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98화 (98/104)

98. 나 결혼 좀 시켜주라. 너랑.

2017.08.10.

바닥에 뿌려진 종잇조각들을 따라 연희의 시선도 곤두박질쳤다.

상처받은 그 여자와 그 딸을 떠올리며, 이제 완전히 제 편이 되어버린 아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요즘 부쩍 낯선 생각을 종종 했었다.

이제 그만 멈춰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 고민마저 냉혹한 아들은 산산조각 내버렸다.

아들은 그 여자 딸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제게서 벗어날 날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니컬한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제일가에서 벗어나면 관심에서 벗어나긴 하겠지. 그래서 그 아이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그 여자가 허락하든? 자신이 한 짓, 딸에게도 시키겠다고 해? 그 정도로 양심도 없다던?”

그 남자 재경을 쏙 빼닮은 아들의 섬세하고 나른한 눈매는 조금의 동요조차 없다.

얼굴을 마주한 적은 몇 번 없지만 제 아들의 성격은 잘 알고 있다. 한다면 하는 녀석이란 걸.

그래서 테이블 밑으로 그러쥔 그녀의 새하얀 손끝이 달달 떨린다.

“어머니께 제일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야, 도리 같아서.”

날 버리고 그 여자 딸에게 가겠다면서 도리를 운운해?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은 더욱더 그녀를 숨도 못 쉬게 옥죄었다.

“유전자 검사 의뢰했어요.”

“……뭐?”

하도 기가 막혀서 연희는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그딴 거짓말로 그 여자 딸을 몰아세운 거라 생각하다니.

“날 최악으로 몰아붙이는구나. 그래, 멋대로 생각하렴. 그런다고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 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감히 뭘 바랐던 걸까. 끝까지 일말의 모정도 보이지 않는 연희를 덤덤히 바라보며 도준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건강하세요, 어머니.”

하지만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린 연희는 다시 도준을 바라보지 않았다.

“……약 잘 챙겨드시구요.”

작은 체구에 가녀린 연희를 보고 있으려니 도준은 가슴 한쪽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런 게 바로 핏줄이라는 건가.

매몰차게 낯선 그 감정을 끊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트는 순간…….

“네 아빠처럼!”

격앙된 연희의 음성이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너도 날 버리고 가겠다는 거니? 그것도 그 여자 딸 때문에?”

도준은 천천히 연희를 향해 돌아섰다.

“말은 바로 하셔야죠. 버린 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잖습니까.”

“그래서 복수하는 거니? 나도 당해보라고?”

“어머니.”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하니? 내가 네 녀석 없다고 못 버틸 줄 알아? 그 남자한테 버림받고 나서도 판자촌에서 7년을 버텼어! 알아? 그게 나 한연희라구!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날 버려? 버려도 내가 버려 알았어? 버려도…… 흑.”

급기야 그녀의 작고 가는 손이 얼굴을 가리고 그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넘쳐흘렀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눈물. 그게 그의 심장을 씀뻑거리게 했다.

그래서 그는 결코 말하지 않으려했던 말을 하고야 말았다.

“제가 공증도 받지 않은 이 종이 한 장에 얽매여서 지금까지 제일가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연희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만 할 뿐.

들썩이는 어깨가 앙상하고 좁아서 저 어깨로 지난 수십 년을 대체 어떻게 버텼는지 안타까울 정도였다.

“제가 곁에 있는 걸 더 힘들어하셨잖아요. 계약을 이행했고, 그래서 이제 사라져주겠다는데 왜 우세요.”

감정 표현에 어색한 만큼 말을 잇는 도준의 음성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돌 같은 음성에 최대한 제 마음을 담아보지만.

“절 버리셨어도 낳아준 은혜는 갚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계약서 내용 지킨 겁니다. 유일하게 제가 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서요.”

돌아온 건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유리잔이었다.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건강하세요.”

***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다.

검사 결과가 들어 있는 봉투를 도준은 바로 열어보지 않았다.

인생을 송두리째 좌지우지할 결과임에도 둘 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복남매.

도준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제아는 맞다고 확신하는.

서로 다른 믿음으로 검사 결과를 궁금해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제아가 있는 곳이 아닌 제아의 부모님이 사시는 곳이었다.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윤영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오래전 제 어머니에게 했던 거짓말을 왜 제아에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어찌되었든 유전자 검사 결과는 제 손에 쥐어져 있고 복잡하게 엉켜 있는 실타래는 드디어 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빈 집 앞에서 30여 분 정도 기다렸을까. 윤식의 휠체어를 밀고 오는 윤영이 보였다.

