아의 말에 동조하며 엘리사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마리아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예 날을 잡았구나, 날을 잡았어. 엘리사는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소공작 부인이라는 직위에 걸맞게 똑바로 행동해주세요, 부인.”
“…….”
“아니면 아랫것들에게 얕잡혀 보여 또 이상한 누명을 쓰게 될 테니까요. 그것 때문에 칼베른이 얼마나 곤란해 했는지, 아시나요?”
저 말을 듣는 순간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엘리사는 입술을 비틀며 마리아를 쏘아봤다.
“송구하오나 호칭을 똑바로 해주시죠, 황녀 전하. 칼베른이 아니라 클라우드 소공작입니다.”
마리아가 몹시 황당하다는 얼굴로 엘리사를 쳐다봤다.
“내가 칼베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잘못됐다는 건가요?”
“네. 소공작님이 미혼이라면 모를까, 기혼인데다가 전 소공작님의 부인입니다. 그런데 제 앞에서 다른 여자가 남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게 썩 유쾌하지는 않네요.”
“지금 우리 사이를 질투한다는 건가요?”
“질투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다른 귀부인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걸요?”
그 말에 마리아가 휙 주변을 둘러봤다. 엘리사의 말이 틀렸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 어떤 귀부인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외조모인 캠벨 부인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지금 마리아의 행동은 누가봐도 옳지 못한 행동이었으니까. 적어도 양심은 있는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그리고 소공작님도 황녀 전하께서 이렇게 서슴없이 소공작님의 이름을 부르는 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부인이 어떻게 알죠?”
“그야 저희 결혼식 피로연 때, 정원에서 두 분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소공작님께 들었거든요.”
“……!”
마리아의 눈동자가 한계까지 확장했다가 수축했다. 진주 가루를 발라 반짝반짝 빛나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칼베른이 말해줬다고요?”
“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마리아의 속을 뒤집어놓기 위해 엘리사는 기꺼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전부 말해줬어요. 당연하죠. 저희는 부부니까요.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그러니 앞으로 자제해주세요. 아니면 제가 어떤 말을 떠들고 다닐지 모르니까요.”
마리아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악 다물었다. 부채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어머, 그럴 리가요.”
엘리사는 두 손을 꼭 마주 쥐며 싱긋 웃었다.
“그저 황녀 전하를 생각해서 작은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황녀 전하께서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상대방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짚어줘야한다고요.”
“!”
“그러니 그런 것뿐인데, 제가 뭘 잘못 했나요?”
여러분, 한 번 말해보세요, 네? 엘리사는 그런 제스처를 보이며 마리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이번에도 구경꾼들은 입을 다문 채 엘리사의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왜 다들 말이 없으실까? 방금까지는 그렇게 잘 떠들었으면서.”
“그만하세요, 소공작 부인.”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는지 캠벨 후작 부인이 나섰다. 안 그래도 슬슬 멈출 생각이었기에 엘리사는 군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옆에 서 있는 에스타를 쳐다봤다. 마리아가 공격당할 때부터 그녀의 표정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발발 떨리는 눈동자는 그녀의 옷을 지적 받았을 때보다 더 곤란해 보였다. 순간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에스타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구세주인 양 그녀의 옷깃을 꼭 붙잡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둘이 한패인 건가?’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마리아가 자신을 감시하는 등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에스타를 제 옆에 붙여뒀을 가능성이. 그런 줄도 모르고 에스타를 믿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자신이 바보 같고 꼴사나워서 엘리사는 쓰게 웃었다. 칼베른에게 믿음을 배신 당해 상처 난 마음이 다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상처를 입었다.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연회장의 분위기는 처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엘리사와 마리아의 눈치만 살폈다.
“이런 저 때문에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네요.”
마음은 상처 부위에 후추와 소금을 뿌린 것처럼 몹시 쓰라렸지만, 이럴수록 웃어야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으니 엘리사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제가 더 있어봤자 분위기만 더 망칠 것 같으니 이만 떠날게요.”
칼베른의 옆에서 가짜 연인 혹은 부부 행세를 하며 연기 실력을 갈고 닦았던 게 이 순간에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대로 돌아선 엘리사가 문쪽으로 걸어가자 사람들은 홍해처럼 갈라섰다.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던 엘리사는 나가기 직전,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마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생신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부디 즐거운 생신 파티가 되시길 바랄게요.”
**** 다음 날, 엘리사는 에드윈이 출근하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전날 밤, 마리아의 생일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엘리사의 표정이 안 좋다는 것과, 그녀가 먼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한 에드윈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혹시 황녀 전하께서 소공작님이 그동안 초대장을 숨긴 일에 대해 화를 내시던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왜?”
엘리사는 에드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론 경은 누구의 편인가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에드윈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당연히 소공작님의 편입니다. 전 소공작님을 모시는 보좌관이니까요.”
“그럼 클라우드 공작가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겠네요. 소공작님에게도 폐가 갈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에드윈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엘리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에스타 양을 제 보좌관으로 추천해 준 사람이 누군가요?”
“추천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직접 이력서를 넣은 걸로 압니다만……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에스타 양이 황녀 전하와 한패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에드윈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에드윈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분명 확실하게 확인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몰랐나 보군요.”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절대 부인의 보좌관이 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에드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엘리사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걸 일일이 의심하기엔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드윈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길 뿐이었다.
“지금 당장 에스타 양을 해고하십시오, 부인. 제가 새로운 보좌관을 알아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절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요?”
“부인.”
순간 날카롭게 쏘아붙였던 엘리사는 에드윈이 당황스럽다는 듯 저를 부르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스타 양은 당장 해고하겠지만, 보좌관을 뽑는 건 좀 더 기다려주세요. 제가 필요하면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