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95화 (95/104)

95.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나를 찾고 있을까.

2017.07.31.

야속한 시간은 주저 없이 흘러 어느덧 따사로움을 머금은 6월이었다.

인적사항을 제출할 필요 없이 당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장은 식당밖에 없었다.

다행히 식당 주인인 영자는 심성이 곱고 음식 솜씨까지 좋아 톡톡히 도움이 되는 제아를 딸처럼 예뻐했다.

주방으로 들어온 영자가 제아가 만들어놓은 밑반찬을 맛보더니 또다시 감탄했다.

“젊은 아가씨가 어쩜 이렇게 손맛이 좋아?”

그저 배시시 웃으며 앞치마를 푸는 제아의 손에 영자가 만원 짜리 두 장을 쥐여주었다.

“초기에 조심해야 하는 거야. 병원 갈 때 버스 타지 말고 택시 타고 가. 응?”

“네, 사장님.”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였다.

따사로운 햇살에 살랑이는 향긋한 바람에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싶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부드럽게 쓸며 제아는 수줍게 웃었다.

“우리 아가들, 복숭아티 먹고 싶어요? 그럼 우리 택시비로 복숭아티 한 잔 사먹을까?”

커피숍에 들어간 제아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달달한 복숭아티를 마시자 휘몰아치는 어떤 잔상이 몸을 나른하게 풀리게 했다.

달콤한 숨결을 나누고 촉촉한 입술을 맞대고 마셨던 복숭아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올 정도로 온몸이 화끈거리는 기억.

도준을 마지막으로 본 게 3개월 전이다. 그런데도 그가 끼치는 영향력은 여전했다. 몸만 떨어졌을 뿐,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나를 찾고 있을까.”

도준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사고가 있었던 그날 밤, 제아는 중환자실에 있는 도준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도준의 귀에 그가 듣지 못할 속삭임을 흘렸다. 꿈에서라도 들어주길 바라는 간절함에.

―오빨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독하게 살아남아. 그래서 꼭 날 찾아.

그가 찾아주길 바라는, 추악하고 이기적인 바람.

그녀는 3개월 동안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눈과 귀를 닫고 지냈다.

어디서든지 그의 이름을 들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2500원짜리 복숭아 티 한 잔에 들어버렸다. TV에서 흘러나온 그의 이름을.

[3천억 원대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제일 그룹 한태영 부회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또한 제일 백화점과 제일 물산, 제일 건설 등 핵심적인 계열사 오너들도 한 부회장의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하여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검찰 수사에서 유일하게 건재한 제일 계열사는 제일 어패럴입니다. 경영권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쥔 한도준 사장이 이끄는 제일 어패럴은 자진신고 기간 내에 신고를 하고 세금을 모두 납부한 모범 기업에 속합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경영법으로 단기간 내에 제일 어패럴 주가를…….]

심장이 쿵쾅거리고 야릇하게 몸이 떨렸다. 그는 정말, 지독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아니, 더 지독하게 버티는 건 바로 그녀였다.

―진짜 헤어질 거면 이 돈 받아요. 그래야 도준이가 믿을 테니.

CCTV가 적나라하게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제아는 받았다.

―10억까지 필요 없습니다. 1억만 받겠습니다.

모두 손가락질하겠지. 넌 자존심도 없냐고, 결국 돈이 목적이었냐고. 연희의 돈을 받는 순간, 엄마인 윤영이 이해가 되었다. 이해한다는 말과 달리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걸.

벼랑에 몰린 가족을 살리기 위해 연희의 돈을 받았을 윤영.

태어날 아기와 숨어 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1억을 챙긴 자신.

‘나 당분간 어디 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엄마 아빠한테도 연락 못 할 거야. 그래야만 도준 오빠랑 헤어질 수 있어.’

모아놓은 돈과 정산한 퇴직금까지 몽땅 부모님에게 드려서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연희에게 받은 1억으로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싼 병원비도 내고 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한동안 그 돈으로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연희의 돈을 받은 걸.

치켜드는 자존심을 또다시 콱콱 짓밟아 눌러버린 후에야 제아는 커피숍을 나왔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확 끼쳐드는 담배 향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콜록!”

버스 정류장 10M 이내는 분명 금연 구역인데 누가 몰상식하게!

제아의 눈이 빠르게 범인을 찾아 헤맸다. 버스 정류장 벽 밑으로 보이는 새하얀 남자의 스니커즈. 그 위로 새하얀 담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 이외에도 노인과 여자 몇 명이 힐긋거리기는 하지만 섣불리 뭐라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봐요, 정류장 10M…… 흡!”

