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03화 (103/104)

103. 날 미치게 하는 건 너뿐이라는 걸.

2017.08.28.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의 재경은 도준과 쏙 닮아 있었다.

모자 사이에 지독한 앙금을 새겨 넣은 장본인이지만 그럼에도 제아는 재경이 밉지 않았다.

얼마나 연희를 사랑했으면 그런 지독한 결정을 내렸을까. 도준의 지독한 사랑을 받아봤기에 가슴 저리도록 이해가 되었다.

오열하며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연희를 두고 두 사람은 먼저 내려왔다.

“오빠도 아버님 이제 용서해드려.”

납골당에 도착한 후로 침묵하던 도준이었다. 아마 그도 굉장히 마음이 복잡하리라.

그런 그가 안쓰러워 제아는 그를 품에 꼭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내가 더 오빠한테 잘할게. 더 많이 사랑해줄게.”

“제아 널 만나지 못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귓가에 닿는 눈물 젖은 그의 음성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만큼 단단한 팔이 아플 정도로 몸을 옥죄었지만 그럼에도 제아는 내색하지 않은 채 안겨 있었다.

납골당을 들린 후 연희는 제아의 집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연희의 방문에 놀라긴 했지만 윤식 부부는 연희를 반겨주었다.

어색하게 마주앉은 셋 중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연희였다.

“고마워요, 윤식 씨. 재경 오빠를 다시 만나게 해줘서.”

납골당에 안치해줘서 고맙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윤식을 더 놀라게 한 건 평온을 되찾은 연희의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흘러나오는 음성은 애잔했다.

“내가 고집만 안 부렸어도, 재경 씨가 그런 결정을 내리진 않았겠죠.”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시초가 재경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틴 자신의 고집 때문이었다는 걸.

“오늘 찾아온 건 내가 용서받으려고 찾아온 거예요. 오빠가 섰던 보증부터 주식 놀이, 그리고 끌어다 쓴 사채까지. 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오빠 사람들을 돈으로 사서 조정했어요.”

끊임없이 들이닥쳤던 불운, 그것 때문에 얼마나 자신을 탓했던가.

파들거리는 윤식의 입을 막은 건 윤영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제 서로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으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최종 선택은 모두 이 사람 몫이었으니까. 그러니 연희 씨는?”

하지만 이어지는 연희의 말에 이번엔 윤영이 더 놀랐다.

“내 아들 도준이를 자식처럼 키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젠 내가 그 은혜 평생토록 갚게 해줘요.”

잠시 말을 멈춘 연희가 차분하게 눈을 들어 윤영과 윤식을 번갈아보았다.

“문제아 양을 내 며느리 삼고 싶어요. 딸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고 내가 정말 잘할게요. 그러니까.”

많이 늦은 걸 알지만 지금이라도 만회하고 싶었다. 행복하고 편안하고 싶었다.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서 아주 간절하게 말이다.

“두 분의 소중한 딸 제아 양. 내 아들에게 허락해줄래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윤영이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답지 않은 반응에 윤식이 당황해서 얼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윤영아, 왜 울고 그래?”

“기뻐서 우는 거예요. 그것도 몰라요?”

화장지로 코를 푼 윤영이 연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요! 암요! 나도 정말 잘할게요! 아들 같은 사위 아니, 아들 사위로 생각하고 나도 정말 도준이한테 잘할 겁니다. 고마워요 연희 씨! 아니, 사돈!”

***

뜨거운 무더위가 한 풀 꺾이고 9월이 다가왔다.

그동안 제일 그룹 홍보팀은 인호의 지시 하에 제아의 이미지 마케팅에 들어갔다.

타이틀은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

부패비리 기업에서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는 중인 제일 그룹이 다시 한 번 이미지 쇄신을 향한 세찬 발돋움을 시작한 것이다.

일부는 마케팅 효과라고 부정적인 지적도 했지만 국민 대부분은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에 열광했고 각 언론사마다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하지만 제일 그룹은 레이디중앙을 통해서만 예비 신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공개했다.

Q. : 연예인보다 더 대세인 건 알고 있나. 국민들의 이목이 아주 뜨겁다. 현대판 예비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 어떤가.

A : 얼떨떨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볼을 꼬집어본다.(웃음) 제일가의 신데렐라가 되어서가 아니라 한도준이란 남자가 날 사랑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내가 신데렐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공주님이 될 생각도 없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내 아이의 엄마가 되려는 것뿐이고 시부모님의 며느리이며 한 기업에 속한 열혈 직원이 되려는 거다.

