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변화.2020.09.09.
칼베른은 테레사 부인을 비롯해서 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한 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 뒤를 엘리사와 에드윈이 따라왔지만, 집무실에 들어가는 걸 허락받은 건 엘리사뿐이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안쪽으로 들어간 칼베른과 달리 문 앞에 선 엘리사는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난 범인이 아니에요.”
칼베른이 느긋하게 외투를 벗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겠죠. 그 시간에 난 당신과 같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허, 저 뻔뻔한 모습이라니. 안 그래도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 때문에 몹시 화가 났는데, 칼베른의 뻔뻔한 태도를 보니 더욱 화가 나면서 속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요? 그 시간에 당신과 함께 있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왜 말 안 한 건데요!”
소리를 지를 생각은 없었다.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진다고,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다들 날 의심하고 있었어요.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당신이 그 한마디만 했더라면 바로 누명이 벗겨졌을 텐데 어째서……!”
“아까 말했을 텐데. 그곳에서 날 만난 건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비밀이라고.”
“하.”
엘리사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소공작님에겐 제 누명을 벗기는 일보다, 환락가에 간 걸 숨기는 게 더 중요한 모양이군요.”
옷걸이에 닿은 손이 멈칫 했다. 엘리사를 돌아본 칼베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긴요. 당신이 환락가 쪽으로 가는 걸 봤으니까 알았죠.”
사실 엘리사가 본 건 환락가 쪽으로 가는 칼베른의 모습이었다. 진짜 그가 환락가 안으로 들어간 건지, 아니면 그 근처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가다가 다른 곳으로 빠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진짜 간 모양이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면서 더욱 화가 났다. 그가 그의 알리바이를 공개하지 못하는 게 환락가에 간 걸 숨기기 위해서라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그래서, 대답은요. 내 누명을 벗기는 것보다 환락가에 간 걸 숨기는 게 더 중요해서, 그래서 말 안 한 거예요?”
칼베른에게 실망하긴 했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었다.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모두에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준다면 엘리사는 그를 용서해 줄 생각이 있었다.
“이번 일의 범인은 내가 반드시 찾아주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칼베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때까지 괴로워도 참아. 고모님 말고 그대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게 다 해결 될 거다.”
“……끝까지 먼저 나설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요.”
“그대가 조금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지는 길로 갈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정신이 멍해졌다. 칼베른이 이상한 말을 해서는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의 말은 구구절절 맞았다. 그가 범인만 잡는다면, 구태여 수치스러운 일을 드러내지 않아도 엘리사는 자연스럽게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누명을 벗게 되더라도 더 이상 당신은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엘리사가 칼베른이 자신의 누명을 벗겨줄 거라고 확신했던 건,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랑비에 옷깃이 젖는 걸 모르듯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를 믿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게 잘못됐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부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계약 결혼하긴 했지만, 마냥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보다 믿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계약한 이후 지금까지 지켜 본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우리 사이에 믿음이 필요했던가.”
……그렇게 생각했던 건 나뿐이었나. 돌아온 대답에 엘리사는 옅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아무래도 제가 잠시 착각하고 있었나 봐요.”
그를 믿었던 만큼 배신감과 실망감이 컸지만,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자신만 비참해질 뿐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조심할 테니 오늘 있었던 일은 잊어주세요.”
엘리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꼭 범인을 잡아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를 믿는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침묵을 유지한 채, 티끌만큼 남아 있던 믿음과 미련을 내려놓고 집무실을 나왔다. ****
“그분과 싸우신 모양이군요.”
엘리사가 나간 직후, 들어온 에드윈은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칼베른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칼베른은 이만 나가보라는 듯 손만 휘휘 내저었다. 에드윈은 나가지 않고 오히려 칼베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분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말에 칼베른은 에드윈을 올려다봤다. 보기 드물게 자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드윈은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제 아무리 소공작 부인이라고 하셔도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으면 아랫것들에게 윗사람으로서의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녀는 범인이 아니야.”
그제야 흘러나온 목소리가 날이 선 칼날처럼 매서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주춤했겠지만, 에드윈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그분께서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명이다. 누군가 그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누명을 씌운 거야.”
확신에 찬 대답에 에드윈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렇게 확신하는 까닭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범죄가 일어난 시간, 엘리사는 나와 함께 있었다.”
그 시각,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비밀이었지만 에드윈은 제외였다. 그도 함께 갔었으니까. 에드윈이 볼일을 보러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칼베른은 엘리사와 만난 거였다. 에드윈이 더욱 어리둥절하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그 말은 그 시각에 그분께서 암시장에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암시장에 있었다고 말하셨죠.”
에드윈은 자문자답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만나신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녀는 범인이 아니야.”
“그렇겠네요.”
에드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도대체 범인이 누굴까요? 누구길래 그런 짓을 하고 그분에게 누명을 씌운 걸까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볼 일이지.”
그래,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진범이 제 흔적을 지우고 도망치기 전에 알아봐야 했다. 엘리사한테 그러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래야 엘리사도 억울하게 쓴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난 어머니의 방으로 가서 조사해볼 테니, 에드윈, 넌 사용인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조사해 봐라. 분명 거짓말을 하는 놈이 있을 거다.”
반드시 범인을 찾아야 한다. 칼베른은 에드윈에게 명령을 내리고 훌쩍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에드윈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렸네.”