순간 돌아서려는 남자의 날카로운 옆선이…… 낯이 익다? 후다닥 뒤로 빠진 제아가 걸음을 빨리 옮겨보았다.

“문제아? 제아야! 제아 맞지!”

하지만 결국은 어깨가 잡혀 돌려세워졌다.

***

제일 어패럴 사옥 옥상, 옹기종기 모여 앉은 비서들은 커피를 손에 든 채 한창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대화 주제는 여전히 도준과 제아였다.

“제아 언니, 진짜 제일 그룹에서 협박당한 거 아닐까요?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이유가 없잖아요.”

“나 같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텼을 거예요. 사장님만 잘 잡고 있으면 제일 그룹 며느리가 되는 건데.”

“사장님이 좋아 죽겠다고 매달려도 제일 그룹에서 평범한 며느리를 받아들일 리가 없지. 그런데 무슨 수로 버텨. 그게 바로 한국 부자들 아니겠어?”

신 비서의 말에 두 비서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신 비서님 말이 맞아요. 다 끼리끼리 결혼하잖아요. 현대판 신데렐라는 무슨. 우리 제아 언니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사장님은 강하고 완벽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정작 자기 여자는 못 지킨 거잖……? 헉! 사, 사장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정연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끝에 도준이 서 있었다.

그의 길고 새하얀 손가락 사이에 들린 담배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실내 정원 쪽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봤을 텐데.

그제야 자신들이 눈치 없이 입방정을 떨었다는 걸 깨달은 비서들은 얼른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옥상에서 꽁무니를 뺐다.

그러건 말건 삐딱하게 벽에 등을 기댄 도준은 다시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내 여자를 지키지 못했다라.”

피식, 선연한 붉은색을 머금은 입술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군.”

조금만 더 완벽하게 생각하고 신경을 기울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올려다본 하늘은 무심하리만치 새파랗다. 같은 하늘 아래 서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을 텐데, 제아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오빨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독하게 살아남아. 그래서 꼭 날 찾아.

도준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끔찍한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애틋하게 스며든 그 속삭임이 꿈이 아니라는 걸.

제아는 분명, 그를 보러 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독하게 견뎌낸 끝에 1개월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잘 움직여지지 않던 다리는 2개월의 재활 치료 끝에 정상인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빠르게 걸음을 걸을 순 없었다.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은 다리 근육이 걸핏하면 뻣뻣하게 긴장이 되어 통증을 유발했다.

퇴원한 그가 가장 먼저 매진한 건 회사 일이었다.

도준은 무서우리만치 일에 빠져들었고, 계획대로 한 부회장의 비리 건도 터뜨렸다.

제일 그룹이 통째로 흔들리고 들쑤셔지자 한 회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럼에도 이별 소식에 꽤 만족스러운지 흔쾌히 도준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제일 그룹의 핵심인 제일 전자를 맡으라고 했지만 거부한 채, 제일 어패럴에만 매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얌전하게 몸을 숙이고 이 상황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리고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너 때문에 제아가 못 돌아오고 있는 거야!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세 식구 조촐한 살림이지만 행복하게 살았어. 다 네 탓이야! 우리 식구 불행한 거, 다 네 탓이라구! 이제 너만 보면 넌더리가 나는구나.

찾아간 윤영과 윤식의 눈빛엔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인정한다. 모든 게 제 탓이라는 걸. 차라리 제아를 잊었다면, 찾지만 않았다면, 흔들지 않았다면.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어렸던 동생을 여자로 마음에 품는 순간, 양심 따위 버려버린 지 오래이니.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인호가 정색하며 도준을 반겼다.

“한 사장, 제아 씨 찾은 것 같아!”

돌처럼 딱딱해졌던 도준의 심장이 울컥, 과한 반응을 일으켰다. 통증이라고 느껴질 만큼.

“연락이 왔는데 부동산 한 곳에서 제아 씨랑 비슷한 여잘 본 것 같다고 했대! 아, 계약자  이름은 문세연이고.”

3개월 만에 드디어 잡아낸 흔적. 도준은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렇게 흔적도 안 잡히더니, 네 말대로 방향을 트니 2주일 만에 바로 하나 잡혔네.”

짧은 시간에 비해 엄청난 인력과 돈이 투입되었는데도 이렇다 할 만하게 잡히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도준이 언질을 준 것이다.