Q : 예비신랑이 재력에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는 완벽남이다. 불안하지는 않나?

A : 불안함을 느낄 사랑이면 아예 시작도 안 했다.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나 또한 그렇다. 그냥 지켜봐주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럼 내가 왜 불안해하지 않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Q : 집안 차이가 극심한데 혹시 집안의 반대는 심하지 않았는가. 혹시 임신 때문에 마지못해 허락을 해준 건 아닌가.

A : 반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부모 이기는 자식 없다고 부모님이 져주셨다. 그게 아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자식의 행복을 빌어주는 부모의 마음에서 허락해주신 거고 두 집안 모두 사위나 며느리가 아닌 아들과 딸로 생각하고 너무 잘해주신다.

Q :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A : 기대하면 실망할 것이다. 작은 펜션 하나 빌려서 스몰 웨딩을 하려고 한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고 그나마 해야 할 것도 시어머니가 모두 알아서 해주신다. 나는 그저 태교와 일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Q : 명색이 재계 2위인 제일 그룹 며느리가 될 건데 왜 호화스러움을 마다하고 스몰 웨딩을 택했나?

A : 요즘 한국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스몰 웨딩이 유행이다. 나 또한 젊은 사람이고 행복한 결혼을 복잡하게 준비하면서 스트레스 받기 싫을 뿐이다. 예쁜 결혼사진 한 장이면 만족한다. 아, 물론 시댁에서는 그간 뿌리신 게 많다고 하셔서 축의금은 다 받을 생각이다. 그 대신 받은 축의금은 모두 영아원에 기부할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호화스러움을 위해서 결혼한 게 아니다. 그러니 뭐든지 당연하다는 듯 호화스러움을 즐기고 싶은 생각도 없다.

Q : 결혼 후의 생활은 어떨 것 같나.

A : 내 직업을 사랑하고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열심히 일할 생각이다. 물론 가정에도 충실할 것이다. 그 대신 출산 휴가부터 육아 휴직까지. 나와 예비 신랑 둘 다 회사 혜택은 있는 대로 모두 끌어서 쓸 생각이다. 우리를 스타트로 제일 그룹 전 계열사 직원들도 회사 눈치 보지 않고 복지란 복지는 모두 쓰게 할 것이다.

Q : 영국의 다이에나비처럼 벌써부터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느낌이 어떤가.

A : 고 다이애너 황태자비는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나는 기분이 무지 좋다. 사랑해준다는데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사랑받는 거 좋아하는 여자다. 그리고 많이 부족하지만 그 이상으로 더 노력해서 더 사랑받도록 할 것이다.

Q :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미혼 여성들에게 완벽한 예비 신랑을 사로잡은 팁 한 가지 알려주자면?

A : 잘난 남자는 일찌감치 여자들이 알아보고 채가는 법이다. 참고로 나는 7살 때 예비 신랑을 만났고 내 거라고 입술 박치기로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이건 팁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면 그에게 자신에 대한 습관을 들게 하는 걸 추천한다. 나를 예로 들면 나는 항상 복숭아 향이 나는 제품들을 이용한다. 보디워시와 샴푸, 린스, 향수, 하다못해 입술에 바르는 립밤까지도. 예비신랑은 아직까지도 그게 내 체향이라 착각하고 있다.(웃음) 사실 복숭아 향이 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도 안 씻으면 냄새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가 드디어 끝이 났다.

“수고하셨어요!”

씩씩하게 인사를 한 제아는 3명의 여기자와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도준의 직진 본능을 발휘해 무섭게 제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다정하게 제아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부풀어 오른 배를 부드럽게 손으로 어루만졌다.

제 여자를 바라는 눈빛이 너무 따사롭고 달콤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여기자들이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제일 그룹의 후계자가 이렇게나 눈부신 외모일 줄이야.

“오빠!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

새빨개진 얼굴로 제아가 손을 밀어내자 그제야 도준이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여 다른 이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아, 시야가 좁아서 너밖에 안 보였어.”

아, 시야가 좁아서 내 여자만 보였다고? 난 몰라! 몰라!

여기자들이 부러워죽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수고했으니 식사하고 가세요. 괜찮은 식당으로 담당자가 안내해줄 겁니다.”

다시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준은 제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조심히 이끌었다.

뒤에서 지켜보든 말든.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다정하게 눈을 마주한 채 귓속말을 건네며 말이다.