**** 곧장 침실로 돌아온 엘리사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걱정된 제르나 남작이 찾아왔지만, 만나지 않았다. 부친의 얼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보고 싶었지만, 그래서 피했다. 지금 그를 보면 왈칵 눈물을 흘릴 것 같았으니까.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데 제 걱정까지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범인을 찾아주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칼베른은 곧바로 범인 찾기에 나섰다. 에드윈의 지휘 아래 재조사가 시작됐고, 재조사를 시작한지 고작 두 시간 만에 진범이 잡혔다. 진범은 엘리사가 4층에서 내려올 때 만났던 그 하녀였다. 당시 하녀는 엘리사의 방에 훔친 보석과 범죄에 쓴 오르골을 몰래 숨겨두고 빠져나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4층에서 내려오는 엘리사를 보고 당황한 거였다. 왜 그런 짓을 했냐는 심문에 하녀의 대답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런 여자가 소공작 부인이라고 으스대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내쫓으려고 했어요! 소공작님의 손으로 직접 저 여자를 내쫓길 바라서 그랬습니다!”
그 말에 칼베른이 몹시 분노하며 직접 하녀를 처벌했다는 소식이 엘리사에게 전해졌다. 사용인들은 엘리사가 통쾌하다고 웃거나, 아니면 그런 놈이 다 있냐며 분개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엘리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폭풍우가 불어온 것처럼 복잡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사용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펑소와 똑같이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사와 칼베른의 하루 시작은 평소와 달랐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항상 함께 하던 아침 식사를 건너 뛴 건 물론, 엘리사는 아침 식사 이후 찾아온 꽃장수를 만나지 않았다.
“내일부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렴.”
게다가 저런 말까지 하니 사용인들은 칼베른과 엘리사가 싸운 게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대부분은 엘리사가 칼베른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낸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땐 정황 상 엘리사가 범인인 게 확실했다. 그런데도 칼베른은 끝까지 그녀를 믿고 진범을 찾아주었다.
“그런데 마님은 도대체 뭐가 불만이어서 소공작님께 화를 내신 걸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리고 말조심해. 소공작님이 그 일로 몹시 노여워 했으니까. 마님에 대해서 까딱 말 잘못하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갈 거야.”
그래, 그러니까 입조심 하자. 사용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폈다. 흔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었다. 게다가 엘리사와 칼베른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니, 냉전 관계가 금방 잠식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오래갔다. 나흘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티타임도 사라졌고, 굳게 닫힌 부부 침실의 문은 열릴 줄 몰랐다. 두 사람의 관계가 걱정이 된 헤리엇이 제르나 남작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곤란하다는 듯 웃기만 할 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처럼 항상 화사했던 꽃들이 하나둘씩 시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든 건 집무실에 있는 꽃이었다. 하녀는 재깍 시든 꽃들을 치웠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침실에 있는 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그 꽃마저 시들었다. 하녀가 꽃병 째로 치우려고 하자 칼베른이 붙잡았다.
“그건 내버려둬.”
“하지만 이건 시든 꽃인데…….”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으니까 내버려둬.”
하녀는 의아해하면서도 칼베른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결국 꽃이 완전히 시들면서 마른 꽃잎이 다 떨어졌다. 앙상하게 남은 꽃줄기는 굉장히 볼품없었지만 칼베른은 몬스터 토벌을 하러 떠나는 그날까지 그 꽃을 버리지 않았다.
**** 이른 아침, 클라우드 공작가는 분주했다. 칼베른이 몬스터 토벌을 떠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용인들은 저마다 해야 할일을 빠르게 끝내고 홀에 모였다. 테레사 부인도 칼베른을 배웅하기 위해 홀에 나타났지만 엘리사는 보이지 않았다. 떠날 준비를 마친 칼베른이 홀로 내려올 때까지 엘리사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오늘도 나오지 않는 걸까. 사용인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그 아이, 아무리 싸웠다하기로서니 오늘 같은 날도 안 나온다니?”
테레사 부인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칼베른은 에드윈에게 가방을 넘겨 받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고모님.”
“이 상황에서도 그 아이를 두둔하는 거니? 참 대단한 사랑이구나.”
테레사 부인이 비아냥거렸지만 칼베른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돌아섰다. 그때, 계단 위쪽에서 또각, 높은 굽소리가 들렸다. 엘리사였다. 평소와 달리 화려하게 차려 입은 그녀는 제르나 남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들이 홀로 내려오자 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엘리사는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칼베른 앞으로 다가왔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그동안 칼베른과 냉전 상태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산뜻한 목소리였다. 얼굴에 그린 미소 역시 밝았다.
“이거.”
하지만 칼베른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본 건 칼베른과 에드윈 뿐이었다. 칼베른은 약간 긴장하며 엘리사가 내민 걸 받았다. 그건 지금 그가 입은 바지와 잘 어울리는 벨트였다. 벨트의 한쪽 면에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노력하긴 했는데, 자수를 놓아본 적이 없어서 여전히 볼품없네요.”
초승달처럼 휜 눈매는 예뻤지만, 그 안에 든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한줌의 온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제 마음이니 좋게 봐주세요.”
“……그래.”
“그럼 무사히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다리겠다는 말이 이렇게 섬뜩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서걱거렸다. 칼베른은 엘리사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제국의 상징인 포효하는 사자 그림이 그려진 깃발을 건 몬스터 토벌 부대가 칼베른을 선두로 위풍당당하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