―시세가 싼 서울 지역 부동산을 중점적으로 먼저 확인해. 실명의로 계약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저렴한 집은 흔치도 않고 기억에도 남을 테니. 내가 아는 제아라면 가명은 써도 성은 바꾸지 않았을 테니.

돈을 받고 잠적했다는 건 살 곳을 구한다는 뜻이리라. 서울에 있을 거라는 건 본능적인 감이었고. 제아의 사진까지 동원된 후에야 정확히 2주 만에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우선 주소는 받아놨고, 그 동네에 사람 좀 풀어놓을까?”

“됐어.”

“……그럼?”

“내가 직접 가볼 거야.”

***

사실 제아도 지로의 부모님이 사시는 이 동네에 있는 산부인과를 다니는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했었다.

하지만 진료 기록을 하지 않고 봐준다는 병원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쉽게 병원을 다닐 수 있는 이들은 돈 많은 부류들이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평일 낮에 검사를 받고 한 달에 한 번이니 설마 지로를 만날 일은 없겠지 했는데, 방심한 결과물이 산부인과 입구에 떡하니 서 있었다.

“아가는 괜찮대?”

그게 왜 궁금한데? 툭 쏘아붙이려다가 제아는 마음을 갈무리했다.

“한지로, 몇 달 만에 본 거 반갑기는 한데 나 또 너한테 부탁해야 할 것 같아.”

“……?”

“나 만났던 거 잊어줘. 누구한테 말하지도 말고.”

“…….”

“나 잘 지내는 거 봤으니까 지연이한테도 안부 좀 전해주고.”

일방적인 말을 끝낸 후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지로가 갑자기 제아의 손목을 무작정 잡아끌었다.

“야아! 너 왜 이래?”

“우선 타. 타고 이야기해.”

반 강제적으로 조수석 자리에 올라탄 제아에게 지로가 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지연이랑 나, 아무것도 안 묻고 입 다물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도 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사정하니, 나중에 이야기해주겠지 생각했어. 근데 핸드폰도 없애버리고 잠수까지 탈 줄은 몰랐다. 배신감, 아주 쩔었어.”

제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앞뒤 설명도 없이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아기에 대한 건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근데 말이야. 이젠 모른 척 못 하겠다. 너 그렇게 사라지고 이준 선배 고작 한 게 뭔 줄 아냐? 너 어디 있는 줄 아냐, 연락은 하냐 그 두 개만 달랑 묻고 말더라. 이러려고 나한테서 너 뺏어갔나 싶어 열 받고 억울해서 쌍욕 터지려는 거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제아로선 바랐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묘하고 묵직하게 피어오르는 이 실망감은 뭐지?

“대체 이유가 뭐냐. 너만 이렇게 죄 지은 것처럼 숨어 지내야 하는.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니야.”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추악한 사랑의 결말을. 타들어가는 지로의 날카로운 눈빛을 그저 외면하는 게 제아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왜, 이번에도 말하기 싫냐? 하긴,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 거 아니었으면 너 영영 연락 안 했을 거다. 그렇지? 근데 어쩌냐. 나 이번엔 꼭 들어야겠거든. 참견도 해야겠고.”

지로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선배한테 전화할 거다.”

제아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한지로, 한다면 하는 놈인데.

“저, 전화해서 뭐하게. 나 잊은 것 같다면서.”

태연함을 유지해보지만.

“돈 많은 새끼한테 돈 뜯어서 너 줄라고 한다. 그 돈으로 버스 타고 맛있는 것도 좀 사먹으라고! 어쩔래?”

액정에 입력되는 번호가 도준의 번호임을 확인한 순간, 선택의 여지가 사라졌다.

“말하면 될 거 아냐! 그러니까…… 핸드폰 내려놔.”

그럼에도 지로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면 당장 전화를 걸겠다는 듯.

“오빠랑 나. 아빠가 같아.”

“……뭔 소리야.”

“한국말 몰라? 진짜 이복 남매라구.”

길게 찢어진 지로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런데도 한 번 터진 입에서 잘도 말이 흘러나왔다.

“오빤 그걸 모르고 부모님은 내가 임신한 걸 모르고. 이제 이해돼? 여러 사람 죄책감에 시달리고 목잡고 쓰러질 필요 없잖아. 나만 죽은 듯이 아기랑 지내면 되는 거라구. 이제 이해 됐어?”