“이번 주주 총회 때 미국 계약건만 성공하면 널 제일 어패럴 이사 자리에 앉히겠다고 했어.”

도준이 가평에 감금되는 바람에 취소되었던 미국 출장 건, 이번에 가서 완벽하게 성공하고 계약까지 체결해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걸 왜 쉬쉬 비밀로 하나 했는데 그 공을 그녀에게 돌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빠 공을 가로채긴 싫거든요?”

“내가 왜 끝까지 제일 어패럴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아?”

도준이 가볍게 제 이마로 제아의 이마를 콩 박는다.

“제일 어패럴은 결혼 선물이야. 물론 거저먹는 건 안 되고 15분의 노력이 필요하지.”

“……?”

“내일 오전에 프레젠테이션 자리 마련해놨으니 짧고 강렬한 15분으로 준비해놓도록. 날 미치게 한 것처럼 주주들도 미치게 설득해봐.”

쟁탈해야 하는 결혼 선물이라. 갑자기 승부욕 생기네. 그런데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의 눈이 느닷없이 휘둥그레졌다. 뭔가를 떠올린 듯.

“결혼식!”

“아, 내일 결혼식.”

둘 다 내일 결혼식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은 듯 동시에 다시 말했다.

“뭐 어때. 이젠 해도 기니까 일 끝내고 결혼식 하면 되지. 그치, 오빠?”

“프레젠테이션은 금방이니까.”

***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제아가 준비한 15분간의 프레젠테이션은 완벽했고 만장일치로 제아를 차기 이사로 받아들였다.

주주들은 벌써부터 치솟을 주식 배당금에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단, 두 가지의 조건이 붙었다.

임신을 고려해서 육아 휴직에 출산 휴가까지 모두 끝난 후 이사 취임식은 하기로 했고, 최고 경영자 자리가 처음인 만큼 인호가 적응이 될 때까지 곁에서 보좌하기로 말이다.

“결혼식 올리러 출발합니다……?”

오늘 운전기사를 자처한 지로는 힐끗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을 지켜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천방지축 문제아가 저렇게나 일벌레로 변했을 줄이야.

결혼사진을 찍을 환상적인 메밀밭으로 향하는데도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서로 서류를 주고받으며 사업 이야기뿐이다.

정말 대단한…… 예비부부로다. 사랑하면 서로 닮아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제아야!”

펜션에 도착하자 그들을 반기는 건 지연뿐이었다. 연희는 윤식에게 처음으로 배운 고스톱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한 회장은 윤영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대화 주제는 들어보나마나.

“지연아, 할아버님 또 엄마랑 반찬 사업 이야기하지?”

한 회장이 요즘 꽂힌 게 바로 반찬 사업이었다.

부족한 딸을 받아준 고마움에 대한 표시로 윤영이 보낸 반찬 맛에 홀라당 반해버린 것이다.

제일 그룹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말년에 심심하던 차에 소소한 재밋거리를 찾으려는 게 분명했다.

결론적으로 어른들은 지금 자식, 손자들에겐 관심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그게 섭섭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했다.

결혼허락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가까이 지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둘 다 고아인 윤식 부부가 한 회장을 제 부모처럼 잘 따르는 게 발단이었다.

기가 막힌 음식 대접에 고스톱부터 바둑 장기까지 윤식이 성심성의껏 심심하지 않게 상대해주었다.

그 맛에 푹 빠진 한 회장은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본가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한 회장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정말 무당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꽃뱀 한 마리를 그냥 내버려두니 자식 같은 사돈에 쌍둥이 손자까지 우르르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문제아, 우린 얼른 메이크업하자!”

모든 걸 생략하려 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최소한 결혼사진은 제대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웨딩 사진작가를 섭외했다.

유명한 브랜드에서 결혼에 관련된 협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럼에도 모두 거절했다. 드레스와 턱시도는 청담의 한 디자이너 숍에서 안목이 훌륭한 연희가 직접 골라주었고 제아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헬퍼의 도움을 받아 제아가 웨딩드레스까지 입자 지연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대박! 이게 어떻게 임산부야?”

허리선이 가슴 바로 밑에서 떨어지는 풍성한 탑 스타일의 벨라인 드레스가 만삭처럼 나와 있는 제아의 배를 거의 커버해주었다.

학처럼 긴 목선부터 쇄골라인을 지나 떨어지는 어깨선이 곱게 드러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자태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플라워 레이스로 촘촘한 가슴라인 바로 밑을 리본이 잘록하게 조여 주어 드레스 핏이 더 예술이었다.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칼은 그대로 결만 살리고 티아라 왕관을 쓰자 그야말로 예술에 환상이 더해졌다.

