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조심하도록 해.2020.07.25.
보통 저런 말을 들으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거나 불안해하겠지만, 엘리사는 아니었다. 에드윈이 말하는 그녀의 비밀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사자도 모르는 비밀을 에드윈이 알고 있다니. 이상해서 빤히 쳐다보자 에드윈이 손뼉을 짝 치며 말을 덧붙였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엘리사 양과 소공작님의 비밀이겠군요. 계약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고요.”
그제야 에드윈이 말한 그녀의 비밀이 칼베른과의 계약 결혼이라는 걸 눈치챈 엘리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 저한테까지 소공작님과 정말 사랑하는 사이인 양 연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에드윈은 일그러진 엘리사의 표정을 봤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하녀들을 내보낸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경계를 푸셔도 됩니다.”
확실히 하녀들이 있는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칼베른과 한 계약은 클라우드 공작에게도 비밀로 해야 했으니까.
‘한데 칼베른이 이 남자한테 계약 결혼에 대해서 말했단 말이지?’
엘리사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헛웃음을 지었다. 칼베른이 계약 내용을 말해줄 만큼 이 남자를 믿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정 말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의논하고 해야지,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이건 엄연히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가야겠어.’
엘리사는 칼베른을 만나면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드윈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왜 절 비웃은 거죠?”
“제가요? 그런 적 없습니다만.”
“거짓말. 아까 이렇게 비웃었잖아요.”
엘리사는 에드윈이 그녀에게 보였던 미소를 따라 했다. 그러자 에드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기억 안 나는 모양이죠?”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바보 같이 웃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 말인즉, 방금 엘리사의 웃음이 바보 같았다는 의미. 어쩜 하는 말마다 이렇게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을 수가 있는 건지. 엘리사는 입매를 비틀었다. 테레사 부인보다 이 남자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 제가 웃은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죄송합니다. 엘리사 양을 비웃으려던 게 아니라 엘리사 양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하셔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던 겁니다.”
내가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했다고? 언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에드윈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소공작님께서 엘리사 양에게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하셨죠.”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건가요?”
“네. 소공작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만큼 칼베른을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엘리사는 보란 듯이 반박하고 싶었으나, 전부 맞는 말이었기에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칼베른은 총괄 집사인 헤리엇이나 하녀장인 미란다 등 저택 내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엘리사에게 직접 소개해줬는데 에드윈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단순히 자리에 없어서 안 해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엘리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런 엘리사를 놀리는 듯 에드윈이 얄밉게 웃으며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리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약간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엘리사.”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가식적인 인사였다. 엘리사가 입매를 비틀며 한마디 하려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아가씨께선 이제 슬슬 식장에 가셔야 합니다.”
“알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론 소공작 부인으로서 좀 더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에드윈은 제 할 말만 재빠르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엘리사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주인에 그 부하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 엘리사의 방을 나온 에드윈이 향한 곳은 칼베른의 방이었다. 새하얀 예복을 입은 칼베른은 신이 보낸 천사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치장을 돕고 있는 하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흘겨볼 정도였다.
“왔군.”
정작 당사자는 주변 반응에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높낮이가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천사의 이미지를 약간 깼다. 에드윈은 공손히 인사한 뒤 칼베른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늦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말이죠.”
칼베른은 커프스 단추를 채우다 말고 에드윈을 돌아봤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오라고 했을 텐데?”
“간단하게 인사만 했습니다. 그 인사가 예상한 것보다 길어진 거죠.”
에드윈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칼베른은 말없이 에드윈을 보다가 주변을 물렸다.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지?”
“정말로 별말 안 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 정도만 하고 왔어요.”
“정말인가?”
“그럼요. 아, 제가 소공작님과 엘리사 양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으니 제 앞에선 구태여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칼베른의 눈썹이 올라갔다.
“별말 안 했다더니 다 하고 왔군.”
“에이, 이 정도는 해야죠. 그래야 엘리사 양도 절 편하게 대할 테니까요.”
“엘리사 양이 아니라 소공작 부인이다.”
칼베른은 커프스 단추를 마저 잠갔다.
“앞으로 호칭을 조심하도록 해.”
더불어 앞으로 엘리사에게 마땅한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였다. 에드윈은 그러겠다는 의미로 가슴에 손을 얹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 결혼식이 시작되기 20분 전. 엘리사의 치장을 담당한 하녀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이미 수차례 확인했지만, 혹 놓친 곳이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
그동안 엘리사는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짙은 신부 화장을 하고 머리에 온갖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여자는 예쁘지만 낯설었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 정말 결혼하는구나.’
새삼스레 그 사실을 실감한 엘리사는 부케를 꽉 움켜쥐었다. 생각에 없던 결혼이었다. 만약 하게 되더라도 꿈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돈에 팔려가게 될 줄이야. 부친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니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한숨은 나왔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무겁기도 했고, 그만큼 표정도 우울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부친인 제르나 남작은 엘리사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무척 행복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식 날, 이런 우울한 표정을 짓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많이 긴장되시나 봐요, 아가씨.”
“너무 긴장하시면 실수하니 조금만 긴장을 푸세요.”
다행히 사람들은 엘리사가 긴장해서 웃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허허, 우리 딸이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다니. 처음이구나.”
제르나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제르나 남작의 떨리는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아빠도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요?”
“음, 아무래도 딸의 결혼식은 처음이니까…….”
제르나 남작이 말꼬리를 흐리며 천장을 쳐다봤다. 그의 눈시울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 모습을 리베리아가 봤어야 했는데…….”
