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 입술로 너한테 하기도 바빠.
2017.08.24.
“오빠가 말한 운동이라는 게 설마…….”
어느새 손목의 연약한 살결을 타고 오르는 도준의 손가락 움직임은 관능적일 정도로 섹시하다.
어떻게 어루만져야 반응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은밀하면서도 끈적이는. 그러니 끝까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 순간이었다.
“분명 우리 부모님한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나한테 부모님 말씀 들으라고 했잖아.”
“제아 네가 발휘하라는 융통성이…….”
“……?”
“바로 이런 거 아닌가?”
말문이 턱 막힌 제아였다.
물론 융통성 좀 발휘하라고 잔소리를 좀 하긴 했지만 그 융통성이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발휘될 줄이야.
침실 내부는 심플하고 새하얬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몽환적이었다.
침대 중앙 기둥에서부터 야릇하게 흘러내리는 시폰과 스며드는 바람에 간간히 부드럽게 흔들리는 시폰 커튼.
거기다 새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넓은 침대마저 어지럽혀달라는 듯 단정한 자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40분이면 가벼운 운동인 거지.”
대수롭게 흘리는 말까지도 노골적으로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물론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적어도 장기전만 뛰는 그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자신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운동이리라.
“아닌가?”
은밀한 속삭임과 함께 야들야들한 목덜미의 살결을 뜨거운 숨결로 어루만지는 도준 때문에 제아는 그만…….
아, 나도 모르겠다!
‘나 잡아먹으세요.’라는 의미로 휙 돌아서서 도준에게 와락 안겨들고 말았다.
나부끼는 커튼을 스치며 선선한 아침바람이 스며들었다. 구김이 잔뜩 가 있는 새하얀 시트 위에서 제아는 도준에게 꼭 안겨 있었다.
등 뒤에 바짝 붙은 도준의 단단한 피부 감촉이 좋다. 매끄러운 제 살결 위를 스치는 바람의 감촉까지도.
몸 곳곳에 닿는 그의 입술은 섬세했고 손길은 다정했다. 그래서 더 몸이 나른하게 풀어지고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촉촉이 땀이 배인 살결 위로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살짝 부풀어 오른 배에서 오래 머물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임신을 한 이후 유난히도 그가 공을 들이는 곳이 바로 배였다. 입 맞추고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사랑받는 그 느낌이 좋으면서도 왠지 부끄러워진 제아는 미약하게 그의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똥배라고 착각할지도 모를 만큼 봉긋하게 솟아오른 배가 조금은 민망하기도 한 것이었다.
“이제 그만 봐. 창피하단 말이야.”
그녀가 몸을 뒤척여 보았지만 쫓아오는 그의 입술은 집요했다.
“지금 실컷 해놔야 하니 말리지 마.”
무슨 말이냐는 듯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흑단처럼 탐스러운 도준의 짙은 머리칼이 보였다.
“아들은 엄히 키워야 해. 그러니 뱃속에 있을 때 실컷 해주고.”
“태어나면 안 해준다고?”
“내 입술은 하나뿐이야. 이 입술로 너한테 하기도 바빠.”
그의 말인즉슨, 쌍둥이 아들에게까지 나누어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난 오빠가 우리 아들에게도 다정한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딸도 낳아주던지.”
얼굴을 든 도준이 나른하게 젖은 눈빛으로 제아를 올려다보며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독히도 붉은 입술로 유혹하듯이.
“널 닮은 딸이라면 실컷 해줄 의향 있는데.”
피부 밑에 은밀하게 감돌던 열기가 그의 미소 한 번에 다시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순간 FM인 도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에 걸터앉아 시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벌써 40분이 지났군.”
그때였다. 촉촉이 젖은 매끄러운 살결과 탐스럽게 흘러내린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맨 등에 아찔하게 와 닿았다.
“오빠가 한 시간 더 늦게 출근하면…….”
나긋나긋하다 못해 홀리듯이 귓가를 건드리는 음성이 그를 휘감았다.
“나도 오늘 출근 재끼고 푹 쉴 거야.”
설핏 고개를 틀자 앙큼한 눈꼬리를 살살 내리며 눈웃음을 흘리는 제아가 눈을 마주쳐왔다.
“침대 위에서 오빠한테 할 말도 무지 많거든.”
그의 유혹이 끝나는 순간 이번엔 제아의 유혹이 시작되었다.
***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그 안에서 체구가 작은 노인이 남자 한 명을 대동하고 내렸다.
지팡이를 휘둘러 여기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았던 고약한 한 회장의 등장에 김 비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회, 회장님 오셨습니까?”