그렇게나 나타나지 말라고 했건만, 또 나타난 도준을 보며 넌더리난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그는 덤덤히 말을 했다.

“제아를 찾았습니다.”

결국 윤영은 도준에게 제 집의 문턱을 넘는 걸 허락했다.

윤식은 안방으로 들어갔고 도준은 윤영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마음 약한 윤식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윤영이 쫓아낸 것이다.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듯 날 선 윤영의 눈빛이 도준의 새하얀 얼굴에 꽂혔다.

그 기대감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

도준은 거두절미하고 가장 중요한 본론을 먼저 꺼냈다.

“제아가 제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 말뜻을 이해하려는 듯 몇 번 깜빡이던 윤영의 새까만 동공이 커지는 만큼 길게 늘어진 눈꼬리도 같이 상승했다.

짝―.

도준의 한 쪽 뺨에서 불이 났다. 곧이어.

짝―.

다른 뺨에서도 불이 났다.

“너 때문이었어! 너 때문에 제아가!”

윤영이 실성한 듯 도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묵묵히 몸으로 윤영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이렇게라도 윤영이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맞아줄 생각이었다.

급기야 때리다 지쳤는지 윤영이 스르륵 주저앉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기 핑계로 어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난 죽어도 널 받아들일 생각 없으니.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아기는 우리가 잘 키울 테니 제아가 어디 있는지만 말해주……?”

잠자코 있던 도준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흘러나오는 음성이 겨울 한파처럼 냉랭했다.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절 반대하시는 이유가, 저와 제아가 이복남매여서 그렇습니까?”

새하얗게 질린 윤영을 응시하며 도준은 흔들림 없이 다시 물었다.

“제 어머니에게 했던 거짓말, 왜 제아에게도 하신 겁니까?”

“……!”

“그 정도로 제가 싫으세요? 그렇게 싫으시면서 10년 동안 절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상처받았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 도준의 짙은 눈빛에 원망이 어려 있었다.

단 한 번도 제게 이런 눈빛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윤영은 당혹스러웠다.

질끈 아랫입술을 깨물어보지만 생소한 도준의 눈빛에 윤영의 마음이 일렁이고 있었다.

한때는 정말 제 아들이라고 믿고 싶었던, 잘나도 너무 잘난 아이.

하지만 윤영은 모질게 외면해버렸다. 지금의 도준은 더 이상 옛날의 그 아이가 아니니까.

돈에 눈이 멀어 제 딸을 결국 버릴 파렴치한 나쁜 놈일 뿐이다.

제 아빠가 한 것처럼.

가까스로 떨림을 가라앉힌 윤영이 차분하게 눈을 들자 도준이 그녀 앞으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유전자 검사 의뢰 결과가 오늘 나왔습니다.”

“……너, 너!”

“아직 열어보지 않았고 제아에게 알리지도 않았어요. 어머니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너 지금 그걸로 날 협박하는 거니? 어림도 없어! 그런다고 내가?”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면서 윤식이 휠체어를 밀고 나왔다.

“윤영아, 제발 그만하자. 아기까지 가졌다잖아.”

“여보!”

“자식 이기는 부모 없어. 제아가 그래서 떠난 거 몰라? 이제 제발 그만하자.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윤영의 눈은 더 독하게 핏발이 섰다. 그 눈빛이 서슬 퍼렇게 도준에게 향했다.

“왜 널 그렇게까지 반대하냐고 물었니? 그렇게 궁금하면 대답해주마. 피는 못 속이는 법이거든. 제일 그룹 황태자께서 그 자리를 버리고 내 딸을 선택할까? 넌 절대 그러지 못해. 버릴 거면 진즉 버렸어야지.”

“…….”

“지금 네 모습을 보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비싼 명품이야. 오죽하겠니? 부자 엄마에게 가서 알아버린 돈맛인데. 너도 그래서 흔쾌히 떠난 거잖아. 그 돈으로 보란 듯이 지원받고 성공해서 후계자 자리도 차지한 거잖니.”

“…….”

