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2)2020.09.02.
엘리사는 고개를 휙 돌려 제 손 위에 포갠 커다란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상대는 얼굴의 반 이상이 보이지 않게 로브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툭 튀어나온 성대와 커다란 손 등 다른 걸 보고 남자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잡았는데, 손 떼시죠?”
싱긋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건만 남자는 좀처럼 손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사의 손 위에 포갠 손에 힘을 주며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럼 욕먹어야지. 쓰게 한 소리 하려는데, 엉뚱한 곳에서 거친 언성이 먼저 터져 나왔다. 카딘이었다.
“둘 다 손 놔! 내 거야!”
카딘이 파리채를 휘두르며 소리쳤지만 엘리사도, 남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놓으라니까아악!”
“저한테 말하지 말고 이 남자한테 말해요. 이 남자가 안 놓는데, 제가 어떻게 손을 놔요?”
엘리사는 차분하게 따졌다.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카딘이 눈을 휙 치켜들어 올리며 남자를 노려봤다. 매부리코에서 거친 콧바람에 뿜어져 나왔다.
“당장 그 손 치우게!”
“…….”
“치우라니까! 아니면 흠씬 두들겨 때려줄 거야!”
카딘이 들고 있던 파리채까지 휘두르며 협박하자 남자가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로브가 흔들리면서 흰색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다. 자연스럽게 엘리사의 손등에 올리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지금이 기회다. 엘리사는 재빠르게 남자에게 깔린 손을 빼냈다. 물론 인어의 눈물은 여전히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제가 살게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대충 돈을 꺼내 가판대 위에 올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뒤로 카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다행히도 쫓아오지 않았다. 그 남자 역시. 그 남자는 그렇다 쳐도 카딘은 쫓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만큼 카딘의 성격은 더럽기로 유명했으니까.
“아, 미친.”
단순히 운이 좋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려 10골드나 지급했으니 쫓아오지 않은 것이다. 인어의 눈물이 귀하긴 해도 비싸 봐야 4골드였다. 그런데 10골드나 지급하다니. 평범한 가게였다면 돌아가서 환불해달라고 하겠지만, 암시장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환불하면 그 남자가 좋다구나 사갈 테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적선했다고 치자.”
하필 그런 놈에게 적선한 건 기분이 나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엘리사가 인어의 눈물을 구한 것에 만족하며 돌아섰을 때였다.
“어?”
골목길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칼베른이었다. 그도 로브를 푹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순간 보이는 자색 눈동자와 흑발을 보고 엘리사는 그가 칼베른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봤다. 흑발과 자색 눈동자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그가 왜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난 엘리사는 당황하며 칼베른을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칼베른이 엘리사 쪽을 돌아봤다. 곧 엘리사를 발견한 칼베른이 멈칫했다. 그런 그를 향해 어색하게 인사하려던 엘리사는 자신이 몰래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미쳤구나, 엘리사.’
도망쳐도 모자랄 판국에 인사하려고 하다니. 인어의 눈물을 2배나 비싸게 주고 샀다는 사실에 잠시 정신을 놓은 게 분명했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당장 다가와 제게 화를 내거나 혹은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칼베른은 그러지 않았다.
“…….”
마치 엘리사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깔끔하게 무시하고 골목길 안쪽으로 사라졌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엘리사는 칼베른이 사라진 방향이 어딘지 떠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쪽은 환락가인데……?”
진짜 어젯밤에 일을 한 게 아니라 환락가에 갔던 거였어? 그래서 얼굴이 평소보다 말끔했던 거고? 아, 혹시 날 모른 척 한 것도 환락가에 간 걸 숨기기 위해서인가? 정황상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다면 저쪽 골목으로 갈 게 아니라 차라리 암시장으로 들어가지. 그럼 환락가에 간 걸 아예 들키지 않았을 텐데.
“보기보다 허술한 사람이네.”
