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97화 (97/104)

97. 우리가 플라토닉한 사랑만 한 건 아니잖아.

2017.08.07.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라락, 이불과 옷이 스치는 소리에 말이다. 몸을 일으킨 도준은 좁은 창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 좋은 그라도 어쩔 수 없겠지. 그도…… 신이 아니니까.

이제 남은 건 이별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킨 제아는 유려한 도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젠 다시 못 볼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심장은 겨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너에게 그 말을 한 사람, 보나마나 내 어머니겠지.”

돌아서지 않은 채 방 안을 울리는 그의 말투엔 짜증이 다분히 배어 있었다. 제아가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다.

“헤어지게 하려고 무슨 말을 못 할까.”

설마, 믿지 않는 거야?

제아는 확인하지도 않고 갈대처럼 흔들려버린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엄마한테도 확인했어.”

‘그러니 받아들여, 제발. 내가 못하는 거 오빠가 해줘야 해. 나와 달리 오빤 냉정하잖아.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잖아. 오빠가 날 끊어내줘.’

제아의 머릿속에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윽고 돌아선 도준이 방 안에 불을 밝히고 제아의 앞에 마주 앉았다.

서늘한 눈매와 깊게 가라앉은 동공은 이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정확히 말씀하셨어? 너와 내 아빠가 같다고?”

정확히?

제아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또르르 굴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확히는 아니었다.

그저 비슷한 대답을 했고 뉘앙스를 그렇게 풍겼을 뿐이었다.

그때는 너무 감정이 복받쳐 오른 상태라 그걸 판단할 만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비슷……?”

웅얼거리던 말이 목구멍 안으로 급하게 다시 삼켜졌다.

예고도 없이 얼굴 가까이 훅 치고 들어온 도준의 눈동자는 데일 듯이 뜨거웠고 또 집요했다.

“문제아, 네 눈앞에 있는 난 누구지.”

“……?”

“오빠 아니면 남자.”

“……!”

“전자야, 후자야.”

의미심장한 질문이 송곳처럼 제아의 뇌를 꿰뚫었다.

“먼저 대답해주자면, 내 앞에 있는 건 동생이 아니라 여자야.”

아찔한 얼굴처럼 치명적인 고백이 줄줄 연타로 흘러나왔다.

“우리가 플라토닉한 사랑만 한 건 아니잖아. 몸까지 줬어.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노골적인 표현에 제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미, 미쳤어! 제아는 상체를 뒤로 빼보지만 그의 손에 턱이 잡혀 다시 끌려갔다.

“눈 보고 대답하라고 했지? 잘 들어.”

짙어진 눈빛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적나라하게 제아의 입술을 더듬고 쓸어내렸다.

“난 지금도 너랑 키스하고 싶고 잠도 자고 싶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덮치듯이 도준이 몸을 숙였다.

“도덕이나 윤리 따위 다 버려버리고 싶은 만큼.”

바닥에 몸이 눕혀지면서 등 뒤로 이불의 촉감이 느껴진다.

다리 사이로 파고든 단단한 허벅지의 촉감이 아찔하기만 해서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더러운 욕망을 느껴버린 눈동자를 도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나른하게 새어 들어오는 도준의 음성은 이미 눈치챘다.

“너도 날 원하잖아. 아니야?”

귓가에 바짝 붙은 도준의 입술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어떻게 너와 내가 남매야.”

그따위 말은 믿지 않는다고.

탐하고 싶은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도준은 기울였던 상체를 곧게 세웠다.

질끈 눈을 감은 채 양팔로 배를 감싸쥔 제아의 여린 몸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그에게도 꽤 충격적인 한 방이었다. 그러니 제아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오죽 놀랐을까.

놀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여 힘들어했겠지.

연희와 제아가 함께 있는 걸 보지 않았는데도 그날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도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둑한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을 생각했다. 제아가 했던 말의 신빙성에 대해서, 그 말이 거짓일 가능성까지, 모든 걸 유추했다.

피가 반쪽밖에 흐르지 않는다고 해도 엄연히 남매는 남매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과 제아가 닮은 곳이라곤 하얀 피부를 제외하곤 없다.

무엇보다 유달리 도톰한 제아의 아랫입술, 염색하지 않았는데도 갈색을 띄고 있는 머리칼, 그건 분명 윤식의 것이었다.

