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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과하세요. (5/156)

5화. 사과하세요.2020.07.18.

  칼베른이 외투를 벗자 얇은 셔츠가 드러났다. 몸에 딱 맞는 맞춤 셔츠는 근육으로 다져진 상반신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엘리사는 곁눈질로 그의 상체를 훑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몸이 진짜 좋았다. 검술을 해서 그런가.

‘그럼 뭐해. 소매치기당한 것도 모를 만큼 둔한데.’

검을 쓰는 사람들은 예민하고 눈치도 빠르다고 하던데 다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내가 있다니?

“그 말씀은 제가 춤 연습을 하는 걸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왜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엘리사는 칼베른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쁘신 거 아니셨나요?”

“바빠.”

칼베른이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올리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엘리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근육이 도드라진 팔뚝에 닿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 내야지. 그대가 실수하면 나도 욕먹으니까.”

뚫어지도록 칼베른의 팔을 보고 있던 엘리사는 뒤이은 말에 그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눈이 마주친 칼베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랬나. 엘리사도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정말 도와주실 건가요?”

“싫어?”

“싫긴요. 저야 감사하죠.”

안 그래도 혼자 연습하는 게 막막했던 참이었으니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야말로.”

칼베른은 서로의 뜻이 맞아 계약했던 그날, 보여주었던 미소를 지으며 엘리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한 곡 추실까요, 레이디.”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만 봤을 땐, 나무랄 곳 없이 완벽한 남자에게 정중하게 춤 신청을 받으니 공주님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여졌다.

“기꺼이.”

엘리사는 으레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그러는 것처럼 도도하게 웃으며 칼베른의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곧 몸이 밀착되고 칼베른의 크고 단단한 손이 엘리사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 엘리사는 칼베른과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하면서 스킨십을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붙은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땐 주변에 보는 눈도 많았고, 모두에게 오픈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둘만 있는 집에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피부에 확 닿으면서 볼이 화끈거렸다. 그의 어깨에 살포시 올린 손끝에 적나라케 느껴지는 단단한 촉감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엘리사!’

이런 상황에서 두근거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 남자가 이상한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엘리사는 속으로 크게 심호흡하며 애써 심장을 진정시킨 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는데, 저 춤 엄청 못 춰요.”

“알아.”

엘리사는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려다 그가 자신이 춤추는 걸 봤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을 삼켰다.

“발 밟아도 화내지 말아요.”

“몇 번 밟는 거론 화 안 내.”

그럼 몇 번 이상 밟으면 화낸다는 건가. 그리고 몇 번의 기준이 얼마지. 궁금증을 뒤로한 채 연습이 시작됐다. 칼베른은 직접 입으로 박자를 세며 엘리사를 능숙하게 리드했다. 칼베른은 초보인 엘리사가 보기에도 무척 잘 췄다. 자신 있게 연습을 도와준다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돼.’

그렇게 생각하니 더 긴장됐다. 엘리사는 얼굴을 경직한 채 스텝을 밟는 데 집중했다. 동작은 살짝 틀려도 괜찮았지만, 스텝을 틀리면 그의 발을 밟게 되니 최대한 조심했다.

“앗, 미안해요.”

그러나 조심한다고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었다. 결국 박자를 놓친 엘리사는 칼베른의 발을 밟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사과로 넘어갔지만, 실수가 반복되면서 그 횟수가 열 번을 넘어가자 이젠 사과하는 것조차 미안해졌다.

“역시 안 되겠어요.”

여기서 더 하는 건 그에게 너무 민폐였다. 엘리사가 울상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자 칼베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신발 벗어.”

갑자기 신발은 왜 벗으라는 거지. 엘리사는 의아했으나 지은 죄가 많으니 군말 없이 벗었다. 그러자 칼베른이 벌렸던 거리를 다시 좁히며 엘리사의 허리를 휘어잡고 들었다.

“앗.”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엘리사는 칼베른의 발 위에 올라탔다. 이게 무슨? 영문 모를 행동에 엘리사는 당황하며 칼베른을 쳐다봤다.

