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키스보다 더한 것도, 해도 되지 않나?
2017.08.14.
일주일 동안 손끝이 스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도준의 갑작스러운 키스에도 넋이 나갔지만 ‘결혼’이란 단어가 제아의 혼을 홀라당 날려버렸다.
결혼? 누구랑? 나랑?
멍하니 넋을 놔버린 제아의 뺨을 도준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용기 내어 청혼을 한 남자에게 관심 좀 가져주라는 듯.
가벼운 그 두드림에 그녀를 얼게 했던 주변 공기가 다시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긴장된 눈빛으로 대답을 바라는 도준을 응시하는 제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손에 들고 있는 게 유전자 검사 결과야?”
제아는 도준의 대답도 듣기 전에 그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채서 거칠게 윗면을 뜯어냈다.
이상한 그래프와 설명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상단에 위치한 검사 결과 란에만 시선이 갈 뿐이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기쁨은 뒷전이었다. 머릿속이 난잡하게 뒤엉켰다.
윤영과 연희의 얼굴이 스치고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던 도준도 스친다.
흘렸던 눈물이 떠오르고 죄책감에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죽여 울었던 것도 떠오른다.
축복 받아야 할 쌍둥이들의 존재가 죄책감의 원인이 되어버렸다는 게 분노를 최고의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벌떡 일어나는 제아를 도준이 당혹스럽게 응시했다.
“어디 가려고?”
“거짓말쟁이 최 여사랑 한 판 하러.”
연희야 그렇다 쳐도 제 엄마까지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원수 같은 연희와 윤영이 입을 맞추었을 리도 없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이해도 안 되지만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아야.”
화가 난 제아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모녀가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은 도준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술술 풀리면서 원위치로 돌아가는 중인데.
무엇보다 한 성깔 하는 두 모녀의 살벌한 싸움에 등이 터지는 건 남자들일 테니까.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제아의 손목을 도준이 겨우 낚아챘다.
“어머니가 정확히 말씀하신 건 아니라며.”
부드럽게 타일러 보지만.
“집까지 데려다줄 거 아니면 이 손 놔.”
말투가 하도 살벌해서 도준은 불에 덴 듯 제아의 손목을 놓았다.
아무리 그라도 제아가 이렇게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한다?
그러다 불현듯 떠올랐다. 제아에게 했던 청혼이 완전히 묵살 당했다는 걸.
“문제아, 나 좀 전에 너한테…….”
청혼했는데, 기억 좀 해주면 안 되나?
그때 골목길에서 나타난 노부부가 도준의 뒷말을 먹어버렸다.
“남자가 인물값 했나 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임산부를 울리면 쓰나.”
도준의 미간이 미묘하게 꿈틀했다.
“암 그렇지. 세상에 가장 몹쓸 놈 중 하나가 자기 아이 임신한 여자 울리는 것들이여. 얼굴 봐봐. 얼마나 울었나 닭 잡아먹은 너구리 꼴이구먼.”
너, 너구리?
그제야 제아는 급하게 클러치에서 미니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추었다.
“꺄악, 난 몰라!”
도준에게 먹히고 남은 붉은 립스틱은 입술 주위에 번져서 광대처럼 보였고, 한껏 속눈썹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던 마스카라는 눈물 때문에 번져서 짙은 다크 서클을 형성하고 있었다.
정말 딱, 닭 잡아먹은 너구리 꼴이었다.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틀어 돌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그 힘을 역으로 이용한 도준이 제아를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폭삭 안긴 가녀린 체구를 품에 꼭 가둔 채 도준이 가만히 눈을 부딪쳐왔다.
“서류랑 봉투, 야무지게 확인 좀 해봐.”
길길이 날뛰던 고양이가 품에 안겨서야 얌전하게 발톱을 숨겼다.
서류는 다시 확인할 마음이 없는 듯 봉투 안만 다시 들여다보는 제아의 눈동자가 영롱했다.
서류 봉투 안에 든 다이아처럼.
링 가운데 박힌 다이아몬드의 크기에 압도당한 제아가 잠시 숨을 헐떡였다.
“설마 지금 하는 거…….”
“이제야 기억해주니 고맙군. 나 지금 너한테…….”
“아니, 무슨 청혼을.”
진지하고 정중하게, 진심을 담아 하려는 청혼이 또다시 잘려버렸다.
잔뜩 치켜뜬 고양이 눈이 도준을 앙칼지게 응시하더니.