결론은 하나다. 절대 남매일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런 걸로 제아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를 올려다보는 제아의 한껏 커다래진 눈동자는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자신에 의해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기한테 해로워.”

다정한 그의 음성에 제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애처로울 만큼 떨렸다. 그런데도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야무졌다.

“어떻게 아무 생각을 안 해. 오빠가 내 눈앞에 있는데.”

“…….”

“오빠 말이 맞아. 그 사실을 아는데도 난 여전히 오빨 남자로 보고 있어. 그래서 너무 힘들어. 근데 오빠랑 떨어져 있는 것도 힘들더라구.”

옅게 한숨을 내쉬는 제아는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이었다.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믿어버린 게 3개월이 넘었으니 그동안 오죽 마음고생을 했을까.

“그래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해. 우리 이러지 말자, 오빠. 오빠도 힘들 테지만…… 이젠 내 집에서 나가……?”

도준답지 않게 제아의 말을 가로챘다.

“같이 있어도 힘들고 떨어져 있어도 힘들고. 그게 너와 나 사이인가?”

도준이 반문하자 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차라리 같이 있는 걸 선택하는 게 낫지 않나.”

차갑게 식어가던 제아의 심장 박동이 격하게 치솟았다.

“왜 급하게 서두르지? 이별에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

“확인도 안 해보고 왜 단정 지어.”

“…….”

“너랑 내가 이복남매라고 치자. 그럼 오빠로 곁에 있으면 되잖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

“오빠로서 동생 곁에 있는 것도 문제가 되나?”

귀가 멍멍하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도준의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도 내가 떠나길 원해? 그럼 네가 먼저 날 잊어. 내 존재에 보란 듯이 무신경해져.”

“…….”

“그럼 기꺼이 떠나줄 테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진 제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 제아를 도준이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머뭇거리던 제아의 손이 마침내 도준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유전자 검사 먼저 하자. 나머진 그 후에, 천천히 생각하는 거야.”

***

제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좁은 이불 안에서 반듯하게 누워 도준과 잠이 들었다.

정말 순수하게 손만 잡고 잠이 든 것이다. 서로의 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욕실에서 막 나온 도준은 상체를 헐벗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유려하게 빠지는 등 라인과 매끈한 상체 근육에 반응한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린다. 잊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돌리며 제아는 말을 했다.

“아침 먹고 출근해, 오빠.”

핼쑥한 얼굴이 못내 걸려 아침을 차려준 건데 정작 도준은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 국과 밥만 떠먹고 있었다.

몇 번이나 그의 밥 위로 반찬을 올려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젓가락에 꼭 힘을 주고 버텼다.

이런 작은 것까지도 도무지 그에게 무신경해질 수가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절망감이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왔다. 돌계단 앞에 다다르자 도준이 손을 내밀었다.

“넘어지면 큰일 나잖아.”

3개월을 탈 없이 오르내렸던 계단이다. 그럼에도 제아는 모른 척 그의 손을 잡았다.

수없이 잡았던 손인데 왜 이렇게 떨릴까. 지금이 가장 떨리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거, 이번 주까지만이야.”

차에 오르자마자 도준이 다시 한 번 확답을 받았다.

그는 당장 그만두라고 했지만 제아로선 그럴 수 없었다. 그동안 잘해준 영자에게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느려도 너무 느린 도준의 차가 문제였다.

이러면 걸어가느니만 못하다. 방지 턱이라도 있으면 차가 아예 정차하는 느낌이었다.

산부인과에 갈 때 느려 터지게 운전한다고 지연에게 구박을 받던 지로마저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도준에 비하면 지로는 과속 수준이었다.

“속도 좀만 내주면 안 될까. 이러다 나 지각하겠어.”

“차가 너무 덜컹거려서 아기 놀라. 위험해서 안 돼.”

보기 좋게 딱 거절당했다.

이렇게 승차감 좋은 차가 어디가 덜컹거려. 위험하긴 또 뭐가 위험한데.

제아는 잠시 기가 막힌 눈빛으로 도준을 바라보았다. 스피드를 즐기는 남자가 이렇게 운전을 하는 건 지독히도 낯설었다.

그래도 지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도 태아한테 충격이 가서 위험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아기들 없거든?”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킬로미터로 달리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이 비싼 차는 속도가 붙지 않았다. 아후, 저 고집…….

