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96화 (96/104)

96. 그래도 나랑 키스하고 싶어?

2017.08.03.

조심히 숨을 죽이고 첫마디를 기다려보지만, 도준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만 미약하게 둘 사이를 메우는 공기를 채워줄 뿐이었다.

어떻게든 도준의 속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새까만 물속처럼 보이지 않아 그녀의 속은 바짝 타들어갔다.

그때였다.

“아기 아빠, 접니다.”

도준의 어깨 너머, 우산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로를 보는 순간 제아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닌 이상, 무모한 도발이었다.

눈빛으로 피하라는 신호를 보내도 지로는 끝끝내 뒤까지 와서 멈추어 섰다.

그럼에도 도준은 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들어 제아의 눈을 마주하는 게 반응의 전부였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도준의 눈빛에 제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원망하는 것도 같고 화난 것도 같은, 서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잔뜩 날이 선 눈빛.

“선배, 저랑 얘기 좀 하시……?”

“지금 당장 꺼져.”

도준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지로의 말을 무참히 잘라버렸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가고 싶으면.”

제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도준이 갑자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아니면 그냥 죽여버릴까.”

차갑게 가라앉은 도준의 눈빛을 본 제아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우선, 한지로부터 살리고 보자.

“다니는 병원이 지로 부모님 사시는 동네에 있어. 잘 피해 다닌다고 다녔는데 하필이면 오늘 마주쳐버렸어. 그게 전부야.”

지로의 아기도 아니고, 연락하고 있던 것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도준이 움직이지 않자, 제아는 다시 한 번 입술에 힘을 주었다.

“정말이야, 오빠.”

그러니까 그런 무서운 눈빛 좀 하지 마.

***

오래된 주택의 1층에 붙어 있는 단칸방에 제아는 머무르고 있었다. 허름하지만 깔끔한 성격답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방은 비좁았다.

열쇠로 방의 문을 연 제아가 비스듬히 몸을 비켜섰다.

“들어와.”

도준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방문턱을 넘어 좁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태연한 척 싱크대로 다가가 생수를 컵에 따르는 손끝이 달달 떨려왔다.

내민 컵을 도준이 받아드는 순간 아슬하게 스친 서로의 손끝에 제아는 감전된 듯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반응하는 스스로가 미치도록 싫다.

그런 제아를 도준은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꿰뚫을 듯 쳐들어오는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제아가 자그맣게 말을 던졌다.

“다리, 안 좋은 거야?”

남은 돌계단을 올라 집까지 오는 동안 도준의 걸음걸이가 미묘하게 변했음을 눈치챈 것이다. 한쪽 다리에 유난히 힘을 주고 신경 써서 걷는 걸 말이다.

“회복 중이야. 재활치료도 받는 중이고. 그러는 넌.”

“……?”

“얼굴이 왜 이렇게 야윈 건데.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건가.”

“이젠 잘 먹어. 근데 살이 안 찌는 것뿐이야.”

일인 식탁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도준이 제대로 보겠다는 듯 다가오려 하자 제아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다가오지 말고.”

“…….”

“그냥 거기서 이야기해.”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막히는데 도준과 더 가까이 있으면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밀폐된 좁은 공간에 둘만 있는 게 얼마만인지.

그의 존재만으로도 이 작은 공간이 꽉 들어찼고, 남성적인 짙은 체향이 좁은 방 안의 공기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열린 창문 밖으로 스며드는 잔잔한 빗소리마저 가세해서 제아를 자극하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딥 키스.

어느 것 하나 그와의 추억이 어리지 않은 게 없었다.

그녀와 달리 도준은 천천히 좁은 방 안을 살피는 중이었다.

원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잡은 방 한 칸. 한쪽에 작은 싱크대가, 싱크대 옆엔 1인용 식탁이, 반대쪽엔 이불이, 좁은 욕실 옆 작은 공간은 가지런히 개진 옷이 담긴 캐리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병원은 또 언제 가지?”

“한 달에 한 번 가. 오늘 다녀왔으니 다음 달에 가면 돼.”

“내일 같이 가.”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도준의 시선이 다시 제아에게 돌아왔다.

“우리 아기, 나도 보고 싶어.”

우리 아기. 너무도 당연하게 흘러나온 그 말에 제아가 눈을 치켜떴다.

“난…… 오빠 아기라고 한 적 없어.”

“우리 아기잖아.”

칼처럼 곧은 도준의 시선이 찌르듯이 제아의 심장을 찔러들었다. 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건데.