“……이렇게 해?”
서류를 도준의 품에 확 안겨준 제아는 몸을 휙 틀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서류 마지막 장엔 빛도 발하지 못한 혼인 신고서가 있는데 말이다.
유전자가 불일치한다고 적힌 검사 결과서. 그리고 프러포즈 반지.
법적으로 둘을 묶어줄 혼인 신고서는 윤영과 윤식의 허락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최고의 선물을 한데 묶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번엔 또, 뭐가 잘못된 거지?
이제 모든 게 술술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제아의 반응은 또다른 난제였다.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뭐가 문제였는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 가장 급한 건 돌계단을 조심성 없이 팍팍 올라가고 있는 제아였다.
저러다가 태아한테 충격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제아의 뒤를 도준이 얼른 따랐다.
“조심히 좀 올라가, 문제아.”
계단을 오르는 제아의 심경은 지금 굉장히 복잡 미묘했고 들쑥날쑥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임신을 핑계대고 싶을 정도로.
이복남매가 아니라고 나온 검사 결과에 뛸 듯이 기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고 아닌 건 아닌 것.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바란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닭 잡아먹은 너구리 꼴로 청혼 받고 싶은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문득 스스로가 무서울 만큼 현실 적응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복 오빠에서 제 남자로 다시 바뀌는 순간, 벌써부터 기선 제압에 들어간 걸 보니.
목숨보다 사랑하는 남자이지만, 그래도 들짐승 같은 남자는 처음부터 제대로 길들이는 게 중요하니까.
“제발 좀 조심히 올라가라니까.”
제 뒤에서 도준이 무슨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을지 충분히 상상이 되지만 제아는 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폭죽에 분수 쇼 참 좋았는데.’
***
줏대 없이 두 여자 사이를 저울질한 제 아버지와 달리 그 여자 딸을 향한 아들의 사랑은 절대적이었고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도준이 그렇게 떠난 후, 연희는 아들이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병원을 알아내서 결과를 받았다.
하늘은 아들의 편이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경계선이 흐려져 버렸다. 시야가 흐리고 머릿속이 몽롱하다.
가슴이 텅 비어버린 이 느낌이 뭘까. 삶의 의지를 상실해버린 게 이런 느낌일까.
최윤영도 밉고 그 여자 딸도 밉다.
하지만 그 남자가 제일 밉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그 남자, 김재경이.
어둑해진 창밖을 내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연희의 뒤로 노크소리와 함께 김 비서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사모님, 최윤영이란 분이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아, 내 몰골이 어떤지 확인이라도 하러 왔나 보지? 아주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응접실로 안내해.”
연희는 부러 고급스러운 롱 원피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어루만지고 한 듯 안 한 듯 곱게 화장을 했다.
“뻔뻔하게 날 찾아온 연유가 뭐죠?”
우아하게 제 앞에 앉아 있는 연희를 윤영이 물기 어린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오래전 처음 보았을 때 한없이 여리고 순진했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청초한 외모는 여전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악에 받쳐서인지 독기가 풍겼다.
그녀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윤영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하나뿐인 딸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도준에게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한연희 씨 당신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용건은 간단히 해요. 그쪽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니까.”
“그쪽이 재경 오빠 아이라고 알고 있는 내 딸 제아…… 윤식 씨 딸이에요.”
27년 만에 털어놓은 진실 앞에 윤영은 떨리는 눈꺼풀을 잠시 내렸다.
―이제 좀 내려놓자, 윤영아. 재경인 단 한 번도 당신을 여자로 생각한 적 없어.
―……아니야. 분명 그 여자 때문이었어요.
―그 자존심 좀 버리라고. 당신 자존심 때문에 이준이도 제아도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안 보여?
윤식이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재경의 일기장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로지 한연희라는 여자로만 가득 차 있는 일기장이.
―당신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어서 숨기고 있었지만 이젠 아니야. 당신이 직접 연희에게 찾아가서 진실을 밝혀.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으면. 재경인 그만 털어내고 이제 나 좀 봐줘. 응? 윤영아.
윤식답지 않은 단호함과 간절함이 윤영을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김재경에게 여자는 한연희 씨 당신뿐이었으니까.”
“최윤영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또 무슨 거짓말을 하려고.”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재경 오빠가 그래달라고 부탁했고, 당신에 대한 자격지심과 질투심에 난 그걸 흔쾌히 허락했고. 거짓말에 대한 대가로 받은 게 재경 오빠 사망 보험금이에요.”