엄청 꼼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이런 곳에서 자신을 만났다는 것에 너무 당황해서 미처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거나. 어쨌거나 그런 이유라면 칼베른은 엘리사를 이곳에서 만난 걸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지 않을 터.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나중에 돌아오면 슬쩍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사는 말 보관소 쪽으로 걸어갔지만, 근처도 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이봐, 아가씨. 우리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험상궂은 남자 둘이 앞뒤로 길을 막은 탓이었다. 그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말했다.
“아까 아가씨가 사 가지고 간 물건, 우리에게 넘겨줘야겠는데.”
“내가 왜 그걸 너희들한테 넘겨줘야 하는데?”
엘리사의 당돌한 대답에 남자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뼈 소리를 냈다.
“이거야 원, 말로만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먼.”
그러면서 엘리사 쪽으로 다가왔다. 보아하니 그녀를 붙잡은 생각인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엘리사는 슬쩍 몸을 뒤로 빼서 남자를 피했다. 어디서 누가 보낸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바로 엘리사는 평범한 귀족 영애들과 다르다는 것. 엘리사는 어릴 때부터 연금술 재료를 직접 구하기 위해 산과 들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덕분에 체력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자신이 있었다. 또래 남자들보다 달리기도 빨랐다. 게다가 언젠가 연금술 공부를 하기 위해 대륙을 여행할 때,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친구인 닉에게 호신술도 조금 배워두었다.
“컥!”
그래도 상대가 실력 있는 놈이었다면 통하지 않았을 텐데, 다행히 남자들은 형편없는 건달이었다. 가뿐하게 두 명을 제압한 엘리사가 의기양양하게 웃는 그때, 다른 동료가 있었는지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엘리사를 향해 각목을 휘둘렀다.
“……!”
다행히 기습 공격을 눈치 챈 엘리사는 재빠르게 몸을 굴려 피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어지는 다음 공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높이 번쩍 든 각목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맞는다!’
엘리사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서 눈을 질끈 감고, 팔로 머리를 감싼 뒤, 몸을 웅크렸다. 그러면서 이 다음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뒤늦게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멈췄을 리는 없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엘리사는 슬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만큼 장신의 인영이었다. 흔들리는 로브자락이 눈에 익었다. 인영은 한손에 검을 들고 있었고, 엘리사에게 각목을 휘둘렀던 남자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더 싸울 건가?”
나지막하게 깔린 목소리가 익숙했다. 살기 어린 질문에 엘리사에게 각목을 휘두르려고 했던 남자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럼 전 이만.”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엘리사에게 당했던 다른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인영은 엘리사를 돌아봤다. 꾹 눌러 쓰고 있던 로브를 약간 들어올리자 흑발에 자색 눈동자가 보였다. 칼베른이었다.
“날 봐도 놀라지 않는 군.”
“익숙한 목소리였으니까요.”
아까 보기도 했고. 환락가에 간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온 건가.
“호위 기사들이 보이지 않는 걸 봐서 몰래 빠져 나온 모양이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인어의 눈물을 사야 하는데, 암시장에 가자고 하면 호위 기사들이 위험하다고 반대할 테니까요.”
“이렇게 위험한 장소에 호위 기사도 없이 혼자 온 게 자랑인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위험한 장소도 갔을 거예요.”
설령 그곳이 지옥일지라도 제르나 남작을 살릴 수만 있다면 뛰어들었을 것이다. 엘리사가 지지 않고 받아치자 칼베른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검집에 검을 넣었다.
“다음부터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나서지 말고 사용인들을 시켜.”
“하지만 그들은 재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재주가…….”
“…….”
“……없겠지만 그래도 시키겠습니다, 하하.”
쏟아지는 살벌한 시선에 엘리사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럴 생각은 쥐똥만큼도 없었지만, 계속 고집을 부렸다간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그런 것이다.
“데려다주지.”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또 그런 놈들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위험하니까 공작저까지 데려다주지.”
“음, 전 공작저가 아니라 원래 살던 곳으로 가야 해요. 그곳에서 호위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 말에 칼베른의 표정이 또 한 번 구겨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엘리사에게 물었다.
“그대가 원래 살던 집은 17번 거리에 있었지?”
“네, 맞아요.”
“그곳은 안 돼.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니 공작저로 돌아가도록.”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공작저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칼베른의 뜻은 확고했다.
