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3)2020.09.05.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에 있을 호위 기사들에게 말을 전해 줄 사람이 필요한 엘리사는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사용인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사용인이 보이지 않았다. 2층과 3층을 전부 둘러봤지만, 엘리사는 사용인들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전부 다 어디 간…… 아, 별관 대청소하러 갔겠구나.”
그렇다고 해도 너무 없는데. 설마 전부 다 별관 대청소를 하러 갔을 리는 없고. 이상하고 찝찝했다.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4층만 확인해보고 거기에도 없으면 별관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소공작 부인인 엘리사가 클라우드 공작저에서 가지 못할 곳은 없었지만 4층은 예외였다. 그곳은 클라우드 공작 부부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4층 동쪽 복도는 돌아가신 클라우드 공작 부인의 추억이 담긴 공간이기 때문에 폐쇄되어 있었다. 엘리사는 물론 칼베른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고 했다. 사용인 중에도 하녀장인 안네케와 전담 하녀, 하인 각각 한 명씩을 제외하고 다른 사용인들은 드나들 수가 없었다. 서쪽 복도는 클라우드 공작의 공간으로, 이곳은 공작의 허락 없이 절대 드나들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가지 않는 게 좋았다. 주인이 없다면 더더욱. 그러니 엘리사는 4층 계단 입구 앞에 서서 아무도 없는지 쓱 훑어보고 바로 내려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4층에도 사용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별관에 가봐야지. 엘리사가 그리 생각하며 4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마님?”
계단 아래쪽, 3층 계단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사용인을 만났다는 사실에 엘리사는 무척 반가워하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하녀가 약간 당황스러워하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외출하신 거 아니셨나요?”
“아, 방금 돌아왔어.”
하녀의 뒤로 커다란 괘종시계가 보였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50분. 호위 기사들이 자신이 없어진 걸 알아채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주소를 알려줄 테니 여기로 사람을 보내서 호위 기사들 좀 데리고 와줄래?”
“호위 기사님들이요?”
“응. 사정이 있어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거든. 그러니까 돌아와 달라고 말해줘.”
하녀는 약간 떨떠름해 하면서도 엘리사가 말해 준 주소를 귀담아듣고 사라졌다.
‘호위 기사들이 돌아오면 경비 단장한테 보고하겠지?’
내가 제멋대로 사라져서 공작저로 돌아왔다고 말이야. 그럼 경비 단장은 단걸음에 달려와 약속이 틀리지 않냐며 뭐라고 할 게 분명했다. 그때 뭐라고 변명하는 게 좋으려나. 암시장에 갔다고는 말 못하는데.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적당한 핑곗거리를 고민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쁘게 돌아다닌 탓에 피곤했던 모양이다.
“마님, 마님!”
깜빡 잠이 든 엘리사를 깨운 건 호들갑스러운 하녀의 목소리였다.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몸을 뒤흔드는 손길에 엘리사는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말아 올렸다. 어설프게 잠을 자서 그런지 몸이 더욱 무거웠다.
“저택에 도둑이 든 것 같습니다!”
“뭐?”
잠에 취한 눈을 비비던 엘리사는 저택에 도둑이 들었다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도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돌아가신 공작부인의 방이 털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공작부인의 방을 청소하던 티나가 습격을 당했고요.”
세상에, 공작부인의 방을 도둑질한 것으로도 모자라 하녀를 습격했다니. 남아 있던 잠이 모조리 달아났다. 엘리사는 기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경비 단장은?”
“지금 홀에 있습니다. 사용인들도 전부 모여 있습니다.”
“소공작님은 안 돌아오셨어?”
“네.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설마 오늘도 외박하는 건가. 환락가에 갔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환락가는 이제 한창 영업을 활발하게 할 시간이었으니까.
“일단 홀로 가자.”
