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즐거운 생일 파티. (1)2020.09.16.
-그대 생각에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어. 잠이 덜 깼거나,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편지지에는 확실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쬐고 있는 꽃을 볼 때마다 그대가 떠올라. 그 예쁜 입술에 입을 맞췄을 때가 그리워지는 군. 그렇다면 편지가 잘못 온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딴 내용이 적혀 있을 리가 없으니 엘리사는 편지 봉투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편지 봉투에는 칼베른의 인장이 버젓이 찍혀 있었다.
“허, 그럼 뭔가 잘못 먹었나.”
어디서 이상한 독버섯이라도 주워 먹은 거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미치는 독버섯도 있나. 칼베른이 적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닭살스러운 말이 잔뜩 적혀 있는 편지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었다. 엘리사는 닭살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편지지가 마치 벌레라도 되는 양 편지지 끝을 잡고 서랍에 구겨넣었다. 다른 때라면 편지를 읽자마자 답장을 바로 썼을 텐데, 이번 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저 편지에 뭐라고 답을 보낸단 말인가. 평소처럼 일과 보고서를 쓰기도 애매했다.
‘나중에 천천히 고민해야지.’
하루 늦게 편지를 보낸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황녀인 마리아의 생일 파티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보통 황족의 생일 파티는 이틀 밤낮으로 화려하게 열렸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마리아가 몬스터 토벌 원정대가 고생하는 데 화려하게 생일 파티를 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올해는 소수만 불러 조촐하게 연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소수엔 엘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베른은 선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다들 선물을 들고 올 텐데 혼자 빈손으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엘리사는 마리아에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차를 타러 가려는 엘리사의 앞을 가로 막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잠깐 제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소공작 부인.”
바로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이 이렇게 먼저 말을 거는 건, 그때 이상한 말을 한 이후 처음인지라 엘리사는 약간 긴장하며 그를 바라봤다.
“제게 할 말이 있나요?”
“네. 긴히, 단둘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게다가 단둘이란 말이지. 엘리사는 더 긴장됐지만 태연한 척 굴며 하녀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눈짓을 했다. 순식간에 복도에는 그들 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말이죠?”
“황녀 전하께선 결혼식 이후, 소공작 부인을 티파티에 몇 번 초대하셨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저를요?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당연히 처음 들으시겠죠. 소공작님께서 전부 숨기라고 하셨으니까요.”
그 남자가 숨기라고 했다고? 왜?
“아마 오늘 파티에 참석하시면 황녀 전하께서 그간 왜 티파티 초대를 무시했냐고 물으실 겁니다. 그럼 부인께선 사실 그대로 말하시면 됩니다.”
“그 말은 소공작님이 초대장을 숨겨서 못 왔다고 말해도 된다는 건가요?”
“네.”
“그럼 황녀 전하의 질책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는 소공작님께 뭐라고 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그런가. 아, 하긴 마리아는 칼베른을 좋아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걸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원래는 제가 가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번 파티 때 남자는 참석 불가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말씀 드리는 겁니다.”
“…….”
“그럼 전 이만.”
에드윈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인사하고 훌쩍 떠났다. 엘리사는 그런 에드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마차를 타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다른 황궁 파티라면 황궁 입구부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마차 행렬이 늘어졌을 텐데 오늘은 비교적 조용했다. 이번 황녀 생일 파티엔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 그 중에서도 귀부인과 영애들만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엘리사는 막힘없이 바로 신분 검사를 하고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려하네.’
태어나서 황궁 내부를 처음 보는 엘리사의 첫 감평이었다. 그만큼 황궁은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대리석을 쌓아 올린 궁의 외벽에는 세심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고, 눈이 닿는 곳에 보석과 황금이 박혀 있었다.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리며 황궁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마차가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내리십시오, 부인.”