얼른 마중을 나가보지만 한 회장은 김 비서를 투명인간처럼 휙 지나쳐 곧바로 집무실로 돌진했다.
공석이었던 문제아 팀장의 자리가 드디어 주인을 찾은 게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새를 못 참고 또 무슨 난리를 치려고.
임신까지 한 제아가 또다시 봉변을 당할 걸 생각하니 김 비서는 바짝 입안이 메말랐다.
어떻게든 알려주어야 하는데 집무실에 연락을 할 여유도 없고 그 앞을 막을 권한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린 제아는 서류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려 4개월만의 복직이었기에 그간 확인해야 할 자료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도준은 묵묵히 제아의 옆에 앉아 아직까지도 빼어난 각선미를 자랑하는 한쪽 다리를 살살 주무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붓기가 빠지라고 다리를 주물러주는 건지, 일 그만하고 나 좀 봐달라고 야릇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려는 건지. 그 손길이 불러오는 열기 때문에 그녀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빠, 나 이제 괜찮아. 나 아직 다리 붓기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제발 나 일 좀 하자, 응?’ 애절한 눈빛을 보내보지만.
“초기부터 잘 관리해줘야 고생 안 한다고 했어.”
아주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인터넷이 모든 게 정답은 아니거든? 틀린 것도 엄청 많아.”
“인터넷에서 검색한 거 아닌데.”
도준이 섬세하게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제아를 바라보았다.
“임신 육아 전문 서적에서 봤어.”
“……그런 책은 또 언제 샀어?”
“너 임신한 거 안 날 바로 샀어. 관력 서적은 다 사고 싶었지만 바쁜 관계로 베스트셀러인 7권만 샀고 모두 정독 후 내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해놨어.”
누가 FM 아니랄까 봐, 정말. 이 남자는 오늘도 제아를 할 말 잃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 정말 괜찮……?”
“넌 괜찮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
“임신한 순간부터 힘들었을 텐데. 나는 그런 널 4개월이나 방치했어.”
자신이 숨기고 도망간 거지 그가 방치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부딪혀오는 눈빛 속에 담긴 그의 아픔이 느껴졌다.
미처 몰랐다. 도준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줄은. 제아는 그제야 내딛는 걸음에도 벌벌 떠는 그의 과민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도준이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린다.
“소파 팔걸이에 등 대고 내 다리 위에 그냥 두 다리를 올려.”
“오빠아!”
“얼른.”
이런 그를 감히 어떻게 거부할 수가 있을까. 결국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아가 도준에게 다리를 올리는 순간, 노크도 없이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집무실의 문을 연 한 회장은 드디어 나도 노안이 왔구나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손자 놈이 제 집무실에 다소곳하게 앉아 여자의 다리나 주무르고 있는 게 보일 리가 없으니.
화들짝 놀란 제아가 얼른 다리를 내렸다.
그와 달리 너무도 덤덤한 도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오셨어요, 할아버지.”
“점심이나 한 끼 하자꾸나.”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우선 참는다, 내가.
형형한 그의 시선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아에게 옮겨갔다.
“거기 아가씨도 같이.”
회사 근처의 고급 일식당 주차장으로 두 대의 고급 세단이 들어섰다.
얼핏 보니 주차장 바닥은 반들거리는 자갈이었고 낮은 굽이긴 하지만 제아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래서 도준은 차에서 내리는 제아를 얼른 부축하며 주의를 주었다.
“바닥이 자갈이니 조심해서 걸어. 잘못하면 넘어지……? 윽!”
순간 도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쪽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이 눈꼴셔 보다 못한 한 회장이 뒤에서 지팡이로 도준을 내리친 것이었다.
‘저런 팔불출 같으니라고!’
제 나이가 벌써 불유구(不踰矩)가 넘었다. 게다가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까지 짚고 있건만!
그런데도 손자란 놈이 할아비는 안 보이고 제 여자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오두방정 떠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젊은것들이 앞에서 걸리적대지 말고 얼른 비켜라!”
괜히 성질을 버럭 내며 손자의 어깨를 다시 한 번 지팡이로 내리친 한 회장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일식당임을 알고 임산부는 날것을 먹으면 안 된다며 정색하는 도준의 옆구리를 제아가 꼬집고 나서야 고얀 손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아가씨는 한 회장의 성에 차지 않았다.
못마땅한 그의 시선이 제아의 얼굴에서 좀 더 타고 내려가 아직 많이 나오지 않는 배에 머물렀다.
―꽃뱀 한 마리가 우물 안에 잠자고 있는 이무기를 냉큼 무니. 그 이무기가 머리 두 개 달린 황금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다 훔쳐보는 회장님을 덮쳤다는 거죠?