작정한 듯 윤영이 덤덤히 진실을 토해낼수록 연희는 표백제가 뿌려진 듯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고막이 멍하게 울렸다.
연희는 아직도 그날이 잊히지가 않았다.
아주 작은 동네 커피숍에서 윤영과 마주 앉았던 기억이.
한 남자를 부득이하게 공유한 두 여자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진 커피숍 안의 공기까지.
―그때 당신이 보았던 내 딸, 재경 오빠 아이예요. 젊고 예쁘고 돈까지 많은 당신에게 오빠가 잠시 홀렸던 거예요. 그런 오빨 전 믿고 기다렸구요. 오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대요. 연희 씨 아버지가 그렇게 심하게 반대하고 당신이…… 모든 걸 버리고 따라 나올 줄은.
윤영의 고백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고백이 끝날 때까지 연희는 울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영혼이 빠진 듯한 동공으로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 앞으로 윤영이 낡은 일기장 한 권을 조심히 내밀었다.
“윤식 씨가 간직하고 있던 재경 오빠 일기장이에요. 한연희 씨 당신한테 줘야 할 것 같아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거 알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
“정말 미안해요.”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길 내게 하는 저의가 뭐죠?”
주먹을 꼭 쥔 채 윤영은 다시 돌아섰다.
차라리 화를 내고 욕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눈앞의 연희는 감정 없는 유리인형 같았다.
눈빛도, 말투도, 표정도.
“내 딸 제아와 이준이가, 이젠 정말 행복해졌으면 해요. 부모들 과거에 너무 치인 불쌍한 애들이잖아요.”
“…….”
“이런 말 하는 거 뻔뻔한 거 알지만, 당신도 조금이나마 이준이에게 모정이란 걸 느꼈으면 해요.”
윤영이 나간 후에도 연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은 눈 사이로 새하얀 미소가 눈이 부셨던 재경의 얼굴이 아스라하게 떠올랐다.
느릿하게 올라간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텅 빈 눈동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일기장에 향했다.
한참 후에야 손을 뻗어 일기장을 손에 쥔 연희는 첫 장을 조심히 넘겨보았다.
일기가 시작되기 전 가장 앞 페이지에 적힌 그의 외모처럼 정갈한 글씨체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연희야,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의 나직한 음성이 귓바퀴에서 맴도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서로가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그가 세상을 뜬 순간까지, 오로지 그녀 자신에 대한 글로 가득 차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마지막 장의 글씨체는 초등학생이 쓴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우리 아들에게 미안해. 하지만 난 우리 아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 내 아들과 날 평생 미워한다고 해도, 그렇게라도 난 연희 네가 새 삶을 찾았으면 좋겠어. 이 일기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날이 없기를.
급기야 참았던 눈물이 연희의 눈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재경 씨 당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같이 있으면 어때서. 내가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게 어때서.
이렇게 내게…… 잔인한 짓을 한 거죠?
다섯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의 초라한 삶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는데. 평생 견딜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재벌가의 딸을 위해 몸 안에서 무서운 병이 자라는지도 모른 채 몸을 혹사시켰던 재경.
그 당시 그녀는 엄연히 유부녀였고, 그와의 사랑은 불륜이었다.
한 회장이 풀어놓은 사람들에게 잡힐까 봐 병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만 했던 둘의 사랑.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연희 자신이었다.
***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제아와 도준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누워 있음에도 닿을까 봐 긴장감을 놓지 못했던 하루하루. 그럼에도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어젯밤은 마음 편하게 도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깃털처럼 부드럽고 나른한 손길이 배를 어루만지는 걸 느끼며.
그건 도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벽 5시면 칼같이 일어나던 그가 아침 8시가 되도록 잠들어 있는 걸 보면.
제아는 단단하고 아늑한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그의 얼굴을 원 없이 구경했다.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애정이 듬뿍 어린 눈빛으로.
곤히 잠에 든 도준의 얼굴은 앳된 미소년의 느낌이 물씬 난다.
문이준이었던 그때를 떠오르게 하는 섬세한 이목구비.
입술 사이로 쌔근쌔근 새어 나오는 따스한 숨이 이마를 간질일 때마다 심장도 간지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궁금해진다. 이 선 고운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단호한 강단이 나오는지.
