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100화 (100/104)

100. 남편분이 같이 입덧하는 거예요.

2017.08.17.

“많이 심각한 겁니까.”

의사가 준 힌트를 도준은 아마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그야 엄청 심각해서 보는 거라지만 그 눈빛을 받는 여의사는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래서인지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제아가 입을 여는 찰나…….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의사 선생님이 힌……?”

“윽! 우웁!”

갑자기 도준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진료실을 박차고 나갔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는 제아의 어깨를 여의사가 눌렀다.

“내가 보기엔 남편분이 같이 입덧하는 거예요.”

입덧이라니? 임신은 내가 했는데 왜 오빠가?

“종종 있어요. 쿠바드 증후군이라 하는데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입덧까지 같이하며 힘들어 하는 분들이.”

“……예에?”

“그런데 가라앉을 때인데 입덧이 좀 오래 가네요?”

그거야 당연히 진짜 입덧을 할 땐 입덧인지도 몰랐고 또 떨어져 있었으니까.

제아는 그저 머쓱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요 며칠 도준이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긴 했었다.

그땐 당연히 신경이 곤두서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선생님, 오늘 초음파 사진은 세 장 부탁드려요.”

간호사가 건네는 초음파 사진을 받고 나가려던 제아는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돌아섰다.

살그머니 의사에게 다가가 간호사가 듣지 못하도록 자그맣게 속삭였다.

“저기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

“아침에 관계를 갖는 게 정말, 임산부에게 좋나요?”

***

웨이터가 열어준 룸 안으로 들어간 지로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나뒹구는 양주병들, 룸 안 가득 차 있는 건 담배와 지독한 알코올 향이었다.

연신 술잔을 들이키던 강훈이 멀뚱하게 서 있는 지로를 뒤늦게 발견했다.

“이게 누구야. 내 동생 한지로 아닌가.”

제 옆에 앉으라는 듯 강훈이 손짓했다. 마지못해 앉자마자 강훈이 핏발 선 눈으로 다그친다.

“한지로 넌 문제아 어디 있는지 알지? 응?”

“……찾아내서 뭐 하려고.”

“너 내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알지? 근데 그 새끼가 다 채갔다고.”

“그러니까 뭘 어쩌려는 건데.”

“어쩌긴, 찾아내서 내가 가져야지. 그리고 망가뜨려야지. 그 새끼 보란 듯이 말이야.”

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지로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형은 절대 한도준 못 이겨.”

“뭐? 너 이 새끼, 나 지금 무시하는 거지? 내가 이 꼴이라고 너도 날 무시하냐? 나 한강훈이야, 한강훈이라고!”

“아아, 제 형제를 화분 사건도 모자라서 사람까지 사서 차랑 오토바이 사고 나게 한 한강훈?”

“……뭐?”

“그거 살인 미수다. 선배가 증거자료까지 다 확보해서 가지고 있고. 그것까지 터지면 형은…….”

지로가 손으로 목을 쫙, 그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할 상대는 그만 자극해.”

게다가 도준은 강훈이 조만간 자신을 부를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제아에 대해 물어볼 거란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소름끼치도록 철저하다.

“그나마 이런 사치라도 누리면서 남은 생 살고 싶으면 죽은 듯이 조용히 살라고.”

보이지 않는 심해 속 같은 남자. 그런 남자를 형이 어떻게 이긴다고 그래?

“한 번만 더 눈에 거슬리면 그땐 증거 자료 경찰 쪽에 넘겨서 감방에 넣고 형이 은닉한 차명계좌까지 모조리 압류처리해서 거지 만들 거래.”

남은 진지하게 충고를 해주는데 강훈은 미친놈처럼 실실 쪼갰다.

“하, 하하하! 그래, 그랬던 거였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

“한지로 너도 한도준 개였던 거야.”

“…….”

“내가 왜 그걸 몰랐지? 한도준 정말 대단한데? 최고의 망나니 한지로까지 지 개새끼로 만든 거 보면.”

“내가 개새끼라고 치자. 그런 개새끼한테 물린 찌질이는 뭔데?”

“이 자식, 너 지금 뭐라고? 컥!”

덤벼들던 강훈은 오히려 지로에게 가볍게 제압당했다.

푸른 힘줄이 불뚝 솟아난 지로의 팔뚝이 강훈의 목울대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선배가 조건을 하나 더 내걸었어. 형도 알다시피 내가 개새끼 노릇을 아주 잘해줬잖아?”

컥컥거리는 강훈을 내려다보며 지로는 한 자 한 자 끊어 경고를 흘렸다.