엘리사는 흐트러진 옷과 머리를 정리하고 홀로 내려갔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전부 홀에 모여 있다 보니 홀이 북적거렸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은 엘리사가 등장하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은 정적이 약간은 소름 끼쳤다. 엘리사는 닭살이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안네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래요?”
하녀에게 대충 상황 설명은 들었지만,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안네케가 잔뜩 그늘진 얼굴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4층 동쪽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돌아가신 큰 마님의 방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티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큰 마님의 방을 청소하러 갔다가 방을 털고 있던 도둑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 기절했습니다. 그리고 공작부인께서 생전 쓰시던 물건들도 사라졌고요.”
“그 외 다른 곳은 피해 본 곳이 없나요?”
“네.”
안네케에게 자세히 들어도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아무래도 그 티나라는 하녀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그녀를 찾았다.
“그 하녀는 지금 어디 있죠?”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그럼 아직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설명은 전혀 못 들었겠네요?”
“네. 물어보긴 했지만, 범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하녀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도둑이 든 걸 말한 건가요?”
“아닙니다. 티나가 청소하러 간 지 2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길래 이상해서 제가 찾으러 갔다가 기절해 있는 티나를 발견한 겁니다.”
“내부인의 소행일 거다.”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에 엘리사는 그쪽을 돌아봤다. 언제 온 건지 알 수 없는 테레사 부인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부인이 아니고서야 다른 곳을 두고 하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4층 공작부인의 방을 털었을 리가 없어.”
“저도 동감합니다, 마님.”
경비 단장이 테레사 부인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당시 경비를 서고 있던 자들에게 물어봤는데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거, 정말 제대로 경비를 본 거 맞나요?”
“네?”
“제가 4시 반쯤 사용인들이 주로 쓰는 후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경비 같은 건 없었는데요.”
엘리사의 말에 경비 단장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경비들을 쳐다봤다. 경비들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했다.
“4, 4시 반이라면 저희가 교대할 시간이라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 같습니다.”
“거, 거기다 하필 그 후문 쪽을 지키던 애가 배탈이 나서 좀 더 일찍 자리를 뜨는 바람에…….”
“그래도 제대로 지켰어야지! 그러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경비 단장의 목소리가 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경비들은 물론 사용인들도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었다. 경비 단장은 화가 들끓는 숨을 크게 토해내더니 엘리사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밑에 아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아니에요. 그 문제야 앞으로 조심하면 될 일이고, 지금은 범인을 잡는 게 우선이니 거기에 집중하도록 하죠.”
이걸로 내가 호위 기사를 두고 몰래 빠져나간 것에 대해선 뭐라고 못 하겠지.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 같아 조급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경비 문제와 별개로 저 역시 내부인의 소행이라고 생각은 해요. 만약 외부인이었다면 공작부인의 방만 터는 게 아니라 다른 곳도 털었겠죠.”
그런데 공작부인의 방만 털렸다는 건, 그곳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는다는 걸 도둑이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안네케, 그 하녀는 항상 같은 시간에 공작부인의 방을 청소했나요?”
“네.”
“그럼 내부인 중에도 공작가의 사정을 잘 모르는 내부인일 겁니다. 만약 잘 아는 내부인이었다면, 그 하녀가 공작부인의 방을 청소하러 가는 시간을 피해서 도둑질을 했겠죠.”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비교적 최근 공작가에 들어온 사용인부터 시작해서 알리바이 조사와 방을 수색했다. 훔친 보석을 팔기엔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 아직 범인이 들고 있을 터. 하지만 사용인의 방을 전부 다 뒤져봐도 사라진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다들 알리바이도 완벽했다. 사용인 중에 범인이 없다면 외부인의 소행일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테레사 부인이 또 끼어들었다.
“아직 조사 안 한 곳이 있지 않나?”
안네케가 테레사 부인에게 공손하게 되물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부인.”