“나랑 아기 스트레스로 말라죽기 전에, 빨리 속도 내.”

이를 앙 다물고 살벌하게 흘리자, 그제야 마지못한 듯 차에 가속이 붙었다.

기껏해야 40킬로미터로 올라간 거지만 그래도 우선 그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식당이 멀지 않다는 것에 안심을 하면서 말이다.

도준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 운전에 초집중하고 있었다.

타고난 스피드광이 혹시라도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을까 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도준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제아는 그만 웃어버렸다.

한도준 씨, 왜 이렇게 귀여운 건데.

잊으라구? 무신경해지라구? 오히려 그의 색다른 매력이 아주 톡톡 터져서 제대로 그녀를 홀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덤덤해질 수가 있을까. 같이 있을수록 덤덤해지기는커녕 감정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더 깊어질 감정 따위 없을 줄 알았는데.

식당 근처에 도착하자 둘은 차에서 내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퇴근해서 도착하면 7시 정도 될 거야.”

먼저 도준이 말을 꺼냈고 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입술에 달라붙는 게 느껴지지만 그녀는 애써 모른 척했다.

“…….”

“…….”

결국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서로가 눈을 피했다. 처음 연애하는 것처럼 어색하기만 하고 심장은 자꾸만 두근거린다.

“다녀올게.”

“응.”

“조심해야 해. 뭐든지.”

“걱정 좀 그만해.”

그제야 도준이 차에 올랐다. 성격 급하게 출발하는 도준의 차를 제아는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차가 보이지 않는데도 한참 동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

한 치의 틀어짐도 없이 모든 게 연희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준도 한태영도 아닌 최종 승자는 바로 그녀 자신이다.

오토바이 사고 당시 중환자실에 입원할 정도로 도준의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부러 중환자실에 도준을 옮겼고 그 여자의 딸이 보도록 했다.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이렇게 된 거야.

죄책감에 엄청난 자책감까지 느끼게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그 여자 딸의 핼쑥한 얼굴을 적신 눈물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약속대로 그 여자 딸은 잠적했고 도준은 그 여자 딸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더 이상 찾지도 않는다. 모든 걸 포기한 듯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병원과 입을 맞추어서 아들의 몸 상태를 좋지 않게 부풀리고 다리 치료를 늦추게 한 건 순수하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지독한 몸의 상태에 힘들어하며 그 여자 딸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더욱더 커져만 갈 테니까.

한태영도 구속이 되었고 한강훈은 이제 뒷배 없는 나약한 종이배일 뿐이었다.

입김 한 번만으로도 날려버릴 수 있는 존재감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태영의 구속에 제일 그룹이 통째로 흔들리자 한 회장은 분노했지만 그 여자의 딸과 헤어졌다는 소식에 흔쾌하게 도준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흔들린 제일 그룹은 명석한 손자가 다시 원래의 궤도로 올려놓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민화연과 결혼시켜서 손주만 좀 보게 해봐라. 그러면 남은 내 주식까지 몽땅 연희 네게 물려줄 터이니.

이제 남은 건 중용의 손녀딸인 민화연과 도준을 약혼시키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게 쉽진 않았다.

몇 번이나 자리를 마련하려 시도했지만 도준은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일 핑계를 대고 정말 미친 듯이 일만 하니, 트집을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 여자에게 상처받았는데 여자를 만나고 싶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기업가들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또 다른 사업의 연장이다.

―민화연과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내가 가진 주식의 반, 네 앞으로 돌려주마.

그리고 오늘 마침내 도준이 식사 자리에 응한 것이다. 화연이 함께한다고는 안 했지만 어련히 눈치챘을 거라 믿었다.

재력과 권력 앞에 장사는 없다. 특히 남자들이란 족속들은. 태영도 그랬고, 그 남자 김재경도 그랬으니.

조선 호텔로 들어서자 따가운 시선이 얼굴에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조선 호텔 외동딸인 레이나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망 가득하고 상처받은 눈빛으로.

‘조선 호텔은 어림도 없지.’

재력은 넘칠 만큼 넘쳤다. 필요한 건 기업의 미래를 뒷받침해줄 정치권력일 뿐이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진 레이나의 시선을 가뿐히 무시한 연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운지 레스토랑 안의 프라이빗 룸엔 화연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연희가 들어서자 벌써 며느리가 된 듯 화연이 살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어머니, 오셨어요?”