“개새끼한테 물려서 마지막 숨통 끊기고 싶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 회사 건드리지 마. 알았어?”

“……!”

“나도 몰랐던 내 집안일까지 알아서 챙겨주니 내가 선배 개가 되지 않을 수가 있나. 그것도 모자라 숨통을 조일 증거까지 내게 다 넘겨줬거든. 핏줄이라서 마지막 기회 주는 거야. 그래서 오늘 온 거고.”

숨이 막히는지 강훈이 버둥거렸다.

“이제 알겠어? 형이 한 걸음 내디디면 선배는 이미 열 걸음 앞서고 있어. 그러니 상대가 안 되지. 제발 좀 패배 인정하고 조용히 찌그러져서 살아.”

강훈을 풀어준 지로는 룸에서 나가기 전 문득 생각 난 게 있다는 듯 다시 돌아섰다.

“아, 참고로 소식 하나 더 전해주자면 나 제일 백화점 전략 부장으로 발령 났어. 형의 가짜 스파이 노릇하다가 내 적성에 맞는 걸 발견했거든. 지금이야 한 회장님이 노발대발하지만 어차피 선배가 제일 그룹 후계자가 될 건 뻔하고. 선배만 잘 보좌하면 형이 누렸던 비슷한 자리 위치 정도, 아마도 내가 차지할 것 같네.”

문이 닫히는 순간 술잔이 룸의 문에 맞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그럼에도 지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술집에서 나왔다.

***

핼쑥하게 질린 낯빛으로 마침내 도준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무려 10분 동안이나 변기를 잡고 있는 도준을 밖에서 기다리는 제아는 기분이 참 오묘했다.

아내가 입덧을 할 때 남편들 마음이 이럴까.

젖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는 새하얀 얼굴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굳건하게 다시 진료실로 향했다.

“의사를 다시 만나봐야겠어.”

오로지 직진 밖에 모르는 이 남자, 어쩔 거야 정말. 제아는 도준의 앞을 막아섰다.

“산부인과에서 표현하는 미사일 의미, 정말 모르겠어?”

잠시 생각하는 듯 하지만 도준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아기들. 아들이라고 선생님이 힌트 주신 거잖아.”

“……미사일 의미가, 아들이라고?”

“응. 아, 기, 들.”

한 자 한 자 힘주어 힌트를 줘보지만 이쪽으론 영 눈치가 없는지 도준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런 도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제아는 까치발을 들어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두 번째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것도 쌍둥이.”

도준의 입이 작게 벌어지고, 가로로 길어진 눈매가 제아의 배를 더듬었다.

배가 살짝 부풀어 오르긴 했을 뿐, 허리는 아직도 이렇게 가는데.

“이 좁은 공간 안에 사내아이가 둘이나 있는 걸, 나보고 믿으라고?”

안 믿으면 어쩔 건데. 현대 의학의 힘으로 미사일을 두 발이나 찾았다는데.

제아는 대답 대신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하나 더 놀라운 사실 알려줘?”

“그만 놀랐으면 좋겠군.”

어지러움이 돋는지 도준이 살짝 눈살을 구기며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속이 또 안 좋구나?”

“뭘 잘 못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껍지? 헛구역질은 계속 나오고. 입맛도 없고.”

제아가 증상을 정확히 집어내자 이제 도준은 놀란 표정이었다.

나른한 눈매가 어린아이처럼 휘둥그레진 그 모습은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그거 입덧이래.”

“……뭐?”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 남자들한테 드물게 나타나는 증상. 의사 선생님이 전문 용어로 설명해줬는데 난 오빠처럼 머리가 좋지 않아서 외우진 못했고. 입덧 정말 힘들지?”

“……!”

입덧이라니. 충격이 꽤 컸는지 도준은 말조차 잇지 못했다.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는 바람에 창백한 낯빛처럼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그때 서늘한 손끝이 도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렸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자, 그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는 제아가 있었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 되게 나쁜 여자인가 봐. 오빠 힘든 건 마음 아픈데 기분이 왜 이렇게 좋지? 사랑 받는 여자가 된 것 같아.”

어린 소녀에게 입술 박치기를 당한 순간부터 시작된 사랑이고 미친 듯이 쏟아부은 사랑이다.

그런데 이제야 사랑받는 여자가 된 것 같다니.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엉뚱한 생각이 든다.

말도 안 되는 이 입덧이 제아를 행복하게 한다면, 내가 좀 오버를 해줘야 하나?

***

아침을 맞이한 윤식 부부는 아직도 어젯밤의 일들이 꿈만 같다.