“한 번 알아버린 돈맛은 절대 못 잊어. 평범해질 수 없다는 뜻이야. 지금이야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 것 가지만 절대 아니다. 평범함에 질린 넌 제아를 버리고 다시 돌아가려 할 거야. 그 여자도 그걸 알고 널 내치려 하겠지. 그럼 결국 모든 걸 감당하는 게 누군지 아니? 우리 제아야. 그러니……!”

“이 집을 떠난 후로 지금까지, 제일 그룹의 돈은 쓴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습니다.”

흔들리는 윤영의 눈빛을 직시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지난 과거를 도준은 덤덤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방황을 좀 해서 사고를 많이 쳤어요. 그래서 한 달도 되지 않아 미국으로 쫓겨났습니다. 비행기 티켓을 제외한 어떤 지원도 없이 홀로 미국 땅에 돈 한 푼 없이 던져졌습니다. 이 집에서 버림받았는데 제일가에서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더 방황했습니다. 그냥 죽어버릴까 생각도 하루에 수십 번 했지만 그런 절 버티게 해준 건…….”

“…….”

“제아였습니다.”

“…….”

“이렇게 죽어버리면 제아를 다신 못 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악바리처럼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하버드대에 합격을 하고 나니 그제야 지원이 왔지만 제가 거부했어요. 그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일 그룹의 돈은 받은 적도 쓴 적도 없습니다. 제일 어패럴 사장 연봉은 제가 일한 대가이니 받은 거구요.”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니?”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윤영의 눈이 도준의 몸에 닿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브랜드로 휘두르고 있는 그를 경멸한다는 눈빛으로.

‘어디서 감히 거짓말을 하려고 해.’

“하버드대 합격하고 나니, 그제야 한 회장님이 주시더군요. 제 아버지가 어머니와 헤어지는 조건으로 받은 10억 말입니다. 편법을 써서 세금 하나 떼지 않고 고스란히 말입니다.”

윤영과 윤식의 눈이 동시에 커다래졌다.

그들이 궁금해 했던 10억의 출처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한 푼도 쓰지 않고 재테크를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제가 머리 쓰는 덴 타고났잖아요. 처음이 힘들지 돈이란 게 한 번 불기 시작하면 돈이 돈을 벌어와요. 지금 미국에 소유하고 있는 건물만 해도 몇 채고 주식도 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윤영의 눈에서 불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제일 그룹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준은 연희에게 찢어서 날리기 전 미리 복사해두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손이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공증 받지 않은 계약서라 효력은 발생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이니 낳으신 은혜는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틴 겁니다. 계약서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행했고, 이제 전 자유입니다. 제일 그룹엔 털끝만큼도 관심 없고 이곳에 오기 전 어머니를 만나서 말씀드렸습니다. 제일가에서 떠나겠다구요.”

도준의 말은 더 이상 윤영에게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지독한 계약서의 내용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모든 엄마들이 작은 모정이라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혹독하게 깨주는.

그저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억지로 합리화하며 받은 돈이, 도준을 제일가에 팔아넘긴 거나 마찬가지였다니.

갑자기 들이닥친 진실에 윤영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어머니,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저와 제아가 정말 이복남매입니까?”

숨 막히는 정적이 맴돌았다. 눈치를 보는 윤식과 덤덤한 도준의 눈빛이 윤영의 얼굴로 모아졌다.

한참 후에야 짙은 한숨과 함께 윤영이 진실을 토해냈다.

“……아니다.”

윤영은 갑자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윤식이 도준에게 눈치를 준 후 얼른 윤영을 안방으로 데려갔다.

거실에 홀로 남은 도준은 미동도 없이 차분하게 기다렸다.

흐느끼는 소리와 조곤조곤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안 방문이 열리면서 윤식과 윤영이 다시 나왔다.

윤영은 흠뻑 젖은 눈으로 도준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준은 그녀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냈다.

억겁의 세월 같은 침묵이 흐른 후, 드디어 윤영이 입을 열었다.

“도준아.”

처음이었다. 윤영이 이준이 아닌 도준이라고 부른 건.

“뻔뻔한 거 알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도준은 짐승처럼 직감했다. 그토록 버티던 윤영이 마음을 열었음을.

“아들 같은 사위 되어줄 수 있겠니.”

***

시계를 확인하니 밤 9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날 이후 항상 칼같이 6시에 퇴근해서 오던 도준이 나타나지 않자 제아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왜 안 오지? 무슨 일 있나?’