“그대가 원래 살던 집에 있는 호위 기사들은 공작저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내 부르도록.”
“그럼 제가 몰래 빠져나온 게 들키지 않을까요?”
“이미 나한테 들켰잖아.”
그건……그렇지.
“그러니 군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 칼베른이 말 보관소에서 찾아온 말은 자주 타고 다니던 흑마가 아닌 평범한 갈색 말이었다.
“레모드 님 맞으시죠?”
게다가 생판 처음 듣는 가명에 로브까지 꾹 눌러 쓴 걸 보아 칼베른은 어떻게든 정체를 숨기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뭐해. 눈동자랑 머리카락 색을 보면 바로 알아보는데.’
검은 머리칼과 자색 눈동자가 클라우드 공작가의 특징이라는 건 세 살배기도 아는 사실이었다. 로브를 꾹 눌러 쓰면 그 두 가지가 잘 보이지 않지만, 아까처럼 로브가 살짝 벗겨지거나 하면 바로 들통났다.
“정체를 숨기고 싶으면 머리색을 바꾸는 건 어때요?”
눈동자색은 바꿀 수 없지만, 머리색은 마법 염색약을 쓰면 일정 시간 동안 바꿀 수 있었다.
“그럼 당신이 클라우드 공작가의 소공작이라는 게 들킬 위험이 줄어들 것 같은데요.”
“마법 염색약이라면 이미 썼어.”
“아, 그럼 지금은 대기 시간이라는 거네요?”
인위적으로 신체 일부를 바꾸는 마법 약은 효과가 끝나는 즉시 다시 사용할 경우,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일정 시간 대기한 후에 다시 사용해야 했다. 보통 대기 시간은 하루 정도니까 어제 마법 약을 사용했다는 의미인데, 설마 일하면서 머리카락 색을 바꿨을 리는 없고 역시 어제도 환락가에 온 모양이다.
‘어제 왔는데 또 환락가에 오다니.’
성욕이 왕성하네. 엘리사는 문득 칼베른이 자신과 결혼한 뒤, 몇 번이나 환락가를 찾았을지 궁금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암시장에서 공작저로 가는 길은 아닌데? 게다가 칼베른은 말이 다니기 좋은 큰일이 아닌 인기척이 드문 골목길로만 다녔다. 그 와중에 누군가 지나가면 로브를 고쳐 눌러쓰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제 정체를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이.
‘왜 이러는 거지?’
그런 칼베른의 행동이 이상하기만 한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그가 왜 이러는지 알아채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지금 칼베른은 환락가에 간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이러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환락가에 간 게 이렇게 조심해야 할 일인가?’
물론 클라우드 공작가의 소공작인 칼베른이 환락가에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떠돈다면 사교계가 들썩거리는 건 물론, 엘리사와 칼베른의 불화설도 같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엘리사와 칼베른이 연애결혼을 했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어댈 게 분명했다. 이게 기회다 싶어 칼베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도 있을 테고. 그걸 생각하면 지금 칼베른의 행동은 바람직했지만, 그래도 과한 느낌이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이유가 뭘까. 엘리사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클라우드 공작가에 도착했다. 칼베른은 공작저 정문이 아닌 후문, 그것도 하인들이 자주 쓰는 문 근처 골목길에 멈췄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엘리사를 내려주고 신신당부했다.
“정문으로 들어가든, 후문으로 들어가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 나와 만난 걸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
“네, 그럴게요.”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엘리사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불안한지 칼베른은 몇 번 더 당부한 뒤, 홀연히 떠났다. 여전히 큰 길이 아닌 좁은 골목길 쪽으로 사라졌다. 엘리사는 점점 멀어지는 칼베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공작저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으로 갈까 싶다가도, 그러려면 긴 담벼락을 돌아서 가야 하니 그냥 후문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후문 중에서도 사용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공작저로 들어가는 입구 중 하나인 만큼 경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게 맞건만, 이상할 정도로 허술했다. 후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허어,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엘리사는 나중에 칼베른이 돌아오면 경비를 강화하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저택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