―제아를 위해 제가 마련한 집이고 또 제아가 이 집을 무척 좋아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이 집에 계시는 걸 보면 더 좋아할 거구요. 내일 이 곳으로 데리고 올 테니 맛있는 점심 차려주세요. 제아가 마음고생이 심해서 많이 야위었거든요.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는 부탁이었다.

아니, 이젠 도준이 어떤 부탁을 해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윤식 부부는 어젯밤 집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발로 집을 걸어 나오기만 했을 뿐, 이사는 고용된 전문 인력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원래 살던 집의 맞은편에 지어진 고급 주택의 주인이 도준이었다니.

집도 윤영의 취향을 잊지 않았는지 쏙 마음에 든다.

게다가 몸만 올 수 있도록 가구와 가전제품, 사계절 옷들까지 모두 구비가 되어 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하려고 처음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듯 집은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우리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것들, 연희 씨가 누려야 하는 것들인데.”

“당신 할 만큼 했어. 이제 연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야. 그리고 이러고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애들 올 시간 되어 가고 있어.”

***

“부모님께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나도 내 입으로 한 약속은 지키거든?”

제아는 살짝 토라진 얼굴로 툭 쏘아붙였다. 사실 부모님에게 화가 많이 났었다. 원망도 많이 했고.

거짓말을 한 엄마, 그리고 그 와중에도 철없이 사채까지 끌어들여 주식을 한 아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우리 식구를 만나서.

뒷수습은 오로지 도준의 몫이었다.

게다가 끝끝내 자신을 설득했던 도준의 진심 어린 말.

―가장 힘든 게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거야. 그것도 자식 앞에서 하기는 더 힘든 법이지. 하지만 어머니는 잘못을 인정 하셨고 우리 결혼까지 허락하셨어. 우리도 힘들었지만 어머니도 충분히 힘드셨어. 그러니까 지난 일은 서로 묻지 말고 웃기로 하자.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이제부턴 행복하기만 해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제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남자는 거대한 태산이었다.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버텨준.

그런 도준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말 대신 도준의 손을 꼭 쥐어 잡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튼 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차가 익숙한 주차 공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여긴 왜?”

어차피 돌아올 곳이 여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순서가 이게 아닌데?

도준이 차문을 열어주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 열리며 윤영이 나타났다.

“제아랑 도준이 왔니?”

제 집인 듯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윤영을 보고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섣불리 서로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는 모녀였다.

“어머니한테 가봐야지.”

살짝 등을 미는 다정한 손길에 제아는 도준에게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오빠. 모두 다.”

“내가 그랬잖아. 이제 행복하게만 해준다고.”

도준을 향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 제아가 먼저 다가섰다. 현관문 앞, 두 모녀가 어색하게 마주섰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맛깔스러운 음식 냄새가 새어 나와 후각을 자극했다.

“……엄마 손자들 쌍둥이야. 그러니까 밥도 두 그릇 먹을 거야.”

제아의 눈치를 보던 윤영의 낯빛이 그제야 환해졌다.

“그, 그럼! 엄마가 밥 많이 해놨어! 너랑 이준, 아니 도준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밥 차려놨으니까 얼른 들어가자!”

제아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기 전, 조용히 뒤따라오는 도준에게 윤영이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다이님 룸으로 향하자 8인용 원목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음식들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부터 도준이 좋아하는 음식까지, 정말 다양하고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집 밥이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입덧은 가라앉은 지 오래이지만 한 때 이 냄새를 끔찍하게 싫어했었는데. 그러다 불현듯 떠올랐다.

‘오빠 괜찮나?’

입덧하면 제일 맡기 싫은 냄새가 청국장 냄새랑 고기 냄새였는데.

힐끗 시선을 틀자, 새하얀 낯빛으로 청국장을 노려보는 도준이 보였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강렬한 거부감, 그걸 윤영이 놓칠 리가 없었다.

“좋아하는 걸로만 차린다고 차렸는데. 이젠 청국장은 안 좋아하나 보구나. 미리 물어보고 차릴 걸.”

“아닙니다. 청국장…… 좋아해요.”

말과 달리 새하얀 손이 입으로 가려는 걸 참는 듯 식탁 밑의 도준의 손은 불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걸 본 제아는 생각했다. 그놈의 효자 납시기 전에 말리자.

“엄마, 청국장 좀 치워주고 창문 좀 열어서 환기 좀 시켜줘.”

“너라도 먹어. 넌 청국장 귀신이잖니.”

“그게 아니고 사실은…….”