“우리 아기가 아니라 내 아기야. 내 아기라구.”

고집스러운 그 한마디에 도준의 눈매 끝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제아야.”

도준이 일어나 다가오려 하자 화들짝 놀란 제아가 뒷걸음을 쳤다.

“다가오지 마. 나한테…… 손대지 마.”

격렬한 거부의 몸짓에 얼어붙은 도준이 나직하지만 또렷하게 말을 한다.

“독하게 살아서 너 찾으러 왔잖아. 그러니까 나보고 좀 웃어주면 안 되나.”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사경을 해매는 중에도 도준이 듣고 기억까지 할 줄은.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인데. 꿈이라고 믿을 법도 한데.

왜 떠났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찾아냈으니 칭찬해 달라는 듯 웃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웃는단 말인가.

정말 찾아버려서, 이제 정말 얼굴을 보고 직접 이별을 고해야 하는데.

그것만은 정말 못 하는데. 자신 없는데.

차라리 찾지나 말지.

그를 피해 자꾸만 뒤로 물러서던 제아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그녀는 벽에 바짝 붙어 시선을 피했다. 저 눈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무기력함을 느끼니까.

“제아야, 나 좀 봐.”

못된 짓을 한 건 그녀인데, 사정을 하는 건 도준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 좀 잊어줘. 그냥 놔줘. 그래야 내가 살아. 오빠랑 같이 있으면, 내가 너무 힘들어. 죽을 만큼.”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와 심장에 꽂혔다. 상처를 주는 건 제아 자신인데, 아파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내가 널 잊고 놔주기를 원해?”

도준이 한 걸음 더 좁혀왔다.

“그럼 내 눈을 똑바로 보고.”

탁―.

도준이 벽에 바짝 붙은 제아를 양팔로 가두었다. 새하얀 형광등 때문에 드리워진 길쭉한 그림자가 제아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콧속으로 스며드는 강렬한 그의 체향에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키스할 듯 각도를 틀어 다가온 도준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딪히기 전 아슬하게 멈추었다.

“말해봐.”

도준의 뜨거운 숨이 목구멍까지 타고 들어오자, 온몸의 신경이 아우성을 쳤다.

“그럼 잊고 떠나줄 테니까.”

반응하는 몸과 거부하는 마음이 충돌을 일으켰다.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며 통증을 호소하자 제아는 짧게 숨을 헐떡였다. 호흡이 힘들어지자 눈앞이 새하얘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오빨 사랑…….”

하지…… 않아.

제아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눈꺼풀이 내려앉기 전 아득하게 들려온다.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을 이어주는 도준의 나직한 음성이.

“……해.”

벽에 붙어 무너져 내린 제아를 품으로 받아낸 도준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곤 잠이 든 제아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나도 널 사랑해.”

난 절대 너 못 잊어. 놔줄 생각도 없어. 그래야 내가 사니까.

***

반듯하게 누운 제아는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쌔근쌔근 고른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병원에 데려갈까 했지만, 눈을 뜨면 난리 칠 제아란 걸 알기에 도준은 부러 지켜본 것이었다.

잠시 밖에 나와 담배를 입에 물고 그 끝을 씹어대는 도준의 귓가에 아직까지도 제아의 속삭임이 맴돌았다.

오로지 그 속삭임만을 떠올리며 독하게 버티고 찾아냈는데, 대체 왜.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몸서리를 치는 제아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경을 헤매는 그를 두고 떠날 만큼, 임신까지 했는데도 숨길 만큼 제아를 그렇게 내몬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묻는다고 대답할 거였으면 그렇게 떠나지도 않았겠지. 작정하고 떠났으니 물어봐야 무의미했다.

“선배.”

뒤에서 툭 튀어나온 음성. 도준은 몸을 틈과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퍽―.

얼굴을 움켜쥔 채 지로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제아를 봤을 때 넌 내게 바로 전화해서 알렸어야 했어.”

한 대 세차게 맞고 나니 지로도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선배는 제아 사라진 거에 관심도 없었잖습니까! 오히려 잘됐다는 듯 일만 하고 내팽개치더니, 갑자기 찾아와서 왜 이러는 겁니까?”

한지로는 역시나 단순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

“한 회장 쪽에서 작정하고 숨겨버리면 나라도 제아 찾지 못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돈이라면 있을 만큼 있지만 국내 서열 2위 그룹인 제일 그룹만큼은 아니다.