유전자 검사 결과에 대해서 덤덤한 척했지만 제아는 사실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확인해보지 않아도 결과는 정해져 있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도준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말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리고 오늘이 딱 일주일째였다.

검사 결과가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오늘 연락도 없이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으니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급기야 제아는 카디건을 대충 걸치고 대문 밖을 나섰다. 조심조심 돌계단을 한 걸음씩 걸어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 좁은 골목길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오늘도 하늘은 무심했다.

시계 침이 밤 10시를 가리킬 때까지 골목길 사이에선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가슴에서 찰랑인다. 돌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제아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가 제발 돌아오게 해주세요.

작별 인사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귓바퀴를 맴도는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왜 여기 앉아 있어.”

번쩍 고개를 들자 가로등 불빛마저 밀어내는 도준의 새하얀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눈앞의 도준이 꿈만 같아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후드득, 투명한 눈물방울이 창백한 뺨을 가르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당황한 건 다름 아닌 도준이었다.

“……왜 늦었어?”

서럽게 흘러내리는 눈물과 달리 쏘아붙이는 제아의 음성은 앙칼졌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어. 만나야 할 사람도 좀 있었고. 그래서…….”

“손가락 부러졌어? 그럼 연락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메시지 한 통도 못 보내?”

도준을 기다렸다. 오늘부터 집에 있는 걸 아니 일부러라도 일찍 올 것만 같아서.

일찍 오면 큰 맘 먹고 병원 가서 아기도 보여주려고 했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기다린 거 아니야! 밥을 차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열쇠는 하나뿐이니까 어딜 나가도 될지 말지! 그래서! 그래서!”

오랜만에 예쁘게 보이고 싶어 마스카라도 하고 립스틱도 발랐다는 건 비밀.

그런데 그런 제아를 응시하는 도준의 눈빛은 꽤 짓궂어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난 속 타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하는 말은 더 기가 막혔다.

“꼭 남편 바가지 긁는 와이프 같네.”

“……!”

“이 모습도 이렇게 예뻐 보이니. 이래서야 오빠 동생 할 수 있나.”

얼굴이 확 붉어 올랐다. 제아는 급하게 시선을 틀었다.

“무, 무슨! 오, 오빠한테도 그럴 수 있거든? 가족은 뭐, 기다리면 안 되나? 잔소리해서도 안 되고?”

“많이 기다렸어?”

그걸 몰라서 물어?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게 물으니 눈물이 더욱더 후드득 소나기처럼 볼을 적셨다.

그런데도 도준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씨이, 지금 웃음이 나와?”

“절대 안 기다린다고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보고 퇴근하라고 했던 게 너잖아. 일찍 오면 너 신경 쓰여 할까 봐 부러 늦게 왔지.”

“…….”

“집에 같이 있으면 나랑 닿을까 봐 제아 너 신경 바짝 곤두서잖아.”

서러움에 달달 떨리던 입술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오늘 그 말을 했던 게 정말 떠올라버려서.

그렇다고 그걸 또 정확히 기억하고 말하는 그가 너무 얄미웠다.

그러다 불현듯 도준의 한쪽 손에 들린 하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제아의 눈이 심하게 일렁였다.

설마, 유전자 검사 결과? 그래서 늦은 거였어?

진짜 두려움이 온몸을 빠르게 좀먹기 시작했다. 믿었던 만큼 도준은 더 괴로웠을 것이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겠지.

“……이제 그만할래.”

무슨 말이냐는 듯 도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제아를 응시했다.

“같이 있어도 힘들고 떨어져 있어도 힘드니 같이 있기로 한 거. 차라리 떨어져서 힘들어 할래. 더 이상 이 짓 못 해먹…….”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틀어 막혔다.

잔뜩 격앙된 시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도준의 촘촘한 속눈썹이 보였다.

파고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윗입술을 먼저 공략한 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따스한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참았던 열기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심장이 바짝 조여오고 온몸이 달달 떨려왔다.

쪽―.

강력한 흡입을 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입술이 떨어지는 청량한 소리가 골목길을 울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제아가 쏘아붙이기도 전에.

“키, 키스하면 어떻……?”

“나 결혼 좀 시켜주라.”

쏟아질 듯 커다래진 제아의 눈을 지그시 마주쳐오며 도준이 느릿하게 말을 끝맺었다.

“……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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