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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왜 옷을 벗어요! (10/156)

10화. 왜 옷을 벗어요!2020.08.05.

하녀가 가져온 잠옷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이 훤히 비쳤다. 레이스는 얼마나 많은지, 보고만 있어도 질릴 정도였다.

“지금 그걸 나보고 입으라는 거야?”

엘리사가 기함하며 묻자 하녀가 공손히 허리 숙여 대답했다.

“첫날밤에는 이런 잠옷을 입는 게 유행입니다, 마님.”

“첫날……밤?”

그러고 보니 오늘 결혼을 했으니까 첫날밤을 치르겠구나. 잠시 잊고 있었던, 어쩌면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차마 입은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민망한 잠옷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부끄러웠다. 그런 엘리사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하녀가 잠옷을 좀 더 가까이 가져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잠옷은 단추가 여기 하나밖에 없어서 벗기기도 쉽습니다.”

벗, 기기도 쉽다고?

“굳이 벗기지 않아도 즐기실 수 있게 아래쪽의 품이 넉넉…….”

“그만!”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하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록 경험은 없지만, 주변에서 들은 게 많은 터라 하녀가 말하려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어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까 그래서 아빠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구나!’

한마디로 제르나 남작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는 의미. 그 사실이 몹시 민망한 엘리사는 손부채질하며 얼굴에 몰린 열을 식혔다.

“그럼 옷을 갈아입으시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마님.”

“아니, 괜찮아!”

엘리사는 격하게 두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저 잠옷으로 갈아입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하지만 잠옷으로 갈아입으셔야 부부 침실에 가실 텐데…….”

부부 침실이라는 말조차 야릇하게 들리는 건 다 저 잠옷 때문이었다. 오늘이 첫날밤이라는 것도 한몫했고. 엘리사는 잠옷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훽 돌리며 말했다.

“다른 잠옷을 가져와.”

첫날밤인 만큼 부부 침실에 가는 건 피할 수 없으니, 저 잠옷이라도 피해야 했다.

“이렇게 속이 다 비치는 잠옷 말고 단정하고, 정숙해 보이는 잠옷으로!”

“그럼 유행에 뒤처질 수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누가 내 잠옷 차림을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하녀들과 칼베른이 보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예외였다.

“그리고 소공작님은 정숙한 옷을 좋아해. 이런 야한 옷이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엘리사는 칼베른의 취향이 어떤지 전혀 몰랐지만, 하녀를 움직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칼베른을 팔았다. 칼베른이 거론되자 하녀는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새로운 잠옷을 가져왔다. 엘리사가 원하는 정숙한 잠옷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것이지.’

엘리사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부부 침실로 향했다. 부부 침실은 첫날밤에 걸맞게 꾸며져 있었다. 은은하게 침실을 밝히는 촛불과 침대와 그 주변에 뿌려져 있는 장미 꽃잎.

“세상에, 미향도 뿌렸잖아?”

엘리사는 인상을 쓰며 코를 틀어막았다. 어찌나 미향을 많이 뿌려놓은 건지 잠깐 들어와 있었는 데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코를 틀어막는 것만으론 안 될 것 같아 창문을 열었다. 바깥바람을 쐬니 아찔하게 번졌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동시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자각한 엘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 일도 없겠지?’

칼베른은 엘리사와 계약서를 쓸 때 분명 말했었다. 아이를 만들 생각이 없다고. 그 말인즉, 잠자리할 생각도 없다는 의미이니 아무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미향에 흥분해서 짐승처럼 덤벼들지도.

“미쳤어.”

그럼 그 부분을 확 차버리라고 다짐하며 엘리사는 창밖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방을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환기가 거의 다 끝났을 때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의 어깨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사는 녹슨 수레바퀴처럼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여전히 예복 차림인 칼베른이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뒤로 왜인지 눈을 반달처럼 웃고 있는 총괄 집사, 헤리엇도 있었다.