그런 재력의 부딪힘이라면 그가 진다. 그래서 신경을 끈 척 철저하게 연기를 해야 했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나보다 제아와 가까운 너희들이 뭘 해줄 건데.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걸 알면 더 숨길 거 뻔한데. 내가 왜 그런 너희들에게 내 속을 까발려야 하지?”

“……!”

“오늘 마주쳤는데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것처럼.”

지로는 순간 멍해졌다.

그게, 그런 이유였어?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지로가 야무지게 눈빛을 부딪쳤다.

“아기 아빠라고 나선 건 죄송합니다.”

“신경 안 써. 너 아닌 거 아니까.”

저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지로의 자존심을 제대로 짓밟았다.

“……제아 좀 잊고 그냥 놔두면 안 됩니까.”

집어삼킬 듯 험악한 짐승의 눈빛으로 도준이 지로를 쏘아보았다.

“너, 내가 그 마음 접으라고 경고했었지.”

“제아 차지하려고 하는 말 아닙니다. 선배 말대로 제아 어차피 저 거들떠도 안 봐요. 전 제아 편이라 선배한테 무슨 말을 못 해드리지만 이거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선배가 잊어주셔야 제아가 편합니다.”

고고한 도준의 자존심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이었다. 제아가 눈앞의 이 녀석에게는 털어놓았다.

포커페이스가 벗겨진 도준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걸 지로는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고고한 자존심으로 온몸에 철갑을 두른 남자가 상처 받은 눈빛이라니.

“제아를 찾는 동안 수많은 이유를 유추해봤지.”

“…….”

“그런데 어떤 이유도 나와 제아가 헤어질 이유는 될 수 없어.”

그럼에도 상처 어린 사나운 눈빛으로 살벌하게 경고했다. 절대 난 제아를 놔주지 않을 거라고.

어떤 진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지로는 꾹 참았다. 제아는 제 입으로 그 말을 하길 원할 테니까.

“선배가 모든 걸 다 아는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도발적인 말에 도준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결국은 놔주실 수밖에 없으실 겁니다. 그 이유는, 제아에게 직접 들으세요. 그 후부터는 선배야말로 제가 뭘 하든 간섭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지로가 돌계단을 내려갈 때 마침 인호가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인호에게 지로는 건성으로 눈인사만 건넸다.

도준이 부탁한 것들을 챙겨서 돌계단을 오른 인호는 돌계단의 수만큼 끝도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현대 시대에 차가 못 올라가는 길이 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제아 씨는 여사님한테 돈 받아놓고 왜 이런 달동네에서 사는 거고? 아후, 내 허벅지. 남자는 허벅지 힘이라고 하……?”

“제아가 임신을 했어.”

도준이 불쑥 꺼낸 한마디에 인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뜨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설마, 애 아빠가 한지로야? 그렇지? 맞지? 그게 아니고서야 한지로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대박! 그럼 결론이 제아 씨가 바람피워서 너한테 죽을까 봐 숨은……?”

“넌 제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상상만으로도 기분 더러우니까.”

도준의 타박에 인호가 눈썹을 씰룩였다.

“쓸데없는 건지 어떻게 알아? 애는 낳아봐야 안다. 유전자 검사를…… 악!”

듣지 못할 대화 수준에 도준이 손에 들고 있는 재킷으로 인호의 얼굴을 쳐버렸다.

“검사 안 해도 돼. 누가 뭐래도 내 아이니까.”

“네가 아기 아빠라면 왜 떠나. 더 달라붙어야지. 분명 찜찜한 이유가 있다니까?”

“그걸 알아내야지.”

“……?”

“한지로는 알고 있는데 나는 알면 안 되는 이유.”

눈으론 사랑한다고 절절하게 외치면서 몸은 그를 밀어내려 하는 이유.

급한 대로 인호가 가져온 서류에 사인을 휘갈긴 후에야 도준이 입을 열었다.

“스케줄 조정 좀 해놔. 내일부터 무조건 칼 퇴근 6시로.”

***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제아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콧속으로 스며드는 짙은 체향이 그가 지척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어루만짐 당하는 곳이 배라는 걸 알고 나서 말이다.

조심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에 몸이 물든 도준이 보였다.

깨어 있는 걸 알면 직시해야 하는 현실에 제아는 숨을 죽였다.

그때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채 팔로 얼굴을 괸 도준이 시선을 들었다. 달달 떨리는 눈꺼풀을 눈치챈 걸까, 흐트러진 호흡을 눈치챈 걸까.

“더 자지 왜 깼어.”

허스키한 도준의 저음은 부드러웠던 손길처럼 듣기 좋게 귓바퀴를 맴돌다 흘러들었다.