“엄마는 하늘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실 테니 울지 마세요, 아빠.”
“그래. 좋은 날 울면 안 되지.”
제르나 남작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뒤, 씩씩하게 말했다.
“잘 살아야 한다, 엘리사.”
“물론이죠.”
그러니 아빠도 오래오래 살아요. 내가 행복한 걸 보려면 그러셔야 해요. 엘리사는 그 말을 삼키며 제르나 남작을 꼭 끌어안았다. 예전보다 야윈 몸이 바늘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 엘리사는 제르나 남작의 손을 잡고 식장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칼베른을 봤다.
‘잘생겼네.’
보는 순간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잘난 외모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잘난 얼굴을 보니 우울한 마음이 약간 풀렸다. 그래. 어차피 해야 하는 결혼,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는 게 좋겠지. 그리 생각한 엘리사는 환하게 웃으며 칼베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칼베른이 기묘하다는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곤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 뒤로 결혼식은 순조로웠다. 대주교의 축사를 들은 뒤, 결혼 서약서에 각자 사인을 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주교의 목소리가 결혼식장 안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끝난 건가.’
뒤에 피로연이 남아 있긴 하지만 결혼식 자체는 이걸로 끝이었다. 긴 시간 준비한 것에 비하면 허무하기도 하고, 무사히 끝났다는 것에 안도하며 엘리사는 크게 숨을 뱉었다.
“……!”
그 순간, 누군가 찌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만약 시선으로 누군가를 찌를 수 있다면 몇 번이라고도 찔렸을 강렬한 시선에 엘리사는 그쪽을 돌아봤다. 그곳엔 결혼식에 참석한 수많은 하객이 있었다. 엘리사는 그중 누가 자신을 노려본 건지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사라진 시선을 쫓아봤자, 쫓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 엘리사는 누군지 찾는 건 그만두고, 칼베른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이제 좀 쉴 수 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지금부턴 피로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했다. 드레스를 갈아입으면 그에 맞춰 머리 스타일과 화장, 액세서리를 전부 다 바꿔야 하므로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배고파 죽겠는데.”
결혼식이 끝나면 뭔가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엘리사는 절망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님, 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피로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녀들은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엘리사는 한숨과 함께 뭉그적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마님이라니. 잠깐 사이에 호칭이 변했다.
‘당연한 건가.’
결혼 서약서에 사인했으니까. 이제 엘리사의 성은 제르나가 아닌 클라우드였다. 엘리사 클라우드. 칼베른 클라우드의 아내이자 클라우드 공작가의 소공작 부인. 어느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엘리사는 입술을 비틀었다. 똑똑-. 불현듯 들리는 노크 소리에 엘리사는 어깨를 딱딱하게 굳혔다. 에드윈. 그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또 그 남자가 찾아온 건 아니겠지. 엘리사는 약간 불안한 눈으로 문을 쳐다봤다.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에드윈이 아닌 하인이었다. 하인은 엘리사에게 꾸벅 인사한 뒤, 가지고 온 은색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쿠키와 우유가 있었다.
“소공작님이 보내신 겁니다.”
하인이 나가고 엘리사는 쿠키와 우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베른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쿠키와 우유를 가져다주라고 했을 리는 없고.
“……배가 고픈 게 티가 났나.”
“네?”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사는 쿠키를 크게 베어 먹었다. 바삭, 떨어지는 쿠키 조각이 아까울 정도로 쿠키는 굉장히 달고 맛있었다. **** 엘리사는 칼베른이 준 쿠키를 먹은 덕분에 힘이 나긴 했지만, 그 힘을 피로연에 참석한 손님들을 접대하는 데 전부 다 써버렸다.
“죽겠다…….”
겨우 쉴 틈을 만든 엘리사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도 고프고 발도 아팠다. 익숙하지 않은 힐을 계속 신고 있던 탓이었다. 생각 같아선 침실로 돌아가 푹 쉬고 싶었으나, 아직 피로연이 끝나지 않은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피로연이 끝나려면 아직 2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나마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영애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소공작 부인.”
“감사합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엘리사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억지로 웃었다.
“정말이지, 너무 근사한 결혼식이에요. 소공작님께서 부인을 아끼는 게 눈에 보이는군요.”
“누가 아니랄까 봐요. 드레스도 너무 예뻐요, 부인.”
엘리사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영애들은 그녀를 에워싼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부분 칭찬이었지만 그중에 엘리사에 대한 칭찬은 없었다. 클라우드 공작가와 칼베른, 그리고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액세서리에 대한 칭찬만 있을 뿐이었다.
‘날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하긴 여기 참석했다는 건, 백작가 이상 되는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라는 의미. 그런 그녀들이 불과 어제만 해도 일개 남작가 영애였던 엘리사를 쉽게 인정할 리가 없었다.
“피로연장도 너무 아름답게 꾸몄네요. 음악 선곡도 굉장히 좋고요.”
“칭찬 고마워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렇게 칭찬받으니 기분 좋네요.”
엘리사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새처럼 재잘거리던 영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뜻하지 않게 엘리사를 칭찬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어쩜 이리도 속마음이 투명하게 보이는 건지. 엘리사는 속으로 실소했다. 테레사 부인이 무릇 귀족 가문의 영애라면 속마음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보겠어요.”
좀 더 쉬고 싶었으나, 이 여자들이 여기 있는 이상 계속 쉴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유유히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혼 축하드려요, 엘리사 제르나 양.”
제국의 황녀이자 칼베른을 짝사랑하는 마리아가 불쑥 나타나 엘리사의 앞을 가로막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