욕심 같아선 좀 더 안겨 있고 싶지만 제아는 조심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 했는데 실패했다.
어깨와 등이 감싸지면서 순식간에 이불 위에 다시 눕혀졌다.
떨리는 동공을 들자, 잔뜩 묻어나는 잠기운마저 섹시하게 소화한 남자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굿모닝.”
꽉 막힌 허스키한 음성마저 섹시하다, 정말.
잠기운이 서서히 사라지는 짙은 동공을 메우는 정제되지 않은 그의 욕망이 깊숙이 파고들어 제아의 심장을 함락했다.
위험……하다.
“이제 키스보다 더한 것도 해도 되지 않나?”
주어가 생략된 도준의 유혹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는 수줍은 열기.
“아침에 하는 게 건강에도 좋고 임산부한테도 좋다던데.”
“누, 누가 그래?”
확 달아오른 얼굴로 일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도준이 얼굴을 내려 학처럼 고고한 목덜미에 가만히 얼굴을 묻어버린 것이다.
단단한 몸에 묵직하게 눌리는 촉감마저 야릇한 자극으로 느껴지다니. 나 미쳤나 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웃음기 어린 탁한 음성과 새어 나오는 날숨이 뜨겁게 여린 살결을 데우기 시작했다.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제아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예전이랑 달라.”
“…….”
“이제 내 몸매 보기 안 좋다구. 배도 많이 나오고 가슴도.”
“……예뻐. 예뻐서 미칠 것 같아.”
“…….”
“우리 아기를 품고 있는 지금 네 모습.”
목덜미에서 옮겨간 그의 입술이 제아의 귀로 은밀하게 옮겨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 몸은 거짓말 안 해.”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정직하게 반응하는 그의 욕망이 느껴졌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게.”
웃음기 어린 말과 동시에 도준의 입술이 입술을 내렸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목표물을 찾아서.
2시간 후 제아는 산부인과 진료실 앞에 도준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문제아 씨.”
쌍둥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초보 아빠와 아기들의 첫 만남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제아는 진료실 침대에 누워 화면이 아닌 도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기들을 처음 만나는 그의 얼굴이 미치도록 궁금했으니까.
초음파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도준의 새하얀 얼굴이 유달리 더 새하얘 보이는 건 착각인 걸까.
“어머.”
니트를 올려 살짝 부풀어 오른 새하얀 배가 드러난 순간 여자 의사가 자그맣게 탄성을 흘렸다.
새하얀 배에 아로새겨진 붉은 꽃잎 자국들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기에 유달리 선명함을 머금고 있었다.
“엄마랑 태아가 아빠한테 아주 사랑 받나 보네요.”
조금은 부럽다는 눈빛으로 붉게 달아오른 제아를 응시한 여의사가 배에 투명 젤을 발랐다.
화면에 흑백의 영상이 뜨자 제아의 손을 잡고 있는 도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힘 좀 빼, 오빠.”
작게 속삭이는 제아의 말이 지금 도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긴장한 적은 단연코 없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바짝 붙어 있는 듯 고막을 울린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이 화면을 보는 게 이렇게나 긴장되고 떨릴 줄은 몰랐다. 꿈인 듯, 실감나지 않았다.
도준은 화면 가득 채우는 흑백 영상을 무서우리만치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 넣었다.
암기, 또 암기. 더듬고 또 더듬어서 기필코 눈, 코, 입의 형상을 찾아내고 말리라.
그는 쓸데없는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아기들 심장 소리도 아주 건강해요. 어때요? 아주 세차죠?”
제아도 도준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의사도, 보조하는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도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 여자를 제대로 홀린지도 모른 채 도준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쌍둥이를 의미하는 복수.
아기들이란 표현에도 도준은 아직 눈치를 못 챈 듯했다.
뒤늦게 초음파 영상이 뜨는 화면을 주시하던 여의사가 말했다.
“엄마가 많이 힘들겠네요.”
교묘하게 말을 돌려서 힌트를 준다.
“꽤 큰 미사일이 두 개 보여요.”
아들, 둘 다 아들이다.
제아는 문득 도준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아들이라고 하면 기뻐할까. 실망할까. 아빠들은 딸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은근한 기대감에 시선을 틀자 새하얀 석고상이 되어버린 채 굳어버린 도준이 보였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게 궁금할 정도로.
‘아들이 싫은가?’
그런데 길고 단단한 손으로 잠시 입을 막았다 떼는 행동조차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