“두 분, 좋은 밤 보내십시오.”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헤리엇은 허리 깊이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스럽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엘리사와 칼베른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정확히는 엘리사 혼자 어색해하는 거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아니, 말이 필요하긴 하나?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자면 되는데. 물론 아무 짓도 안 하고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거였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는 게 오점이긴 하지만, 장정 서너 명이 굴러다녀도 될 만큼 넓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아, 방이 좀 더워서 환기를 시키고 있었어요.”

미향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그 부분은 숨기고 창문을 닫았다.

“잠옷으로 안 갈아입으셨네요.”

그리고 또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막기 위해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칼베른이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원래 첫날밤에는 아내가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는 게 관습이라며 그냥 가라더군.”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그런 관습을 만든 거야. 엘리사는 속으로 경악했다. 칼베른의 옷을 갈아입혀 준다는 건 그의 속살을 본다는 의미였으니 소리 없는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엘리사의 표정을 본 칼베른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경악할 필요는 없어. 그대에게 갈아입혀 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 하하하…….”

엘리사는 속마음이 들키자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약간 멋쩍긴 했지만, 대놓고 말해주니 안심이 되긴 했다.

“근데 이 방에는 잠옷이 없는데요.”

엘리사가 방을 쭐레쭐레 둘러보며 말하자 칼베른이 검지로 침대를 가리켰다.

“저기 있군.”

“아, 그렇네요.”

엘리사는 뒤늦게 붉은 장미 꽃잎에 반쯤 덮여 있는 잠옷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옷은 갈아입혀 주지 못해도 잠옷을 그가 있는 곳까지 가져다줄 생각은 있었다. 준비된 잠옷은 엘리사가 입은 잠옷과 한 쌍이었다. 변덕으로 바꾼 잠옷인데, 이것도 한 쌍으로 준비해두다니. 엘리사는 사용인들의 철저한 준비성에 혀를 내두르며 잠옷을 집어 들었다.

“헉.”

그대로 고개를 돌린 엘리사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는 칼베른을 발견하고 헛바람을 삼켰다. 이미 반 이상 풀린 셔츠 사이로 근육으로 다져진 맨가슴이 드러났다. 생각지 못한 살갗의 향연에 엘리사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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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옷을 벗어요!”

칼베른은 그런 엘리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럼 이 위에 잠옷을 입을까?”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했는지 깨달은 엘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까지야.”

칼베른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잠옷을 달라는 손짓이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잠옷을 넘겨주자마자 돌아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그가 옷을 다 갈아입길 기다렸다. 사라락,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적나라케 귀에 꽂혔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잘 들리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저 소리들이 이상하게 들리는 건 전부 첫날밤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저 남자는 내 몸에 손 대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만약 아니라면 그땐…….

“으악!”

문득 칼베른과 뜨거운 밤을 보내는 제 모습을 상상한 엘리사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산에서 분출한 마그마처럼 뜨거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엘리사의 이상 행동에 칼베른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

“으악!”

열이 오른 몸에 닿는 차가운 손길에 엘리사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면서 푸드덕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벌겋게 달아오른 엘리사의 얼굴을 본 칼베른이 가볍게 웃었다.

“이상한 상상을 한 모양이군.”

“아, 아닌데요!”

정곡이었으나 인정하면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되니 엘리사는 목청 높여 부정했다.

“거짓말을 하는 군.”

하지만 칼베른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기대했으면 솔직하게 기대했다고 말해도 좋아.”

“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기대 같은 거 전혀 안 했어요!”

이상한 상상을 안 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지금 한 대답은 사실이었다. 기대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전 기대 같은거 조금도,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혹 칼베른이 이상한 오해를 할 새라 엘리사는 두 손을 휘휘 저어가며 변명했다. 칼베른은 그런 엘리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진정해.”

‘네가 너무 부정하니까 믿어주는 척 한다.’라는 뉘앙스가 강한 말이었다. 진짜 아닌데. 엘리사는 억울했지만, 더 이야기를 꺼내봤자 자신만 휘말리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깨에 닿은 칼베른의 손도 무척 신경이 쓰였다. 아까 잠시 맡았던 미향 때문인지 생각도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아, 피곤하네요!”