화연이 빼주는 의자에 앉은 연희가 입을 열었다.

“화연 양, 내 말 잘 들어요. 내 아들이긴 하지만 도준이 고집이 보통이 아니에요. 오늘 식사 자리에 응하긴 했지만 예의에 어긋날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줬음 해요. 어차피 결혼하면 남잔 여자에게 잡히기 마련이니까.”

“걱정 마세요. 저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에요, 어머니. 도준 씨 잘 보듬어주고 이해하도록 노력 많이 할 거예요. 사랑 받는 건 다 여자 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그래요. 그나저나 의원님께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들어 하시고?”

화연이 서글서글하게 웃는다. 한 태영의 비리에 그녀의 할아버지인 중용도 깊게 관련이 있는지라 언론에서 완전히 피해갈 순 없었다.

들쑤심을 당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실세이기에 결국은 교묘하게 빠져 나갔다.

그 비리 건을 터뜨린 게 도준임을 알기에 중용이 불같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혀를 내둘렀다.

―그 녀석 보통 놈이 아닌 건 내가 알아봤어. 진즉에.

그럼에도 중용이 화를 풀지 않은 척 연희에게 말을 전달한 건 순수하게 그녀에게 예쁨을 받기 위한 화연의 계획이었다.

“네, 마음에 들어 하세요. 아직 화가 조금 덜 풀리긴 하셨지만, 제가 마음에 든다는데 할아버지라고 별수 있겠어요? 할아버지가 후원만 하면 제일 그룹,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도준이 나타났다.

살이 조금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멋있는 그의 모습에 화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폭주했다.

드디어 저 남자가 내 남자가 되는구나.

그녀는 꿈에 젖어들었다.

“불청객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힐끗 화연을 쳐다본 도준이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연히 시간이 맞아서 내가 화연 양을 불렀다.”

수줍게 내린 시선 끝에, 슈트에 감싸인 도준의 단단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남성적인 체향에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해져만 가는 화연이었다.

“이제 그만 결혼할까 합니다.”

주어도 생략한 도준의 건방진 말투에도 연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약혼은 먼저 해야지.”

“좀 급해서요.”

싫다고 피해 다니더니 이렇게 득달같이 서두르는 도준의 모습에 연희가 내심 당황하는 순간, 무심한 눈빛 속에 숨겨놓았던 칼을 드러내고 도준이 연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꼬박 석 달 걸렸습니다.”

“……?”

“제아 찾아내는 데 말입니다.”

느닷없이 언급된 불쾌한 이름에 연희가 소리를 내질렀다.

“한도준!”

혹시라도 연희가 제아를 숨겼을까 봐 잔뜩 몸을 사렸던 도준이었다.

하지만 제아를 찾았고, 이젠 무서울 게 없었다. 훌훌 털고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제아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붙인 사람만 해도 10명이 넘는다는 걸.

그녀가 일하는 곳부터 살고 있는 동네까지, 곳곳에 소리 없이 스며들어 있었다.

다신 숨지 못하도록, 누군가 건들지도 채가지도 못하도록.

“이 자리에 응한 건 계약 종료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테이블 위로 서류가 놓여졌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10년 전 그녀가 도준에게 내밀었던 그 계약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 딸, 아직도 포기 못 한 거니? 그 애가 뭐라고.”

“…….”

“그 앤 네 이복동생이야! 어디서 더러운 짓을 하려고 결혼을 입에 담아?”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으니, 그쪽은 이제 좀 사라져주지 그래.”

영문을 모른 채 살벌한 모자 사이에 끼어 있던 화연이 급히 사라진 후에야 도준이 삐딱하게 입매를 곤두세웠다.

“동생이라. 뭐, 그럴지도. 또는 아닐지도.”

“……!”

“그런데 어머니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연희의 눈 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재기 불가능하도록 한태영 부자를 완벽하게 끌어내렸습니다. 후계자인 제가 물러나도 이제 한 회장님은 그들 부자를 불러들일 수가 없을 정도로. 이제 모든 게 어머니에게 넘어올 겁니다. 어머니 뜻대로 모든 게 이루어졌어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보란 듯이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서 허공에 날렸다. 그를 옭아매던 족쇄가 산산조각 나서 룸 내부에 제멋대로 뿌려졌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저 놔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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