“이대로 연습하지.”

“공작님의 발을 밟은 상태로요?”

“그래. 박자를 몰라서 자꾸 놓치는 것 같으니, 몸으로 박자를 느껴봐. 그럼 좀 나아질 거야.”

“하지만 저 무거울 텐데요.”

“알아.”

와, 대답하는 거 봐.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할 필요는 없잖아. 엘리사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칼베른이 보기보다 착하다고 생각했던 거, 전부 취소였다.

“나중에 발 아프다고 딴말하지 마세요.”

“안 그래. 그것보다 기껏 알려주는 데 집중 좀 하지.”

네, 네. 어련하시려고요. 엘리사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춤은 머리로 추는 게 아니야.”

칼베른은 엘리사를 발에 올리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박자를 몸으로 느끼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거지.”

칼베른이 움직이는 대로 엘리사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엘리사는 마치 나비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칼베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기본 스텝은 익힌 것 같으니, 너무 박자를 신경 쓰지 말고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봐.”

“그러다 박자를 놓쳐서 스텝이 꼬이면요?”

“넘어질 정도가 아니라면 약간 꼬이는 건 상관없어. 어차피 여자는 긴 치마에 가려서 발이 보이지 않으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 엘리사는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랑만 춤을 출 건데 무슨 걱정이야.”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샹들리에의 불빛처럼 칼베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면 돼.”

……안 그래도 멀쩡한 마음을 뒤흔들 만큼 잘생긴 얼굴인데 저런 효과까지 쓰는 건 반칙 아닌가.

“알겠어요.”

엘리사는 눈치 없이 다시 뛰는 심장을 꼭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엘리사는 약속한 대로 사흘 뒤, 클라우드 공작가로 이사했다. 10년 전, 클라우드 공작부인이 세상을 등진 뒤, 지금까지 공작가의 안살림을 담당한 건 클라우드 공작의 사촌 누이인 테레사 부인이었다. 엘리사는 공작가로 이사한 날, 테레사 부인을 처음 봤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증거인 새카만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중년 여자는 척 보기에도 성격이 깐깐해 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한 번 책잡히면 큰일이니 엘리사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레사 부인.”

테레사 부인은 불만이 묻어나는 보라색 눈동자로 엘리사를 쓱 훑어본 뒤 혀를 찼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가문에 이런 애를 들이다니. 오라버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다 들린다, 다 들려. 무릇 뒷말은 상대가 없는 곳에서 안 들리게 하는 게 예의인데, 이 고상한 부인은 그 예의를 잊은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 자신을 무시하고 있거나.

‘아마 후자겠지.’

앞으로 이 사람에게 안주인이 해야 할 일을 배워야 하는데 힘들겠네. 벌써부터 어두컴컴한 미래가 보여 엘리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대로 테레사 부인은 밤을 꼴딱 새워야 해결할 수 있는 숙제를 내주는 등 혹독하게 엘리사를 가르쳤다. 그건 괜찮았다. 어차피 배워야 하는 거 빠르게 배우는 게 나았으니까.

“어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니? 눈치도 없고.”

문제는 테레사 부인이 심심치 않게 엘리사를 깎아내린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도 엘리사는 참을 수 있었다.

“이래서 엄마 없이 자란 아이는 티가 나는 건데, 쯧.”

하지만 부모 욕을 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사는 마음속에 꾹 눌러 담고 있던 무언가가 빵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저를 저격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소공작님을 저격하시는 건가요?”

동시에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열렸다. 그러자 테레사 부인이 눈썹을 치며 들며 엘리사를 노려봤다.

“어디서 어른이 말하는데 말대답을 하는 거니? 이래서 못 배운 애들이란.”

“클라우드 가문의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항상 당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가르쳐주신 대로 한 것뿐인데 문제가 있나요?”

엘리사는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테레사 부인이 말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맹랑하구나.”

