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야, 네 남편2020.07.04.
우르르, 쾅-.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창밖을 쳐다봤다. 온 세상을 적실 것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내일은 비가 그쳐야 할 텐데.”
그래야 법원에 가기 수월할 테니까. 내일은 그토록 기다리던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는 날인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법원에 가야 했다. 그러니 부디 비가 그치길 바라며 엘리사가 다시 책을 읽으려는 그때였다. 쾅, 쾅쾅-. 난데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엘리사는 아까보다 더 놀라며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책 표지에는 [연금술의 기본]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쾅쾅쾅-. 엘리사가 놀라 주춤하는 사이에도 상대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현재 시각, 밤 11시. 손님이 오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특별하게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평범한 손님은 아니라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빗자루를 거꾸로 움켜쥐고 문을 노려봤다. 차오르는 긴장감 때문에 빗자루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누구……세요?”
“마님, 저 헤리엇입니다!”
헤리엇이라니. 엘리사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수석 집사인 헤리엇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올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혼 문제밖에 없었다. 설마 그 남자, 이제 와서 이혼을 못 해준다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렇다 해도 이렇게 쏟아지는 빗속에 나이 많은 집사를 말을 태워 보내다니. 저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마님, 마님!”
“지금 나가요!”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헤리엇을 들여야 할 것 같아 엘리사는 꼭 잡고 있던 빗자루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홀딱 젖은 헤리엇이 보였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입술은 약간 푸르스름했다.
“세상에, 헤리엇.”
엘리사는 서둘러 헤리엇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 같았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어서 들어와요.”
그대로 그를 집 안으로 들이려던 엘리사는 뒤늦게 그의 뒤에 한 소년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소년을 내려다 봤다.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은 새카만 머리칼에 자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클라우드 공작가에 이렇게 어린 소년은 없었다.
“이 소년은 누구죠?”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헤리엇이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웃음이 굉장히 미묘하고 의미심장했다.
“헤리엇?”
“나야.”
재차 물어보려는데 소년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엘리사의 팔을 잡으며 대답했다.
“네 남편.”
**** 엘리사의 부친인 제르나 남작은 귀족이지만, 영지도 저택도 없는 말 그대로 이름뿐인 귀족이었다. 그나마 성실하고 배움이 깊어 책을 대필하거나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엘리사도 생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연금술로 약을 만들어 팔았다. 연금술은 귀한 능력이었기 때문에 돈벌이가 제법 쏠쏠했지만, 문제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렵고, 재료비가 무시무시하게 많이 든다는 거였다. 그나마 연금술사 협회 직원인 사라와 친분을 쌓아둬서 재료 수급은 괜찮았지만, 그래도 재료비가 많이 드는 건 변함없었다.
“전부 다 해서 6골드야.”
6골드면 무려 2주일 치 생활비였다. 엘리사가 기함하며 사라에게 물었다.
“왜 가격이 올랐어? 며칠 전에는 4골드였잖아.”
“무역로에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공급이 예전만큼 많지 않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올렸어.”
그래도 6골드면 너무 비싼데. 게다가 수중에 가진 돈은 4골드가 전부였다.
“좀 더 싸게 살 방법 없어?”
“없긴. 당연히 있지.”
“뭔데?”
엘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사라가 엘리사의 팔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금술사 등급을 실버로 올리면 돼. 그럼 10퍼센트 할인 해 줘.”
연금술사 협회는 연금술사들에게 등급을 매겼는데 가장 낮은 등급은 브론즈였고 가장 높은 등급은 마스터였다.
“장난해? 브론즈인 내가 갑자기 어떻게 실버가 돼?”
등급을 올리려면 의뢰에 성공해서 실적을 쌓아야 했다.
“그리고 10퍼센트면 60실링밖에 할인 안 해주는 거잖아!”
“그럼 골드, 아니 플래티넘으로 가야겠네. 참고로 플래티넘은 50퍼센트 할인이야.”
이게 끝까지 사람을 놀리네.
“됐어! 갈 거야!”
짜증이 난 엘리사는 사라의 손을 뿌리치고 연금술사 협회를 나왔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켜주려는 듯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처럼 시내까지 나왔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재료가 있어야 약을 만들어 돈을 벌 수 있기도 했고.