―길몽에 태몽이요, 그것도 범상치 않은. 꽃뱀이야 보잘것없지. 하지만 그 꽃뱀에게 물린 이무기가 품은 두 개의 황금 용 머리는 필시 나라에 이름을 떨칠 인물들이 날 게야. 두고 보라지. 대통령 감이 나올지 아나?
―아, 혹시라도 꽃뱀 뜯어낼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요. 그 꽃뱀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이무기가 용이 되고 그 용이 황금색을 띄울 테니. 그리고 애초에 손 귀한 게 회장님네 팔자야. 그런데 그 꽃뱀이 있어야 손을 많이 볼 수 있어.
아주 기가 막히게 용하다는 무당 집에서 해준 꿈 풀이가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했다.
그래, 저 황금 용들을 생각해서 참아야지 어쩌겠누.
한 씨 가문 대대로 자손이 한 명 이상 넘어본 적이 없었다.
딸로 연명하다 가뭄에 콩 나듯 아들이 태어나는 기구한 가문의 팔자.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연희도 손자 놈 하나 달랑 낳고 아기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으니.
단연코 아들 쌍둥이는 한 회장 가문의 족보에 없었다.
제 여자밖에 모르는 손자놈이 얄밉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또 좋은 점도 있었다.
제 말은 안 들어도 저 아가씨 말에는 꿈뻑하니 저 아가씨만 휘어잡으면 손자 놈은 제 입맛대로 움직이리라.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한 한 회장은 휙 하고 손자 놈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던졌다.
“좋은 날 내가 받아왔으니 결혼 날짜는 이날로 해라. 결혼식도 나랑 네 어미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흰 결혼식만 하면 돼, 그게 허락 조건이다.”
‘결혼을 허락하겠다는데 감히 거절은 없을 것이다.’라고 기고만장해하던 한 회장의 예상은 이번에도 어긋났다.
“결혼 날짜는 할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단, 결혼 방식은 제아가 하자는 대로 할 생각입니다.”
또 팔불출 납셨다. 흰 눈썹을 거칠게 씰룩이며 이딴 결혼 당장 때려치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순간…….
“결혼식은 스몰 웨딩으로 진행할 겁니다.”
무, 무슨 웨딩? 듣도 보도 못 한 단어에 한 회장이 잠시 생각하는 그 틈을 도준은 놓치지 않았다.
“제아가 임신을 해서 너무 성대하게 하는 결혼식은 스트레스를 받을 거예요. 그래서 별장 하나 빌려 가족들만 초대해서 조촐하게 선약만 할까 합니다.”
“이놈아! 내가 그간 결혼식에 뿌린 축의금만 해도 빌딩 몇 채는 샀다! 그리고 다 그런 자리에서 내 편인지 아닌지 확인을 다시 하고 편먹는 게다! 뭘 알지도……?”
“축의금은 받으세요. 축의금 낸 명단으로 할아버지편이 누군지 확인도 하시구요. 단 축의금은 지원 받지 못하는 영아원이나 보육원을 찾아서 모두 기부할 겁니다. 축의금을 시점으로 제일 그룹에서도 지속적으로 계속 후원할 예정이구요.”
“……뭐, 뭐라?”
“부패한 이미지로 전략해버린 제일 그룹의 이미지를 다시 쇄신할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제일 어패럴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유는 투명 경영을 선언하고 국민 기업으로 거듭나려 노력하는 걸 증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젠 제일 그룹도 국민 기업에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기업으로도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한국 재계 2위 그룹의 후계자인 제가 소박하게 스몰 웨딩을 하고 축의금은 모두 기부를 한다. 톡톡한 홍보 효과가 될 것이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되는 첫 번째 시발점이 될 거예요.”
능수능란한 도준의 화술에 한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표정이 변하는 한 회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말을 끝맺었다.
“이게 모두 제아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그리고 도준은 따스하고 배려 넘치는 제아의 성격에 딱 맞게 영국의 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처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다.
한국 여자들이 사랑하는 현대판 신데렐라 1호이자 주목받는 패션 아이콘인 제일 그룹의 며느리로. 그가 아닌 언론에서 그렇게 하도록 말이다.
***
초인종 소리에 연희의 떨리는 눈빛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음식은 당연히 가정부가 차렸지만 입덧을 하는 도준을 위해 그녀가 따로 준비한 음식이 있었다.
자신이 임신했을 때 입덧을 같이 하던 재경이 유독 잘 먹었던.
“……왔니?”
“네.”