“머리에 피가 마르면 죽습니다, 부인.”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그런가요? 부인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눈치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하!”

엘리사가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지 테레사 부인은 헛바람을 차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어쩌다 이런 게 가문에 들어온 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오라버니한테 말해서 당장 바꾸라고 해야겠구나.”

“뭘 바꾼단 말씀이십니까?”

그때, 칼베른이 소리 없이 등장했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테레사 부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칼베른을 맞이했다.

“다녀왔니?”

“네. 한데 엘리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고모님.”

“그게…….”

“궁금한 점이 생겨서 테레사 부인에게 물어본 참이었습니다.”

테레사 부인이 이번 일을 묻지 못하게 엘리사는 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부인께서 제게 엄마 없이 자란 아이는 티가 난다고 하시길래, 저를 저격하는 말인지 아니면 소공작님을 저격하는 말인지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엘리사의 대답에 칼베른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자수정 눈동자와 마주한 테레사 부인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렴. 절대 널 저격한 건 아니니까.”

“일단 그런 말을 하긴 하셨군요. 그것도 제 아내가 될 사람을 저격해서 말이죠.”

“그건…….”

테레사 부인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엘리사에게 보였던 오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엘리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세요, 고모님.”

칼베른이 엄하게 말하자 테레사 부인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흘끗 엘리사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독기가 뚝뚝 묻어났다.

“고모님.”

“……미안하구나.”

칼베른이 나무라듯 부르자 그제야 테레사 부인은 마지못해 사과했다.

“네.”

엘리사 역시 마지못해 사과를 받는다는 기색을 풍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사과,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한 번 더 이런 이야기가 제 귀에 들린다면, 그땐 사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칼베른은 엘리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테레사 부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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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앞으로 제 아내, 더 나아가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까요.”

“…….”

“그러니 부디 앞으로는 말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고모님.”

  **** 칼베른의 경고가 먹힌 건지 그 날 이후, 테레사 부인은 엘리사를 더 이상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교육도 소홀히 했다. 예전에는 하루에 너무 많은 양을 가르쳐주고, 숙제도 산더미 같이 내줘서 문제였는데, 이젠 너무 안 가르쳐줘서 문제였다. 엘리사가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잘난 예비 안주인인데 이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지 않냐며 비아냥거렸다.

‘이것도 칼베른에게 말할까?’

아니야, 그러지 말자. 여기서 테레사 부인과의 사이가 더 틀어진다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가 없었다. 재수 없긴 해도 테레사 부인 역시 클라우드 공작가 사람이었으니까. 안주인이 된다면 품고 가야 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엘리사는 더 이상 테레사 부인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테레사 부인에게 더 배울 것도 없었다. 집안일과 장부를 보는 건 기존에 많이 해서 잘 알았고, 사교계의 중요한 인물들을 달달 외우는 것도 전부 끝냈다. 사용인을 다루는 건 총괄 집사인 헤리엇에게 배우는 거로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때 왜 기자라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런 말을 물어본 거죠?”

엘리사는 기회를 보다가 헤리엇에게 줄곧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러자 해리엇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사과했다.

“아가씨께서 적합한 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런 실례를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요. 사과를 받으려고 물어본 건 아닌데…….”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태도에 엘리사는 당황했고,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제가 적합한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니, 무슨 의미인가요?”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지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주인님께 물어보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클라우드 공작이 시켜서 했다는 의미였다.

‘잠깐. 그 말은 내가 칼베른의 흉을 본 걸 클라우드 공작이 다 알고 있다는 의미잖아?’

아, 혹시 그래서 나라면 절대 칼베른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 건가? 날 며느리로 선택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뭔가 억지 같았지만, 애초에 이 결혼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더 깊게 파고들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이 결혼에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예전에 칼베른이 했던 경고가 떠올라 애써 궁금증을 잠재웠다. 그렇게 결혼식을 불과 하루 앞둔 저녁.

“엘리사, 그 이야기 들었니?”

부친인 제르나 남작이 불쑥 찾아와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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