‘암시장이라도 가볼까.’
암시장에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질이 안 좋았지만, 운 좋으면 좋은 물건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한적한 광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
밤하늘을 녹인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과 숱이 짙은 눈썹. 오묘하게 반짝이는 자색의 눈동자와 오뚝하게 솟은 콧날, 날렵한 턱선 등.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외모였다. 세상에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다 가져다 붙여도 남자의 외모를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남자도 존재하는구나. 엘리사는 반쯤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봤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람들은 가던 걸음도 멈추고 남자를 바라봤다. 쏟아지는 시선이 익숙한지 남자는 묵묵히 걸어갔다. 그 자태가 흐트러짐 없이 올곧았다. 온몸에서 교육을 잘 받은 티가 난다고나 할까. 타악-.
“앗!”
비루한 차림새를 한 소년이 허겁지겁 달려오다가 남자와 부딪쳤다. 꽤 세게 부딪쳤는지 소년은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뒹굴었다. 사람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소년을 가엽게 쳐다봤지만, 엘리사는 아니었다.
‘소매치기다!’
엘리사는 소년이 남자와 부딪치는 순간, 남자의 지갑을 가져가는 걸 똑똑히 봤다. 하지만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빠르게 도망치는 소년을 붙잡거나 따라가지 않았다. 소년과 부딪친 부분을 툭툭 털어낸 뒤, 다시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걸 보아 검을 쓰는 사람인 것 같은데, 저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실력이 형편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저 검이 장식용이거나.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는 수밖에.’
딱히 정의심에 불타는 건 아니었다. 엘리사가 원하는 건 사례금이었다. 차려입은 걸 보아하니 돈 많은 귀족인 것 같은데, 지갑을 찾아주면 사례금을 두둑하게 주겠지. 그 돈을 가지고 다시 연금술사 협회에 가서 재료를 사는 거야.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엘리사는 딴청을 피우는 척하며 슬쩍 발을 뻗었다.
“악!”
엘리사의 발에 걸린 소년이 다시 넘어졌다.
“어머, 괜찮니?”
엘리사는 소년을 부축하는 척하며 소년의 주머니에 있는 남자의 지갑을 슬쩍 챙겼다.
“다치지 않았어? 미안해, 내가 앞을 잘 못 봤지, 뭐야.”
소년은 가자미눈을 하고 엘리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혹시 지갑을 슬쩍 뺀 걸 들킨 건가. 그렇다고 해도 꿀릴 건 없으니 엘리사는 당당하게 소년을 쳐다봤다.
“놔요!”
다행히 들킨 건 아닌지 소년은 엘리사의 손을 뿌리치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그럼 이제 사례금을 받으러 가볼까. 엘리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도 남자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놓칠 것 같았다.
“저기요!”
엘리사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지만, 듣지 못한 건지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저기, 잠깐만 멈춰봐요!”
“…….”
“저기요!”
몇 번을 소리친 후에야 비로소 남자는 멈춰 섰다. 겨우 남자를 따라잡은 엘리사는 거친 숨을 잠시 고른 뒤, 남자에게 지갑을 내밀었다.
“이거, 당신 거 맞죠?”
이럴 때 나오는 반응은 보통 두 가지였다. 왜 내 지갑을 당신이 들고 있냐며 놀라거나. 지갑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찾아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거나.
“…….”
그런데 남자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타인의 물건을 보는 것처럼 무심하게 지갑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야, 이 반응은. 혹시 이 지갑이 남자의 것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엘리사는 그 소년이 이 지갑을 가져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다.
“당신 거 아니에요?”
엘리사가 의구심을 품으며 재차 묻자 그제야 남자는 대답했다.
“맞아.”
허어, 초면부터 반말이구나. 약간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지금 엘리사는 평민이 입을 법한 린넨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고명한 가문의 도련님이신 것 같은데 지갑 간수 잘하세요.”
귀족이라는 걸 밝힐 생각이 없는 엘리사는 그가 반말하는 것에 대해 대꾸하지 않고 대신 그의 손에 지갑을 꼭 쥐여주었다.
