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01화 (101/104)

101. 난 완벽한 신혼 생활을 즐길 거야.

2017.08.21.

“아들이니?”

호수처럼 잔잔한 음성에 제아는 뒤늦게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네, 아들이에요. 그것도 아주 건강한 쌍둥이입니다.”

“배 나온 걸 보니. 아들 같긴 하구나.”

갑자기 왜 변했는지 모르지만 이유가 뭐가 중요할까. 허물어지려는 틈을 완벽하게 공략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아는 용기를 내어 준비했던 초음파 사진을 조심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싫어하셔도 손자의 존재는 알려드리는 게 기본 도리인 것 같아서요.”

“…….”

“오빠를 닮아서 똑똑하고 훤칠한 손자들이 태어날 거예요.”

“방금 그 말.”

연희가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마주치자 그전에 그녀를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긴장감이 제아의 등골을 훑어 내렸다.

“회장님께도 그대로 하려무나.”

“……네?”

“우리 집안이 원래 손이 귀한 집안이다. 쌍둥이란 말은 꼭 하고 똑똑한이란 표현 대신에 도준이처럼 사업 수완 좋은 손자라고 바꿔서 표현하는 게 나을 듯하고. 너무 저자세로 나가면 오히려 무시당할 수 있으니 당당하게 설득하는 게 도움이 될 거다.”

옴마야, 이제는 귀까지 잘못됐나 보다. 높낮이가 없는 일정한 톤인데도 왜 이렇게 다정하게 들리는지!

게다가 한 회장을 공략할 팀까지 알려주다니. 무심한 하늘이 드디어 응답하는 순간이었다.

울컥 솟아오른 감동에 제아의 눈시울이 시큼해지는 순간…….

“뭐 하니, 얼른 들어가 보지 않고.”

연희가 할 일을 떠오르게 해줬다.

“아, 네! 감사합니다!”

군기 바짝 든 신참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제아는 그래도 들어가지 않고 연희를 빤히 응시했다.

차를 입으로 가져가던 연희가 왜 그러냐는 듯 시선을 틀자…….

“……어머니.”

평생 못 해볼 줄 알았던 호칭을 수줍게 토해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한 회장의 방문에 노크를 한 후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연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제아가 들어올 줄 알았다는 듯, 한 회장은 몸을 병풍 쪽으로 틀고 앉아 있었다.

왜소한 체격이지만 굽은 등이 왜 이렇게 고집스러워 보이는지.

“가방끈이 짧아서 그러나. 기본도 못 배운 아가씬가 보구먼.”

첫마디부터 노골적인 무시였다. 하지만 가장 힘들 것 같았던 시어머니의 후광을 얻은 제아는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제게 기본이 아주 제대로 박힌 아가씨라고 칭찬하신 게 할아버지세요. 설마 기억 안 나세요? 전 아주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당찬 말과 친근한 말투에 기가 막힌 한 회장이 홱 몸을 틀었다.

그러자 제아는 기다렸다는 듯 살그머니 눈꼬리를 내리며 눈웃음을 살살 흘렸다.

돌 같은 손자 녀석을 홀린 그 눈웃음 말이다.

그 녀석처럼 나도 그렇게 꼬셔보겠다 이거구만! 흥, 나를 뭘로 보고!

“내가 망언을 했어! 사람은 길게 보아야 하는 법이거늘! 그렇다고 잠깐 보고 한 그 말을 믿은 아가씨가 아둔한 게야! 알아? 이래서 길게 배워야……?”

공격할 수 있는 약점을 틀어잡아 확 누르려는데 말이 또 싹뚝 잘렸다.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길게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요.”

“……?”

“할아버지도 저를 잠깐 보고 판단하신 선입견으로 싫어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길게 봐주세요. 저 정말 괜찮은 손자며느리거든요.”

“……!”

“가방끈 길고 스펙 좋고 경력 좋은 남자들도 이루어내지 못한 업적, 가방 끈 짧은 제가 이루어 냈어요. 제일 어패럴이 재기에 성공한 거, 제 기획이 아주 톡톡히 한몫했거든요. 할아버지도 보고 받으셨을 테니 그건 아실 거라 생각해요.”

물론 그 모든 기획안에 도준의 입김이 닿았다는 건 비밀.

한 회장의 흰 눈썹이 구불구불 격하게 씰룩인다.

그때도 숨이 턱 막히도록 말을 잘하더니만, 오늘은 더 가관으로 말을 잘한다. 그것도 쥐뿔도 없는 주제에.

게다가 말끝마다 자기 할아버지라도 되는 듯 자꾸 ‘할아버지’라 호칭하는 게 심히 거슬렸다.

정신 차리라고 물벼락 한 번 다시 주든가 해야지!