“그야 당연히 우리 작은 마님과 작은 마님의 부친 방이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엘리사에게 향했다. 경비 단장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엘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저와 아버지 의심하는 건가요, 테레사 부인?”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모두를 의심하다 보니 자네가 끼어 있는 거지.”
“…….”
“의심받는 게 싫으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면 되잖아?”
알리바이를 공개하고 방 수색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방수색을 받는 건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알리바이였다. 티나가 범인으로부터 습격을 받았을 때, 엘리사는 칼베른과 함께 암시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이 없었다. 엘리사가 침묵하자 테레사 부인이 미묘하게 웃으며 경비 단장을 돌아봤다.
“우리 작은 마님을 호위했던 기사들은 어디 있지?”
“벌을 받는 중입니다.”
“무슨 벌?”
“그게…… 마님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입니다.”
기사단장이 엘리사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님이 중간에 사라지셨다가 홀연히 공작저에 나타나셔서…….”
“어머나, 호위 기사들을 따돌리고 어딜 갔던 걸까?”
몹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얼굴이 얄미웠다. 암시장에 간 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때.
“제 딸은 아닙니다.”
제르나 남작이 등장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 소란을 듣고 나온 것이었다.
“엘리사는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테레사 부인.”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방 수색을 받으세요.”
“그럼 테레사 부인께서도 받는 겁니까?”
제르나 남작아 되묻자 테레사 부인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저 모두를 의심하다 보니 부인께서 끼어 계신 겁니다.”
제르나 남작은 테레사 부인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때문에 테레사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었다. 그 모습이 몹시 통쾌했지만, 엘리사는 웃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알리바이가 걸렸기 때문이다. 경비 단장의 잔소리를 피해서 좋아했는데, 더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야말로 한 너머 산이었다.
“좋아요. 방 수색을 받도록 하죠.”
일단 방 수색을 받으면서 시간을 벌자. 그리 생각하며 엘리사는 방 수색을 허락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상에!”
“어, 어쩜 이런 일이……!”
바로 엘리사의 방에서 사라진 보석들과 범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피가 묻은 오르골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저게 왜 내 방에? 엘리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라고,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한 하녀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마님이 4층에서 내려오는 걸 봤는데……!”
그 말에 사용인들은 더욱 웅성거리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테레사 부인은 그것보라는 듯 비웃었고, 제르나 남작은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아, 니에요.”
쏟아지는 시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엘리사는 고개를 크게 저으며 소리쳤다.
“전 아니에요! 난 하지 않았어! 그 시간에 암시장에 있었다고요!”
암시장에 간 건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엘리사의 말에 사람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가장 앞에 있던 테레사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정말입니다! 정말로 암시장에 있었어요!”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은 있니?”
당연히 있었다. 그것도 여기서 가장 신분이 확실하고 신뢰성이 높은 사람이 증인이었지만 엘리사는 그의 이름을 말할 수가 없었다. 칼베른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만난 걸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내가 범인으로 몰릴 텐데.’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면……. 두 손을 꼭 마주 쥔 채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모여 있는 거지?”
그 사이를 칼베른이 유유히 걸어왔다. 그 뒤에 에드윈도 보였다.
“칼베른!”
테레사 부인은 칼베른을 보자마자 세상 무너진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네가 없는 사이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 뭐니.”
“끔찍한 일이요?”
“그래. 세상에, 저 아이가…….”
테레사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칼베른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엘리사가 누명을 벗을 방법은 칼베른이 알리바이를 증명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호위 기사들을 따돌리고 혼자서 암시장에 간 거로 질타받겠지만 상관없었다. 범인으로 몰리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증인이 되어주겠지?’
환락가에 간 게 들키고 싶지 않다고 해도 아내가 누명을 쓰고 범인으로 몰렸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이름뿐인, 계약 관계일지라도 저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겠습니다, 고모님. 이 부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고모님께선 일단 진정하시고 별관으로 돌아가 주시죠.”
칼베른은 끝까지 엘리사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