이러다 자신이 먼저 칼베른을 덮칠 것 같아 엘리사는 후다닥 떨어졌다.

“이만 자야겠어요! 잘자요!”

그리고 빠르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두꺼운 이불 안에 엘리사가 뱉은 숨이 흐드러졌다.

‘이제 저 남자도 내 옆에 눕겠지?’

그걸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갈비뼈를 뚫고 밖으로 뛰쳐 나올 것만 같았다. 엘리사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칼베른은 엘리사의 옆에 눕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혹시 누울지 말지 고민하는 건가? 엘리사는 이불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칼베른을 쳐다봤다. 그는 길고 푹신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왜 거기 누워 있어요?”

“그럼? 그대의 옆에 누우라는 건가?”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침대가 하나 밖에 없으니까, 잠잘 곳이 여기 밖에 없잖아요.”

엘리사는 차마 ‘그래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이러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져서 입을 다물었다. 어디가서 말 못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저 남자 앞에만 서면 생각대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하여간 침대가 하나고, 넓으니까 여기 와서 누워요.”

엘리사는 잠깐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할 말을 정리하고 그대로 뱉었다.

“싫어.”

기껏 용기내서 한 말인데 칼베른은 칼 같이 거절했다. 이에 약간 욱한 엘리사는 이불을 완전히 젖히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럼 그 소파에서 자겠다는 건가요?”

“그래.”

“혹시 제가 불편해서 그런 거라면 제가 소파에서 잘 테니 침대 와서 자요.”

엘리사가 완전히 일어서려고 하자 칼베른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대가 불편해서가 아닌 누가 옆에 있으면 못 자는 성격이라 그런 거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럼 역시 제가 소파에…….”

“난 소파에서도 잘 자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

칼베른은 어서 자라고 손짓한 뒤, 눈을 감았다. 굳이 그러겠다는데, 억지로 끌어낼 수는 없으니 엘리사도 엉거주춤 다시 누웠다. 침대는 몹시 푹신했고, 베개는 편했으며, 이불은 보드랍고 따뜻했지만 전혀 편하지 않았다. 전부 소파에 누워 있는 저 남자 때문이었다.

‘신경 쓰여서 편하게 자지도 못하겠네.’

역시 내가 소파에서 자는 게 나은데. 엘리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눈을 감았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할 생각이었는데 웬걸,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저 남자보다 몸에 쌓인 피로가 우선인가. 엘리사는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몰려오는 수마에 풍덩 빠졌다. ****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황녀 궁으로 돌아온 마리아는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칼베른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진정하세요, 전하.”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마리아를 달래던 유모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황자 전하!”

곧 제국의 2황자이자 마리아의 친 오라비인 데아른을 발견한 유모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라버니!”

마리아는 눈물을 흩뿌리며 데아른의 품에 안겼다.

“칼베른이, 그가, 그 남자가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데아른의 옷깃을 꼭 부여잡고 설움을 토해냈다.

“내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내 모든 걸 주려고 했는데, 내가 아닌 그 여자를 선택했단 말이에요!”

“진정하렴, 마리아.”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진정하겠어요! 칼베른이 날 버렸는데. 그 여자가 내게서 칼베른을 빼앗아갔는데!”

눈물이 가득 고인 마리아의 눈동자에 독기가 뚝뚝 서렸다. 마리아는 마치 엘리사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자격도 없는 그딴 여자가 칼베른의 곁에 있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곱게 색을 입힌 손톱이 데아른의 옷깃을 파고 들었다.

“그는 내 거니까, 그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하니까! 그 여자를 물리치고 내가 그 옆자리를 차지할 거라고요!”

“그럼, 그래야지.”

마리아를 닮은 황금색 눈이 유쾌하게 휘었다. 데아른이 옅게 웃으며 마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기 건 자기가 지킬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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