“도준 오빠, 오늘 또 불타오르게 생겼네. 쌍둥이에 또 쌍둥이 임신하는 거 아냐?”

제아는 대답 대신 수줍은 미소만 지었다.

밖으로 나가자 도준 대신 제아를 기다리고 있던 지로마저도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 잠시 넋을 잃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지로를 정신 차리게 한 건 이번에도 지연이었다.

“어이, 한지로. 남의 여자한테 넋 놓지 말고 침이나 닦으시지. 그러다 오빠한테 또 쌍코피 터진다?”

마지못해서 제아에게 시선을 뗀 지로가 노려보자 지연이 낼름 혀를 내밀었다.

지로와 지연의 도움을 받아 사뿐사뿐 걸음을 옮길수록 제아는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걸었을까. 흐드러지게 안개꽃처럼 피어난 메밀밭 가운데, 도준 그가 서 있었다. 아찔하고 완벽한 자태로.

“거기 신랑분! 신부 모셔왔어요!”

지연이 힘차게 외치자 그제야 도준이 천천히 돌아섰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오후 햇살이 아직은 뜨거움을 머금고 있지만 그 햇살마저도 도준은 제 후광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잠시 멈추어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을 뇌에 각인하고 심장에 아로새긴 후에야 도준이 먼저 움직였다.

흙바닥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쪽 무릎을 꿇은 도준이 지그시 제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꺼낸 반지 케이스를 열어 제아에게 내밀었다.

“나랑 결혼해줄래, 문제아?”

푸르른 바닷물을 쏟아낼 듯 청명한 파란 하늘과 온 사방에 깔린 아름다운 꽃들과 아찔한 향기.

사랑하는 남자가 프러포즈를 하고 소중한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었다.

2세들은 뱃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조금 떨어진 펜션에선 그들의 부모들이 스스럼없이 가족처럼 어울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최고의 프러포즈가 어디 있을까.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반지를 받으면서 첫 고백을 흘렸다.

“그거 모르지? 20년 전에 오빨 구해준 거, 잘생긴 왕자님이랑 결혼하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졌네.”

반지를 받아든 제아를 도준이 번쩍 안아서 새하얀 꽃들이 만발하는 메밀밭으로 걸어가는 순간, 사진작가가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메밀밭 한가운데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둘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뜨거운 무언가가 축축하게 심장을 적시면서 거칠게 뛰게 만들었다.

그건 아마도 서로를 향한 지독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미친 듯이 치솟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둘을 감싸는 순간, 사진작가가 외쳤다.

“신랑 신부님, 지금 각도 아주 예술이에요. 키스 한 번 갑시다!”

눈부신 햇살마저 빛을 잃을 만큼 ,지금 제아는 심장 떨리게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이름 세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를 미치게 하는, 평생토록 한 명밖에 없을 내 여자 문제아.

내 여자가 대담하게 눈을 마주치며 사랑을 고백한다.

“내 목숨보다 오빨 더 사랑해.”

그녀의 고백은 대담하지만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드는 손끝은 떨린다.

“내가 널 더 사랑해.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이상으로.”

그녈 향한 자신의 사랑. 아마도 제아는 죽을 때까지 모르리라. 서로의 손가락이 단단히 얽히는 순간…….

“그럼 증명해 보던지, 한도준 씨.”

숨 막힐 만큼 관능적인 미소를 입 꼬리에 매달며 제아가 대담하게 그를 자극했다.

“내가 미치도록, 아주 야하게 키스해줘.”

감히 누구 말이라고 거부할까. 제아의 시선을 단단히 고정한 채, 도준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닿기 전, 예고를 하고.

“잊었나 보군. 내가 키스는 끝내주게 잘한다는 거.”

곧이어 보들거리는 입술이 뜨거운 입안으로 빨려들었다.

두 개의 입술이 강렬하게 비벼지면서 고개가 점점 틀어지고 깊숙이 파고들자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이 단단한 목을 감싸고 가녀린 등을 휘감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진작가가 연신 셔터를 눌렀다.

미치도록 심장을 자극하는 키스를 나누면서 서로가 깨달았다.

날 미치게 하는 유일한 그대가 눈앞의 이 남자뿐이라는 걸.

날 미치게 하는 유일한 그대가 눈앞의 이 여자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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