엘리사는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궁안으로 들어갔다. 외부가 화려한 만큼 내부 역시 화려했다.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그림과 장신구들 덕분에 크고 넓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눈이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는 연회장 입구까지였다. 입구에 도착하자 호위 기사는 엘리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한 발 물러났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요.”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단을 들고 있는 시종에게 눈짓을 주자, 시종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다른 시종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시종들은 그들의 몸보다 몇 배나 큰 문을 힘겹게 열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연회장을 본 엘리사는 작게 실소했다.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소박한 파티라는 거야?’
엘리사가 지금까지 참석한 파티 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참석한 파티라고 해봤자, 이름 모를 남작 부인의 생일 파티와 결혼식 피로연이 전부인지라 비교 대상이 적었지만, 하여간 그중에서 화려하기론 으뜸이었다. 설마 황녀가 손님들을 초대하는 자리를 두고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아마 그녀의 입장에선 이게 소박한 파티일 것이다.
‘하여간 황족들의 사치란.’
엘리사는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다. 워낙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데다가 부채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어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눈빛이나 표정만으로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건 알아챘다.
‘좋은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고위 귀족의 대부분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엘리사에게 친해지자며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엘리사와 친해지면 클라우드 공작가의 덕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 전부 그걸 노리는 것이다.
‘아, 에스타는 제외.’
에스타는 귀족 가문의 영애 중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엘리사에게 다가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녀가 더욱 애틋하고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에스타도 오늘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고 했는데, 아직 안 온 건가. 엘리사는 시종이 가져다 준 샴페인을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에스타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이제 곧 파티가 시작될 텐데 왜 아직 안 온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조금 더 기다려 보고 그때도 안 오면 한 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빈 샴페인 잔을 시종에게 건네주는데 입구에서 누군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음악 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섰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화려하게 치장한 마리아가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어 줄 시녀들을 대동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면서 황녀가 멈춰 서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에 마리아의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정말로 축하드려요. 이건 작지만 축하 선물입니다.”
“어머나, 고마워요.”
‘선물은 조금 있다가 줘야겠네.’
지금 갔다간 저 인파에 파묻힐 테니 엘리사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사람들이 빠지길 잠자코 기다렸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
그랬는데, 마리아가 먼저 다가왔다. 그녀의 주변을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서. 때문에 원치 않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엘리사는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겉으론 환하게 웃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고마워요. 이렇게 부인에게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마리아가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옅게 웃었다.
“하도 제 티파티 초대를 무시하길래, 이번 생일 파티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간 참석하지 않았던 거죠?”
시작부터 싸우자는 건가. 그나마 저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서 망정이지, 몰랐으면 영락없이 마리아의 페이스에 휘말렸을 것이다.
“송구합니다만, 황녀 전하. 저는 황녀 전하께서 절 티파티에 초대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초대장을 몇 번이나 보냈는데, 전혀 몰랐다고요?”
“네. 소공작님이 제게 말도 없이 황녀 전하께서 보낸 초대장을 전부 가져가셨거든요. 저도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 탓을 하려거든 칼베른을 탓해라. 그런 의미를 듬뿍 담아 말했더니 마리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자세히 얼굴을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찰나였기 때문에, 그 표정을 본 건 바로 앞에 있는 엘리사 뿐이었다.
“칼베른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요.”
마리아는 다시 소녀 같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땐 적응하는 데 오래 걸리는 법이니까요. 평생 적응 못 하는 사람도 수두룩하고요. 그런데 괜히 내보냈다가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이니, 칼베른이 그럴 만도 합니다. 이해해요.”
엘리사가 소공작 부인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 와중에 다 이해한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이 얄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콱 쥐어 박고 싶은 얼굴이라고나 할까.
“부디 하루라도 빨리 적응해서 다음에는 부인이 제가 여는 티파티에 참석할 수 있길 바랄게요.”
뒤에 ‘어차피 못 올 걸 알지만……’이라는 말이 생략된 비웃는 말이었다. 엘리사는 숨겨진 의미를 다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미 완벽하게 적응을 했으니, 언제든지 불러만 주세요.”
“어머, 벌써 적응을 다했다고요?”
“네. 저도 몰랐는데, 이 자리가 제 자리었나 봐요. 이제야 제 옷을 입은 기분이에요.”