모자의 메마른 인사를 단번에 깨버린 건 씩씩한 제아의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녁 식사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셋인데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거의 뷔페 수준이었다.
“웬만한 음식은 다 하라고 해놨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저는 이제 입덧이 가라앉아서 뭐든지 잘 먹어요, 어머니.”
제아는 연희에게 싹싹하게 웃으며 복스럽게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도준에게 이것저것 반찬을 골라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준은 영 입맛이 없는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전에는 생색내는 듯한 그 모습이 그렇게 얄미웠건만, 이제는 자신을 대신해서 오랫동안 아들을 챙겨주었을 제아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네 아빠 엄마가 아마도 전라도 분이셨던 듯해.”
무슨 말이냐는 듯 응시하는 둘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의자에서 일어난 연희는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콩국수를 도준 앞에 놓아주었다.
“전라도가 콩국수에 소금 대신 설탕을 넣어 먹는다지? 내가 널 임신했을 때 네 아빠가 다른 건 못 먹어도 콩국수에 설탕을 엄청 넣어주면 그렇게 잘 먹더구나. 그러니 너도 한번 먹어보렴.”
제아가 식탁 밑으로 다리를 툭 치는 바람에 도준은 마지못해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번 떠먹었다.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아니, 오랜만에 입맛이 돈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면은 별로 당기지 않지만, 달달하면서도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물이 일품이었다.
그가 너무 잘 먹는 모습에 궁금한 제아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번 떠먹자마자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우웩! 이게 설탕물이야? 콩물이야?’
하마터면 입에서 뱉어낼 뻔했다. 식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연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젠 꽤 다정해진 그녀의 눈빛이 제아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너처럼 그랬단다.’
업무 전화인지 도준이 힐긋 두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우자 연희가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스몰 웨딩을 원한다고 들었다.”
그녀의 말에 제아는 심장이 마구 두근거린다. 며칠 전 도준의 출근 시간을 1시간 늦추고 침대에서 나눈 대화의 주제가 바로 결혼이었다.
다행히도 도준은 흔쾌히 동의를 했고 한 회장까지 설득을 했다.
하지만 연희가 만약 성대한 결혼식을 하라고 하면 어쩌지?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은데. 미치도록 갈등이 된다.
그런데 이어지는 연희의 말은 뜻밖이었다.
“물론 못했지만 나도 그땐 스몰 웨딩을 원했었지. 그 사람이랑.”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잔잔한 말투. 말투처럼 잔잔한 눈빛으로 연희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그 스몰 웨딩, 내가 도와주면 안 되겠니?”
“……?”
“내가 하고 싶었던 장소와 꼭 입고 싶었던 드레스가 있단다. 다른 건 몰라도 예물도 꼭 맞추어주고 싶고. 내 아들 턱시도도…… 직접 골라주고 싶구나.”
태연한 척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연희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지금 제아의 눈에 비치는 차가운 얼음을 깨버린 눈앞의 여자는 연약하고 상처 받기 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제 시어머니가 될, 이젠 도준을 자연스럽게 제 아들이라고 부르는.
제아는 연희를 향해 생긋,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예물 싫어하는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결혼 준비도 어머니랑 꼭 하고 싶었는데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도준이 무뚝뚝하게 연희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 콩국수 더 있어요?”
“그, 그럼! 아주 많이 있다!”
잠시 놀란 듯 멈추어 있던 연희가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났다.
“식사 끝나면 납골당에 어머님 모시고 갈까 해.”
무슨 말이냐는 듯 제아가 도준을 바라보았다.
“아버지한테 인사하려고.”
전화는 윤식이었다. 윤영도 그리고 연희도 화장만 했다고 알고 있는 그의 아버지는 납골당에 있다고 했다.
그의 인생을 움켜쥐고 비틀어버린 채 던져버린, 미치듯이 원망하고 또 원망했던 아버지란 남자.
이젠 마지막 남은 가슴의 응어리를 털어낼 차례였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줄래, 문제아?”
제아 너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가슴 깊숙이 박혀버려 보이지도 않는 끔찍한 가시를 유일하게 빼줄 수 있는 제 여자.
식탁 밑, 무릎 위로 꽉 그러쥐고 있는 도준의 커다란 손을 작은 손이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러곤 사랑스럽게 도준을 올려다보며 사람 미치게 하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겁에 질린 그가 내미는 손을 제아는 이번에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거 아냐? 그럼 아버님한테 며느리랑 손자도 인사 안 시켜주려고 했어?”
죽으려고 했던 그를 몸을 날려 입술 박치기까지 하면서 살려내었던, 처음 소년과 소녀로 만났던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