묘하게 말끝을 흐리자, 도준이 잔뜩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제발 말하지 말라고 식탁 밑으로 도준이 손을 꼭 잡아오지만.

“오빠 지금 나 대신에 입덧 중이거든요.”

“……뭐?”

제아는 웃고 윤영과 윤식은 놀랐다.

그리고 도준은 목까지 붉게 달아오른 채 결국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그러니까 청국장 좀 치워줘, 엄마.”

***

그렇지 않아도 손자 녀석 때문에 열불이 나 죽을 지경인 한 회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본가로 들이닥친 딸은 더욱더 열불 나는 소리만 했다.

“도준이 한씨 가문 호적에 올려주세요.”

“뭐라고?”

“태영 씨랑 이혼 준비 중인데 굳이 그 사람 호적에 계속 놔둘 필요 있어요? 그리고 누가 뭐래도 제일 그룹 상속자는 내 아들 도준이에요. 그 말 하려고 왔어요.”

협박을 해도 모자랄 판에 편을 들다니. 제일 그룹을 떠나겠다는 손자의 선언에 드디어 제 딸이 미쳐버린 듯했다.

“연희야, 지금 네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나 본데 그렇게 우리가 수그린다고 기어들어올 녀석이 아니란 말이다. 더 기고만장해질 놈이라고. 도준이 녀석이 얼마나 영특한지 몰라? 영특하고 아주 여우같은?”

“아빠만 하겠어요.”

우아한 입술이 시니컬한 미소를 옅게 머금었다.

하지만 한 회장을 응시하는 연희의 눈빛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게다가 어젯밤은 수면제나 술에 손도 대지 않았는지,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로 서슴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재경 씨가 10억 받게 설득한 거 아빠인 거 알아요. 그 돈으로 후에 인심 쓴 척 도준이에게게 준 것도.”

“……!”

“그게 죽음을 앞둔 사람한테 할 짓이에요?”

“……저기, 연희야.”

“그 사람한테 지은 죄, 이제 도준이한테 갚으세요. 저도 그러려고 노력중이니까.”

양심이란 게 있으면 끄떡할 법한데도 한 회장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버틴 만큼 고집불통 외곬수가 다 되어 있었다.

“10억이 어디 개 이름이여? 큰 돈 줬음 고마운 줄 알아야지. 그리고 손 귀한 집안의 유일한 후손이다. 그런데 내가 그놈을 버리긴 왜 버려? 다만 기본도 모르는 놈 버릇을 따끔하게 고쳐 놓으려는 거란 말이다!”

“도준이가 똑똑하니 이젠 손자 취급해주시는 거잖아요. 그 사람 반대한 것처럼 질 낮은 고아의 피가 흐른다고 싫어하셨잖아요.”

그때 고 집사가 다가와 귓속말을 넌지시 건네자 한 회장의 흰 눈썹이 고집스럽게 불퉁거렸다.

“거참 낯 두꺼운 아가씨구먼. 여기가 어디라고 또 찾아온 게야. 당장 쫓아내?”

한 회장이 축객령을 내리기도 전, 연희가 우아하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고 집사님, 그 아가씨 들여보내요.”

“여긴 내 집이다! 뉘 맘대로 들여보내?”

“하나뿐인 딸까지 잃고 싶으세요?”

“이, 이런 고얀!”

결국 한 회장은 지팡이로 바닥을 퉁퉁 내리치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희는 차를 마시면서 기다린다. 그 여자 딸을.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연희를 발견한 제아는 잠시 흠칫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서늘한 연희의 시선이 살짝 부풀어 오른 배에 닿자 순간 소름이 확 돋았다.

‘쫄지 말자. 문제아.’

뱃속의 아기는 이제 죄가 아니라 축복이니까.

하지만 무슨 독언으로 긁어내릴지 몰라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연희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문은 잠그지 않으셨을 테니 저 방에 들어가 보렴.”

얼떨떨하긴 하지만 여우 굴을 통과했으니, 이제 호랑이 굴로. 제아는 예의 바르게 연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어머니.”

서로의 눈이 딱 마주쳤다.

“……?”

“…….”

방금, ‘어머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내 귀가 잘못됐나?

그러다 제아는 이내 속에서 강하게 부정을 했다.

그래, 바보 같은 착각이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렇게 생각하며 제아는 한 회장이 있는 방 쪽으로 몸을 트는 찰나…….

“사모님이란 호칭은 영 거슬려서.”

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음색에 다시 돌아보니 연희가 차분하게 제아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니 어머니라고 부르려무나.”

착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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