방금까지 맞지 않는 옷을 운운하면 비아냥거렸는데, 엘리사는 이 옷이 제 옷이라고 말하니 할 말을 잃은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미처 감정을 숨기지 못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엘리사를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했다.
‘허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지.’
먼저 싸움을 걸어온 건 자신이 아니라 마리아였다. 자신은 괜히 얻어 맞고 싶지 않아 적절하게 맞대응을 했을 뿐인데, 그녀가 한 대 맞은 피해자인 것처럼 쳐다보는 게 웃겼다. 진짜 한 대 때리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황녀 전하, 여기서 이렇게 계시지 마시고 받은 선물들을 어서 풀어보세요.”
한 귀부인이 눈치를 살피며 마리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마리아의 외조모인 캠벌 후작 부인이었다. 캠벌 후작 부인은 어색하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마리아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갈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선물이라.”
마리아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소공작 부인에겐 아직 아무런 선물도 받지 않았네요. 설마 빈손으로 온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역시 선물을 준비해오길 잘했지. 안 해왔다면 여기서 또 물어 뜯겼을 것이다.
‘뭐, 어떤 선물을 내놔도 마음에 안 든다며 물어 뜯을 것 같은 기세지만…….’
이건 그렇게 못할 걸. 엘리사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선물을 내밀었다. 그 표정을 본 마리아가 미심쩍어 하며 선물 상자를 받았다.
“풀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마리아는 바로 선물 상자를 풀었다. 안에는 푸른색 보석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팔찌가 들어 있었다.
“소공작님이 황녀 전하께 같은 디자인의 목걸이를 생신 선물로 드렸는데 전하께서 무척 마음에 들어하셨다고 들었어요.”
“…….”
“그래서 저도 같은 디자인의 팔찌를 선물로 준비해봤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도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호기롭게 올라갔던 입술이 일직선을 그리며 비틀어졌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음에 안 든다고 까내리고 싶은데, 차마 하지 못하고 꾹 참으며 속앓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녀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준 선물과 세트였으니까. 게다가 주변에 칼베른이 준 목걸이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대놓고 그 목걸이를 차고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엘리사가 노린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나중에 이상한 선물을 가져왔다는 둥, 마리아가 괜한 험담을 하는 걸 막기 위해 준비한 건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무너진 마리아의 표정을 보니 통쾌하긴 했다. 이래서 마리아도 자신을 괴롭히며 무너진 표정을 보려고 하는 걸까?
“마음에 드시나요, 황녀 전하?”
“……그래요. 무척 마음에 드네요.”
억지로 끌어올린 입술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래도 연기 잘하는 편이었는데, 이런걸로 무너지다니.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나 보다.
“그럼 한 번 차보세요. 지금 차고 있는 목걸이와 한 세트잖아요. 잘 어울릴 겁니다.”
엘리사가 직접 채워줄 생각으로 손을 뻣자 마리아는 정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상자를 움켜쥔 손에 힘이 약간 들어갔다.
“지금은, 별로 차고 싶지가 않아요. 팔목이 아파서.”
허어, 팔찌도 못 찰 만큼 팔목이 아프면 부채는 어떻게 들고 다닌담?
“그러시군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지만, 그만큼 당황했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더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마리아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선물 상자를 뒤에 있는 시녀에게 넘겨주었다.
‘적당히 복수했으니, 슬슬 발을 빼볼까.’
더 했다간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슬쩍 물러나려는데 문득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목소리는 에스타였다. 보아하니 이제 도착한 모양이다.
‘황녀보다 늦게 도착하다니.’
이걸로 마리아가 질책한다고 해도 에스타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에스타는 자신의 보좌관이었다. 제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마리아라면 이걸 트집 잡아 에스타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있었다. 저 때문에 에스타가 상처 받을 걸 생각하니 걱정이 된 엘리사는 미간을 좁히며 에스타를 돌아봤다.
“……허?”
에스타를 본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쉬며 눈을 크게 껌뻑거렸다. 에스타는 문제의 버건디 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