“아니면 또 소매치기당할 거예요. 혼자 간수하기 힘들면 사용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에요.”
친절하게 조언까지 해줬는데 뭐가 불만인지 남자는 또 말없이 엘리사를 바라봤다. 눈빛에 의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아, 설마 내가 돈을 가져갔다고 의심하는 건가?
“한 푼도 안 건드렸어요.”
모처럼 선행을 베풀었는데, 의심을 사는 건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오해는 확실하게 풀고 넘어가야 사례금도 받을 수 있을 테니 엘리사는 재차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렇게 의심되면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용건은 그것뿐인가?”
“그럼요? 다른 용건이 있어야 하나요?”
엘리사가 되묻자 남자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는 엘리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며 돌아섰다. 어라, 그냥 가는 건가? 내 사례금은?
“저기요!”
남자에게 사례금을 받아야 연금술 재료를 살 수 있으니 엘리사는 남자의 팔을 잡았다.
“어?”
그 순간, 시야가 빙그르르 돌더니 목덜미에 날카로운 칼이 드리웠다. 시퍼런 섬광이 깃든 살기 어린 자수정 눈동자가 살벌하게 엘리사를 노려봤다.
“역시 다른 목적이 있었군.”
다른 목적이라니? 무슨 목적? 그것보다 지갑을 찾아줘서 감사의 인사는 못 할망정 다짜고짜 목에 칼을 대다니. 엘리사가 황망하다는 듯 쳐다보자 남자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제가 어떤 눈으로 당신을 보고 있는데요?”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고 들어올 것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엘리사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혹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불한당을 노려보는 시선으로 느껴졌다면, 정확하게 보신 거예요.”
“그 말은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불한당이라는 건가?”
“아닌가요? 소매치기당한 걸 도와줬더니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하긴커녕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데, 불한당이 아니면 뭐죠?”
엘리사가 빠르게 쏘아붙이자 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엘리사를 빤히 쳐다보며 미심쩍다는 어조로 물었다.
“정말로 감사 인사 때문에 날 다시 붙잡은 건가?”
의심은 더럽게 많고 끝까지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하네.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신은 공평하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신은 이 남자에게 완벽한 외모를 주었지만, 대신 싸가지를 가져갔다.
“그것도 있고, 사례금도 받으려고요.”
대놓고 사례금을 요구하는 건 다소 뻔뻔한 행동이었지만,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는데 제대로 사례금을 받지 못하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아 엘리사는 뻔뻔하게 나갔다.
“사례금은 보통 찾아준 물건 가격의 10퍼센트 정도 주니, 당신은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줘야겠어요.”
“어째서?”
“그야 제 목숨을 위협했잖아요. 그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보상도 해주셔야겠어요.”
엘리사가 얼른 달라며 손을 흔들면서 요구하자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이내 지갑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남자가 꺼낸 건 무려 백금화였다. 백금화 1개당 100골드의 가치가 있었다. 기껏해야 1, 2골드, 많게는 5골드 정도 생각했던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엉겁결에 돈을 받은 엘리사는 체면도 버리고 백금화를 살펴봤다. 혹시 가짜인 건 아닐까, 의심했는데 아무리 봐도 백금화는 진짜였다.
“부족한가?”
엘리사가 멍하니 돈만 바라보자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백금화를 하나 더 꺼냈다.
“부족할 리가요.”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더 받으면 그거야말로 정말 염치없는 행동이니 엘리사는 사양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군.”
“…….”
이 남자, 말을 곱게 하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걸까. 엘리사는 남자에게 뭐라고 하려다 손에 쥐고 있는 백금화를 보고 꾹 눌렀다. 그래. 어느 나라에 세 번 참으면 복이 온다던데 성격 좋은 내가 참아야지. 절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엘리사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남자가 픽 웃으며 돌아섰다. 명백한 비웃음에 기껏 눌렀던 짜증이 다시 치솟았다. 엘리사는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
“어휴, 잘생기고 돈이 많으면 뭐해. 성격이 더러운데.”
저런 남자는 한 마차, 아니 열 마차를 가져와도 사절이었다. 두 번 다시 상종하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엘리사의 어깨를 툭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