“듣다 보니 거 기분 나쁘구먼! 뉘 맘대로 감히 할아비라 나를 불러?”

찻잔을 집는 한 회장의 손보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제아가 더 빨랐다.

무방비한 한 회장의 눈앞으로 이상한 사진이 쑥 내밀어졌다.

“증손자들에게 물벼락을 맞게 할 셈이세요?”

“……?”

“가을이 끝나는 11월, 제가 건강한 증손자 쌍둥이를 안겨드릴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라 부른 거구요.”

“……!”

“이 소식 전해드리려고 물벼락 맞을 각오를 하고 찾아왔는데, 이 정도면 기본은 되지 않았나요?”

한 회장의 손길이 멈추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아가 생긋 웃었다.

“사장님의 유전자를 받아서 건강한 데다 사업수완 좋고 외모까지 아주 훌륭한 증손자들이 태어날 거예요. 제일 그룹을 한국의 1위 기업으로 만들 희대의 경영자 쌍둥이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제아는 연희가 집어준 공략법을 떠올리며 말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닮았다는 말은 빼야 할 것 같고. 손이 귀한 집안이라고 했으니.

“저는 젊고, 사장님은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제 미래 자식 목표가 독수리 5형제입니다. 쌍둥이 둘은 확보했으니 앞으로 3명 남았어요.”

“…….”

“그래도 안 될까요?”

“…….”

“할아버지?”

“…….”

“회장님?”

“…….”

“저기요?”

건방진 아가씨의 말은 지금 한 회장에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귓전에서 울리는 건 딱 세 단어.

아들, 증손자, 쌍둥이.

눈에 보이는 건 뭔지도 모를 흑백 사진뿐이었다.

한 회장이 미동도 없자 불안해진 건 제아였다.

필요 없으니 썩 나가라고 쫓아내거나, 마지못해 받아주는 척하거나. 모 아니면 도라고 예상했는데 감당하기 힘든 이런 무반응은 심히 당황스럽다. 그럼 다른 작전을 짜서 다시……?

짙은 한숨과 함께 제아가 일어나 몸을 트는 순간, 호통과도 같은 한 회장의 외침이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어디서 감히 협박질이야?”

돌아서니 형형한 눈빛으로 제아를 쏘아보고 있는 한 회장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얼굴이 아닌 부풀어 오른 배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성질부터 내느라 보지 못한 게 뒤늦게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도준이 그 녀석, 책임감 없이 그룹을 버리겠다 말겠다 가볍게 결정하고 말로 내뱉어? 오늘 중으로 와서 당장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해! 다른 건 몰라도 버르장머리 없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해줄 수 없으니! 그 거만한 녀석이 무릎 꿇고 사과하면 내가 널 한 번 고려해보마!”

이대로 얌전하게 넘어가기엔 울화통 터져 죽을 것 같아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을 걸고도 제 손자 놈의 성격을 알기에 사실 그게 가능할지는 한 회장도 미지수였다.

“무릎 꿇고 사과에다가 앞으로 착한 손자가 되겠다는 약속까지 받게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꼭 저와 뱃속 쌍둥이들 받아주셔야 해요? 아주 착하고 기똥찬 손자며느리가 되겠습니다!”

무, 무슨 똥찬? 한 회장의 메마른 입술이 작게 ‘허’ 하고 벌어졌다.

하지만 너무 기쁜 마음에 과한 의욕이 앞선 나머지 어른께 쓰면 안 되는 표현까지 쓴 것조차 모른 채 제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눈까지 반짝이며.

그리고 정확히 5분 후에, 한 회장의 눈과 입은 태어난 이래 가장 휘둥그레 치떠졌다.

그의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간 것이다.

오만하고 도도한 손자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것도 모자라, 큰 절을 올렸고 약속까지 떠억 했다.

“잘못했습니다, 할아버지. 앞으로 버릇없이 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회사에 잠시 소홀했던 만큼 더 노력할게요. 3년 안에 대성 그룹 제치고 제일 그룹을 한국 서열 1위 기업으로 올려놓겠습니다.”

드디어 손자 놈의 입에서 ‘할아버지’란 호칭까지 들어버렸다.

도준이 나가자마자 한 회장은 벌러덩 누웠다.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져서일까. 세운 무릎 위에 올린 한쪽 다리를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린다.

그러다가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올 초에 너무 생뚱맞게 꾸었던, 우물 안에서 갑자기 솟아나서 하늘로 승천한 용꿈이 말이다.

몸뚱이 하나에 용머리가 두 개여서 괴이하게 여겼던.

“가만, 그럼 그게 바로 태몽?”

한 회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껏 고 집사를 불렀다.

“고 집사, 고 집사!”

깜짝 놀란 고 집사가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노크도 없이 미닫이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회,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아주 신통한 보살집 얼른 알아보게! 지금 당장!”