작정하고 달려들던 지로의 입에 지퍼가 채워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로답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20여 분을 달린 끝에 제아가 사는 동네 어귀에 차가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리는 제아의 뒤를 동네 건달처럼 지로가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꽤 좁고 가파른 돌계단 앞에선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뭔 동네가 계단이 이리 많냐? 문제아, 살살. 살살 좀 올라가라니까? 아기 멀미날라.”

혹시라도 제아가 뒤에서 넘어지면 받아낼 듯 손을 뻗고 뒤에서 오버를 다했다. 그때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가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아이구, 애기 아빠가 아주 자상하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제가 생긴 거랑 좀 다르죠?”

웬일로 넉살 좋게 받아치는 지로를 제아는 기가 막힌 눈빛으로 응시했다. 얘 지금 뭐 하는 거야? 참다못한 제아가 앙칼지게 돌아섰다.

“이제 그만 집에 좀 가줄래? 나 너 엄청 신경 쓰여 죽겠거든요?”

“……질게.”

목청 크던 지로가 아기 옹알이처럼 말을 흘렸다.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 해.”

“너랑 뱃속 아기까지 모두, 내가 책임질게.”

“한지로, 너 미쳤지?”

“내가 성격은 지랄 맞아도 섣불리 말 내뱉을 성격 아닌 건 네가 잘 알 테고. 내 아이는 아니지만 내 아이처럼 책임지고 키운다고 약속할게.”

“…….”

“집에는 사고 쳤다고 하면 되잖아. 내가 등짝 몇 대만 맞으면 네 부모님도, 그리고 우리 가족도 좋아할 거다. 그럼 굳이 너 이렇게 숨어살 필요도 없고, 부모님이랑 친구들이랑 연락 끊을 필요도 없잖아.”

뿜어내는 눈빛과 분위기로 보건대 지로는 지금 진심이다. 돌계단 위에서 지금…… 무슨 짓인지.

갑갑한 그녀의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푸른 하늘은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급기야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운전하는 내내, 이걸 고민했었나 보다.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 아니냐? 난 사랑하는 여자랑 사랑하는 여자를 닮은 아기가 생겨서 좋고. 넌 아기랑 같이 숨지 않고 당당하게 보살핌 받으며 살아도 되고.”

“한지로 너.”

큰 손이 잔말 말라는 듯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민 좀 해보고 거절해, 이 매정한 것아. 당장 대답하라는 거 아니니까 생각 좀 깊이 해줘 봐.”

뭐라고 대꾸를 하고 싶어도 여전히 입은 막혀 있었다.

“비 온다. 저기 지붕 밑으로 들어가 있어. 내가 차에서 얼른 우산 가져올게. 너도 그리고 아가도 비 맞으면 안 돼!”

히죽 웃으며 긴 다리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지로를 멍하니 바라본 제아는 지붕 밑으로 들어가 얕은 빗줄기를 피했다.

집으로 바로 가버릴까 하다 지로의 말을 얌전하게 따른 건 어디까지나 거절을 위해서였다.

“내 인생에 마가 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 꼬일 순 없어.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이마를 살짝 쿵쿵 치던 제아는 불현듯 눈을 번뜩 떴다. 축축한 공기를 비집고 스며드는 어떤 향이 야릇하게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도망가려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단단한 팔에 의해 어깨가 잡아채여 끌어당겨졌다.

비릿한 비 냄새에도 유독 도드라지게 훅 끼쳐오는 짙은 남자의 체향. 그 향기로 인해 주변 공기의 밀도가 순식간에 높아졌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만큼.

“찾았다, 문제아.”

속삭이는 듯, 중얼거리듯, 한숨 섞인 남자의 음성이 귓바퀴를 야릇하게 맴돌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버텨보지만, 새하얀 손끝이 다가와 조심히 턱을 잡아 올렸다. 불가항력의 힘으로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덮치듯이 쏟아져 온몸을 칭칭 옭아매고 심장을 울렸다.

한껏 짙어진 눈동자가 제아의 머리부터 타고 흘러내려 얼굴을 세심히 관찰했다.

어디 잘못된 곳은 없는지 아주 꼼꼼하게 파고드는 눈빛이 달콤할 정도로 깊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굴에서 흘러내린 도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가늘어진 눈빛이 시선을 딱 고정하곤 움직일 줄 몰랐다. 잠그지 않은 카디건 사이로 드러나 있는 살짝 부풀어 오른 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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