어둠마저도 그의 매혹적인 얼굴을 가릴 순 없었다. 더 짙어진 음영 때문에 섬세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져서 신비롭기까지 했다.

보지 않을 땐 견딜 만했다. 아니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공간에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미칠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이 남잘 내가 오빠로 볼 수 있을까. 다른 여자에게 보낼 수 있을까.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다. 시간이 약이니 처음엔 버티던 도준도 결국은 잊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지.

그가 다른 여자에게 듣기 좋은 음성으로 속삭이고 그윽하게 바라봐주고 따스하게 안아준다면…….

생각만으로도 무더운 여름날처럼 불쾌지수가 급속도로 상승했다.

얽혔던 시선을 내려 제아의 배를 다시 조심히 어루만지는 도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신기해. 어떻게 여기에 우리 아기가 있을 수 있지?”

언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샤워까지 한 걸까. 그에게서 풍겨지는 짙은 체향에 섞인 익숙한 향은 바로 그녀의 욕실에 있는 보디샴푸의 향이었다.

그윽한 향도 향이었지만 길쭉한 손가락의 감각적인 움직임이 서서히 몸에 열기를 피어오르게 했다.

“내가 아기 아빠라는 것도.”

나른하게 휘어진 도준의 눈매가 그윽하게 제아를 응시했다. 어느새 배를 떠난 그의 손가락이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굳은살이 배인 엄지에 도톰한 아랫입술이 꾹 눌려 쓸리자, 제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뜬 호흡이 불규칙하게 흘러나왔다.

만지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대감이 피어오른 몸에 야릇한 열기가 감돌 뿐이었다.

달빛에 은은하게 밝혀진 좁은 방 안이 꽤 운치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준이라는 남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둘의 시선이 스파크가 튀듯 부딪치며 강렬하게 얽혀들었다. 격렬한 욕구에 사로잡힌 순간이었고, 서로가 그걸 열렬히 느끼고 있었다.

키스 하고 싶다. 살을 맞대고 싶다. 온몸으로 서로를 마음껏 느끼며 억눌린 그리움을 토해내고 싶다.

“키스는 해도 되지 않나?”

안 된다고 거부해야만 하는데, 제아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인 기대감에 사로잡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축일 뿐이었다.

앙증맞은 혀의 움직임 한 번에 도준의 눈빛이 거칠게 돌변하는 게 어둠 속에서도 확연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도준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자석에 이끌리듯 도준이 서서히 고개를 숙여왔다. 다가올수록 짙어지는 체향이 밀도 있게 둘 사이를 채우고 입술 위로 쏟아지는 그의 뜨거운 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키스만 할게.”

거절하지 말라는 듯 애틋하게 탁한 음성을 흘린 도준의 입술이 꽃잎처럼 살짝 벌어진 입술을 집어삼키기 전, 한줄기 남아 있던 제아의 이성이 예민하게 곤두서 외친다.

‘이복 오빠야. 정신 차려.’

맙소사. 어떻게 그걸 망각할 수 있지?

부드러운 가슴을 막 짓이기려던 단단한 가슴팍이 미약한 손짓에 의해 막혔다.

“……안 돼.”

마지못해 고개를 든 도준이 길게 늘어진 눈매로 제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움직임은 멈추었지만 얼굴 피부로 쏟아지는 그의 숨은 아직 열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지금,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런 도준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제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같이 있으면 절대 그를 오빠로 볼 수 없다. 무조건 도준의 곁에서 떠나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꽁꽁 숨어도 그는 찾아낼 것이다. 결론은 도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은……혼자 짊어지려 했던 진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미친 짓은, 멈추어야 하니까.

마음먹으니 그다음은 쉬웠다.

“김재경.”

제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의외의 이름에 도준의 눈빛이 굳어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캐묻는 것도 같았다.

“오빠 아빠이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형형했다.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의 눈빛처럼.

그 눈빛에 안면과 입술 근육이 굳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아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여 진실을 토해냈다.

“내 아빠이기도 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그의 숨이 멈추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젠 오빠가 내 눈 보고 대답해봐.”

일그러지는 아름다운 눈매를 피하지 않고 올려다보며 제아는 손을 뻗었다.

어둠마저 베일 듯 날카로운 턱 선을 어루만지던 가는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래도 나랑…….”

그가 했던 걸 돌려주는 것처럼, 손끝으로 감각적인 입술 선을 더듬자 도준의 입술에서 멈추었던 숨이 한 번에 토해져 나왔다.

“키스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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