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날 믿고 따라오면 돼. (9/156)

9화. 날 믿고 따라오면 돼.2020.08.01.

쏟아진 와인은 아래 발코니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여자들의 옆에 떨어졌다. 엘리사는 여자들의 머리 위에 와인을 부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옆을 겨냥했다. 머리 위에 붓는 건 과한 것 같았으니까. 이 정도가 저들의 시선을 적당히 끌기 좋았다.

“뭐야?”

예상했던 대로 여자들은 황당해 하며 엘리사가 있는 위층 테라스를 올려다봤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엘리사를 발견한 여자들의 눈이 함박만큼 커졌다. 몇몇은 엘리사를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중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소, 소공작 부인 부인, 왜 그곳에…….”

“바람 쐬러 나왔어요. 그런데 절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네요.”

엘리사는 난간에 팔을 세워 대고 턱을 괴고, 다른 손에 있는 와인병을 흔들었다.

“하도 이 여자, 그 여자 하기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

엘리사의 말에 여자들의 얼굴은 수프 한 그릇 얻어 먹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그게…… 아, 날이 추워서 그런가. 몸이 떨리네요. 전 이만 들어가 봐야겠네요.”

“저, 저도요.”

사이좋게 이야기할 땐 언제고, 불리한 상황이 되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끝까지 사과는 안 하네.”

그냥 확 머리 위에 와인을 부을 걸 그랬나. 엘리사는 아쉬움을 삼키며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으나, 칼베른이 찾으러 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댄스 타임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슬슬 내려갈까.’

칼베른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이만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생각하던 참에 칼베른이 정원으로 나왔다. 그도 잠깐 쉬러 나온 걸까. 괜찮다면 이곳에 와서 쉬라고 말하고자 부르려는데.

“칼베른!”

마리아가 불쑥 나타나 칼베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좋아해요!”

곧이어 마리아의 애처로운 외침이 바람을 타고 메아리처럼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당신을, 당신을 좋아해요, 칼베른!”

남편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남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고백하는 장면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1번.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 우악스럽게 잡아뗀 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펄펄 날뛰며 따진다. 2번. 자고로 펄펄 날뛰는 것보다 차분하게 따지는 게 더 무서운 법. 체면도 있으니 일단 진정한 뒤, 다가가서 논리정연하게 하나씩 따진다. 3번. 따지긴 뭘 따져.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자. 계약 결혼 관계이니 원래라면 3번을 선택하는 게 맞았지만,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2번도 썩 내키지 않았고, 1번 대로 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칼베른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니지, 아니야. 이제 내 남편이잖아?’

게다가 대외적으로 자신과 칼베른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였다. 그러니 가서 화를 낼 자격은 충분했다.

‘좋아, 가보자!’

마음을 굳힌 엘리사가 힘차게 돌아서는 그때였다.

“그 마음에 보답해드릴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린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높낮이라곤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엘리사는 다시 돌아서서 정원을 내려다 봤다. 어느덧 마리아를 떼어낸 칼베른이 몹시 성가시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면 칼베른을 올려다보는 마리아의 눈빛은 굉장히 애처로웠다.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엘리사조차 그녀에게 동정심이 들 정도였지만, 칼베른은 땅에 뿌리를 박은 거대한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한데 왜 자꾸 절 귀찮게 하시는 겁니까. 마음을 접으십시오, 황녀 전하.”

‘일단 지켜볼까.’

칼베른이 철벽을 잘 치고 있는데, 여기서 나서는 건 오히려 독인 것 같아 엘리사는 난간에 기대서서 그들을 주시했다. 정확히 말해서 마리아가 어떤 대답을 보일지 지켜봤다. 칼베른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듯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마리아는 이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럴 수 있다면 진작 그랬을 거예요!”

마리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마리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칼베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답받지 못해도 좋아요. 받아주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좋으니까, 절 밀어내지 말아 주세요. 당신의 옆에 있는 걸 허락해줘요!”

“그 말은 제 정부라도 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기꺼이!”

마리아의 당찬 대답에 줄곧 무표정했던 칼베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엘리사도 경악하며 마리아를 쳐다봤다. 보통 귀족들은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많이 하므로 따로 정부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 평민, 심지어 노예까지.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정부가 될 수 있었지만, 황녀는 아니었다. 황후 다음으로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인 황녀가 누군가의 정부가 된다면 다른 나라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황녀가 누군가의 정부가 되는 건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마리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저런 말을 하니 다들 당황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절 받아줘요, 칼베른.”

정작 당사자인 마리아는 그 사실을 신경쓰지 않고 칼베른에게 매달렸다.

“전 당신에게 모든 걸 다 드릴 수 있어요. 제 몸과 마음은 물론, 제 목숨까지……!”

“필요 없습니다.”

힘 있는 묵직한 목소리가 마리아의 입을 막았다. 마리아의 충격적인 발언에 당황해서 잠시 굳어 있던 엘리사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황녀 전하께서 주시는 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칼베른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으로 엘리사를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힘주어서 말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듭되는 거절에 마리아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마리아는 요정처럼 정말 아름다웠지만, 여전히 칼베른의 시선은 무심했다.

“당신은…….”

마리아의 목소리가 부질없이 떨렸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신은 정말 매정하군요.”

“…….”

“그러니까 그런 일을 당한 거예요. 당신은, 당신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는지, 마리아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웠다. 제아무리 칼베른일지라도 그런 마리아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는지, 그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마리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칼베른…….”

이에 작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사람처럼 마리아가 고개를 들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불씨는 다시 꺼졌다.