***

소용없다고 말리는 그를 설득한 건 제아였다.

―우리를 다시 내치시는 한이 있어도 오빠네 식구도 우리 복탱이와 복둥이의 존재를 아셔야 해. 손자고 증손자잖아. 지구상에 유인원이 생기고 가족이란 집단이 생긴 게 다 이유가 뭐겠어? 핏줄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야. 밑져야 본전이잖아, 응? 원래 내침 받았으니 또 내쳐지면 그런가 보다 하면 돼. 누가 알아? 희박한 확률도 허락 받아낼지.

듣고 보니 묘하게 설득이 되는 이론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설득시킨 건 제아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한 회장의 집 앞에서 속을 졸이면서 대기를 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문이 열리고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제아가 달려 나왔다. 그렇게 뛰지 말라고 경고했건만.

걱정스러움에 차문을 열고 튕기듯이 내린 도준에게 비글처럼 폴짝 뛰어오른 제아가 그의 목에 매달렸다.

―꺄아, 오빠! 우리 아기들 진짜 복탱이, 복둥이인가 봐! 허락 받아 냈어!

물론 한 회장이 조건을 내걸긴 했지만 그까짓 자존심이 뭐 대수겠는가. 제아가 이렇게 행복해하고 웃을 수 있는데.

그까짓 무릎 닳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수십 번, 수백 번 꿇을 수 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꿇었다.

한 회장의 방에서 나온 그를 연희가 빤히 바라본다. 도준도 걸음을 멈추고 그 눈빛을 가만히 마주했다.

그럼에도 모자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 흐를 뿐, 어떤 대화도 터지지 않았다.

꽉 막혀 있던 수도관의 이물질을 시원하게 빼냈는데도 수도꼭지가 꼭 잠겨서 물이 나오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

그 수도꼭지를 시원하게 틀어준 건 제아였다.

격려하고 달래듯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제아의 손길에 굳어 있던 근육이 이완되었다. 먼저 말문까지 터주었다.

“어머니, 오빠가 할 말 있다고 해요.”

그제야 강력본드에 붙어 있는 것 같던 도준의 입술이 어렵사리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착각일까. 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연희의 눈에 언뜻 물기가 어려 보이는 건.

“……입덧은 괜찮니?”

“네, 이제 멀쩡해요!”

제아가 씩씩하게 대답을 했는데도 연희는 도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아가 너 말고. 도준이 너 말이다.”

무안함보다는 아가라는 연희의 호칭에 제아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그리고 도준의 눈도 그답지 않게 휘둥그레졌다.

“저는 괜찮…….”

그 찰나, 제아가 얼른 나서서 도준의 말을 가로챘다.

“오빠가 제 대신 뒤늦게 입덧을 하고 있어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이럴 때만큼은 눈치 백단 문제아였다. 남자에게 입덧을 하냐고 묻는 건 굉장히 드문 경우였고, 그렇다는 건……?

“널 임신했을 때, 네 아빠도 나와 같이 입덧을 했었다. 아니, 나보다 더 심하게 했었지.”

연희의 물기 어린 눈에 이어 또 다른 착각이 도준을 어지럽게 했다. 이젠 말도 안 되는 환청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이번 주 시간 될 때 제아 양이랑 같이 저녁 먹으로 집에 오지 않으련?”

“이번 주 내내 굉장히 바쁩니다.”

태연한 척 묻는 연희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도준은 매정하게 거절했다.

민망함에 가만히 있던 제아가 얼른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가 등 뒤로 제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시간 내서 제아랑 꼭 가도록 할게요.”

‘너만 같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말을 하듯이.

***

한 회장의 집을 나오는 도준과 제아의 발걸음은 가뿐했다.

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행운이 다 뱃속의 아기들 때문이라고.

차에 오르자마자 제아는 도준에게 선언했다.

“나 다음 주부터 출근할 거야.”

말리지 말라는 듯 눈까지 부릅뜨는 제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준이 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회사에 복직 처리해놨으니 내일부터 출근해.”

“……뭐?”

“몸 근지러웠을 거 아니야.”

의외였다. 걷는 것조차 조심하게 하는 그가 출근을 허락할 줄이야.

“날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의외라서. 난 오빠가 집에서 꼼짝도 못 하게 할 줄 알았거든.”

“그러고야 싶지만 그건 내 욕심이고.”

“…….”

“집에 갇혀 시들어가는 널 보느니 차라리 내가 가슴 졸이고 말지.”

사실 도준 자신이야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지만 자유분방한 제아는 집에만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욕심이 있고 성공에 대한 욕망도 있다.

멋진 여자가 되고 싶다면 뒷받침해주면 된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무엇보다 회사가 문제아를 원하니 별수 있나?”