“혼자 돌아가시기 힘드실 것 같으니 시녀들을 불러드리겠습니다.”

“…….”

“아니면 마차를 아예 정원 입구에 대기시켜둘까요?”

허락은 물론 달콤한 위로의 말이나 다정한 손길 같은 것도 없었다. 여전히 칼베른은 철벽을 치며 마리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사실에 마리아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몸을 휙 돌려 피로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칼베른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뭔가 생각하는 듯 허공을 짚던 눈동자가 이내 엘리사가 있는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헉!’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엘리사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와인병이 기울어지면서 드레스가 젖었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다행히 난간이 기둥이 아닌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인 덕분에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엘리사는 난간 벽에 등을 기대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날 봤을까?’

만약 봤다면, 그래서 그와 마리아가 이야기 나누는 걸 들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일단 칼베른의 반응을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난간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한테 오는 중인가?’

미치겠네, 정말. 엘리사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침착하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괜찮은 것도 이상하게 보이는 법이었다. 그러니 일단 진정한 뒤, 칼베른이 오면 태연하게 맞이하는 거다. 그러면 칼베른도 왜 훔쳐봤냐고 따지지 못하겠지.

“좋아.”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엘리사는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꼭 부여잡고 칼베른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칼베른이 아닌 하인이었다.

“곧 댄스 타임이니 준비하고 내려오라고 소공작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 칼베른이 ‘보낸’ 하인이었다. 직접 오지 않고 하인을 보낸 걸 보면 칼베른은 엘리사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엘리사가 그 사실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하인이 다시 말했다.

“하녀를 불러다 드리겠습니다.”

“하녀는 왜?”

“드레스를 갈아입으셔야 하니까요.”

드레스? 아. 그제야 드레스에 와인을 쏟은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녀를 불러줘.”

  ****

“드레스, 갈아입었군.”

엘리사가 피로연장으로 돌아가자마자 마주한 칼베른이 뱉은 첫 마디였다. 용케 알아봤네. 아까 입은 드레스랑 색깔과 디자인이 비슷해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으면 액세서리부터 시작해서 화장, 머리 스타일 등 전부 다 바꿔야 하니 엘리사는 최대한 비슷한 드레스로 입었다. 당사자인 엘리사조차도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비슷한 드레스였는데, 칼베른은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전에 입었던 드레스에 잠시 문제가 생겨서요. 그래서 갈아입었어요.”

“그렇군.”

이 남자, 정말 자신을 못 본 게 맞을까. 엘리사는 반신반의하며 칼베른을 주시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요.”

반응을 보아하니 못 본 게 확실했다. 엘리사는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안도하며 칼베른이 내민 손에 그녀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엘리사와 칼베른이 홀 중앙에 서자 음악이 왈츠로 바뀌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그간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줄 때가 왔어. 연금술을 공부했을 때보다 더 노력했던 만큼 잘하고 싶었다. 칼베른에게 자신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그러니 잘하자. 엘리사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하며 발을 뗐다. 그간 노력한 것과 조금 전의 다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엘리사는 전반부에 실수 한 번 하지 않았다. 항상 발이 꼬였던 턴도 매끄럽게 소화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군.”

칼베른이 약간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엘리사는 뿌듯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동안 연습을 많이 했는 걸요.”

“마지막으로 나랑 췄을 땐 실수가 잦았는데.”

“그게 벌써 5일 전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그동안 전 많이 달라…….”

엘리사는 달라졌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그의 발을 밟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

엘리사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눈동자가 동요하며 칼베른의 얼굴이 아닌 아래를 응시했다. 실수가 잦았을 땐 또 실수한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하지 않았다. 항상 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여태 실수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던 와중 실수하니 몹시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으며 창피했다.

‘입을 다물고 있을걸.’

엘리사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황해서 스텝에 집중하지 못한 엘리사는 또 칼베른의 발을 밟았다. 아.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칼베른이 엘리사의 허리를 좀 더 강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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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말고 집중해.”

“하지만…….”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그대가 실수한 걸 몰라.”

하지만 당신이 알지 않냐는 말이 엘리사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내려갔다.

“그대가 실수하더라도 내가 덮어주고 이끌어주겠다.”

칼베른은 엘리사와 마주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날 믿고 따라오면 돼.”

든든하다. 이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이 엘리사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칼베른이 거대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건 물론 앞에서 잘 이끌어준 덕분에 엘리사는 금방 침착함을 되찾고 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짝짝짝-! 그렇게 무사히 왈츠를 끝내자 박수의 갈채가 쏟아졌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비난하지 않고 칭찬만 쏟아냈다.

‘잘 끝나서 정말 다행이야.’

실수한 걸 들켰다면 또 저들의 입방아에 올랐을 테니까. 엘리사는 기진맥진하며 의자에 앉았다. 왈츠 한 번 췄을 뿐인데, 일주일 동안 쓸 힘을 다 쓴 기분이었다. 엘리사는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쉬려고 했는데, 하녀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마님.”

또 뭘 준비하는 건데? 엘리사는 의아했지만, 하녀들이 어서 가야 한다며 재촉하니 일단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들을 따라갔다. 가는 길에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제르나 남작이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된 엘리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녀들이 엘리사를 데리고 간 곳은 욕실이었다. 그들은 엘리사가 민망해할 정도로 구석구석 씻겨주었다.

“잘 준비를 하는 건가요?”

“네, 마님.”

아하, 그런 거였구나. 하긴 시간이 많이 늦긴 했지. 이제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던 엘리사는 목욕이 끝나고, 하녀가 가져온 잠옷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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