“진짜지? 딴 말 하기 없기다?”

하지만 그는 적당한 채찍과 당근을 쓸 줄 아는 남자였고 엄한 표정으로 제아에게 조건을 걸었다.

“단,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모두 아낌없이 써. 나도 그럴 예정이니까.”

도준은 제아를 데려다준 후 바로 회사로 향했고,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도준을 따라 같은 방으로 들어가려는 제아를 윤영이 잡아챘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각방이야.”

“곧 결혼할 사이고 임신까지 했는데 왜 각방이야? 아가들이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고 했단 말이야.”

“요것아, 정신 좀 차려! 절대 안정! 병원에서 그런 말도 안 해주든?”

“그, 그런 걸 왜 나한테 뭐라고 해? 오빠한테 해야지!”

새빨개진 얼굴로 제아가 손사래를 쳐보았다.

“내가 널 모르니? 도준이야 점잖아서 믿지만 내가 너는 못 믿어!”

“엄마아아! 날 뭘로 보고 그래?”

오빠가 점잖기는 뭐가 점잖다는 건데! 침대에서 오빠가 얼마나 응? 그러니까 응? 휴우…….

침대에서는 무섭게 돌변하는 이 남자의 정체를 부모님에게 차마 까발릴 수 없으니 그저 끙끙 앓을 뿐이었다.

물론 제아는 모른다. 풍성한 머리칼을 풀어서 가렸다고 하지만 하얀 목 곳곳에 피어난 새빨갈 꽃잎자국을 윤영이 봤다는 걸.

“제아야, 어머니 말씀 들어야지.”

이 순간도 정말 얄미울 정도로 도준은 효자 노릇이었다.

“어머니 말씀 틀린 거 없어.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

제아는 안방 바로 옆에 있는 방에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노크 소리에 눈이 떠졌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꽤 밝아 벽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5시 30분이었다.

윤영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도준이 출근 준비를 할 시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방문이 살그머니 열리고 산뜻하고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도준이 들어온 것이다.

“아침 운동 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제아를 도준이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거실로 나가자 이제 막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윤영이 보였다.

“일어났니? 아침 운동 얼마나 걸릴 것 같아?”

“40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제아 데리고 가볍게 운동하고 올게요.”

도준의 말에 윤영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아침잠 많은 제아를 깨워 운동을 시키겠다는데 어떤 엄마가 싫어하겠는가.

나란히 집을 나서긴 했지만 자신이 걷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그가 운동을 하자고 하다니. 이해 못 할 노릇이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다 보니 옛 집을 지나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이젠 초록빛 대문에서 짙은 마호가니 빛을 띠고 있는 육중한 대문.

애써 태연한 척 지나치려는 제아를 도준이 멈추게 했다.

“왜 오빠?”

대답 대신 도준은 대문 옆에 달려 있는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대문이 철컹 입을 벌렸고 그만큼 제아의 입도 벌어졌다.

……설마 이 집도?

“너랑 부모님께 소중한 만큼 나한테도 이 집은 소중해. 그런 집을 내가 팔리게 놔둘 리가 없잖아.”

아, 정말 이 남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정말.

집을 팔았을 당시에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인데. 그 와중에도 똑똑한 뇌는 끊임없이 지구처럼 공전을 했나 보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정말 도준의 예언대로, 행복한 일들만 벌어지고 있고, 그래서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으니까.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한도준이란 남자 때문에.

“내가 정말 오빠 때문에 못 살아.”

……너무 행복해서.

이번엔 옆집이 아닌 뒷집을 사들였나 보다. 뒷집까지 확보해서 지어진 집은 현관문이 앞쪽이 아닌 옆쪽으로 나 있었다.

게다가 현대식이 아닌 고풍스러운 목조 주택 느낌. 한마디로 따스한 느낌이 운치 있게 풍기는 외관이었다.

“우리의 신혼집이 될 거야.”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나?”

“아니, 그건 아닌데.”

“난 완벽한 신혼 생활을 즐길 거야. 그러기 위해선 부모님과 다른 집에 살아야겠지.”

나직하면서도 은밀하게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에 제아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말한 완벽한 신혼생활이 무얼 뜻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대부분 임신을 해서 배가 나오고 몸매가 흐트러지면 남편들에게 외면 받는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자신에게 왕성하게 반응하는 그의 성욕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야릇한 흥분까지 불러일으킨다.

나도 이제, 오빠를 닮아서 밝히는 건가?

“알았으니까 얼른 아침 운동 가자!”

괜히 민망해서 휙 몸을 틀어 나가려는데, 도준이 슬그머니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

제아가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도준이 눈이 부실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아침부터 웬 살인 미소? 누가 보면 유혹하려고 하는 줄…….

자, 잠깐만! 설마 아침 운동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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