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찾아줄 테니까. 기다려.
2017.07.27.
“그러니까 당장…… 이 문 열라구요!”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제아는 차에서 내려 미친 듯이 달려갔다. 쏟아지는 폭우 속, 도로 한 쪽에 널브러진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도준 오빠!”
이 순간만큼은 간절하게 바랐다. 내 심장이, 본능이 잘못 알아본 것이기를. 착각을 한 것이기를.
하지만 하늘은 지독할 정도로 무심했다. 금이 간 헬멧을 벗기자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범벅이 된 도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누가 신고…… 신고 좀…….”
시꺼먼 도로 바닥을 흥건히 메우는 폭우 속, 선명한 피가 먹물처럼 잔인하게 번져나갔다.
그걸 본 제아의 시야가 갑자기 하얘졌다.
파팟, 뇌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걸 느끼는 순간, 제아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
“사모님, 비 맞으면 감기 걸리십니다.”
김 비서가 차에서 급하게 우산을 가져왔지만 연희는 듣지 못한 듯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피범벅이 되어 응급차 안으로 실려 들어가는 아들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대체 네가 이 시간에. 그리고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니.’
묻고 싶지만 물어볼 수 없는 말이었다. 아들은,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니까.
연희는 그저 그 말을 계속 입술 안으로 씹어 삼켰다. 오토바이가 따라붙었다는 말에 강훈 쪽 사람인 줄 알았다. 부산에서도 오토바이로 장난질을 친 놈이니까. 그런데 그게 아들이었다니.
“김 비서.”
“네, 사모님.”
실신해버린 제아가 누운 이송침대가 도준이 있는 응급차에 실리는 찰나였다. 그걸 본 연희의 입술 사이로 영혼 없는 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저 여자랑 내 아들, 같은 차에 타지 못하게 해요.”
원수 못지않게 미워했던 아들이었다. 그저 도구로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피범벅이 되어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없는 아들을 보고 있으려니 쓰나미에 쓸린 듯 가슴이 씀뻑거린다.
꼴에 나도 어미라고 모정이라도 느낀 걸까.
하지만 이내 연희는 자조적인 웃음을 속으로 흘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강력하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패가 사라져버릴 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리라. 한 회장은 여자인 그녀에게 절대 후계자 자리를 넘겨줄 리가 없으니.
결국 도준이 없어지면 후계자 자리는 태영이나 강훈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서였다. 도준이 없어지면 아주 머리 아픈 상황이 올 테니.
“김 비서, 도준이가 어느 병원으로 실려 가는 거지?”
“응급요원 말이 도련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대성 병원은 거리감이 좀 있어서 우선 한길 병원으로 모신다고 했습니다.”
“대성 병원 박호성 원장 호출해서 한길로 오라고 해. 그리고 한길 병원 원장과도 통화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이유를 정당화 시켰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불쾌한 이 감정들.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분노로 한데 뒤엉켰다. 그리고 그 화살은 오롯이 제아에게 향했다.
‘저 계집애 때문이야. 제 어미도 모자라, 그 딸년까지 내 앞길을 망치려는 거야.’
사회의 악과 같은 존재. 연희는 독하게 다짐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저 불운 덩어리를 아들에게서 떼어놓고 말리라. 아들이 아닌 나를 위해서.
***
제아가 정신을 차린 곳은 응급실이었다. 찌르듯이 파고드는 새하얀 불빛에 눈이 아팠다. 그럼에도 발작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제아에게 간호사가 다가왔다.
“일어나셨어요? 아직 안정을. 어머, 환자분!”
“오토바이 사고 당한 남자, 아니 한도준 씨 어디 있어요?”
“아, 같이 실려 오신 남자분이요? 그분 수술실로 옮기기는 했는데.”
갑자기 간호사는 말끝을 묘하게 흐렸다.
어느새 눈물이 차오른 제아의 눈빛이 애절하게 간호사의 입술에 머물렀다.
‘제발, 아무 일 없다고 해줘요.’
머뭇거리던 간호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살짝 몸을 숙여 속삭였다.
“5층 수술실로 가보세요.”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찾아 5층까지 올라왔는지조차 몰랐다. 휘청거리는 걸음을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정장을 입은 남자들에 의해 길이 가로막혀 자비 없이 복도 끝으로 내몰렸다.
남자들의 뒤로 서 있는 연희가 보였다. 그녀답지 않게 흠뻑 젖은 모습으로 의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보호자분, 고집 부릴수록 환자분이 위험해져요. 수술 동의서 사인해주셔야 합니다.”
“몇 번을 말하죠? 여기서 수술 못 시켜요. 내 아들, 지금 당장 대성 병원으로 옮겨야겠어요.”
당황한 건 의사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보호자분, 지금 환자분은 복강내 과다출혈로 위험한 상황입니다. 대성 병원으로 옮길 시간적 여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지금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때 연희가 고개를 틀어 제아와 눈을 마주쳤다. 섬뜩하리만치 무심한 눈빛 그리고 표정. 하지만 제아는 그녀가 보내는 잔인한 메시지를 알아들었다.
‘내가 지금 당장 사인하길 원한다면, 내 아들이랑 헤어져,’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제아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시 걸음을 내딛는 제아를 남자들이 막아섰지만 연희가 손을 들어올렸다. 막지 말라는 신호였다.
두 여자가 마주 섰다. 서로를 주시하는 눈빛은 누구 하나 밀리지 않고 고집스러웠다.
“의사 선생님, 환자의 목숨이 위험한 긴급 상황에선 동의서 없이 수술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어떻게든 버티려는 제아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러기야 하지만, 보호자분이 있는 경우는 상황이 좀…….”
의사도 상당히 곤란한 말투였다.
“사모님, 사람 목숨 가지고 흥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하나뿐인, 아들 목숨이잖아요.”
그래도 마지막 모정만은 보여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우리 오빠, 너무 불쌍하잖아요. 하지만 연희는 간절한 제아의 바람을 너무도 쉽게 무시해버렸다.
“제아 양, 기분이 꽤 나쁘군요. 나는 단지 이 병원 말고 좀 더 훌륭한 의료진을 갖추고 있는 전담 병원으로 옮기려는 것뿐인데.”
형식적인 말 속에 숨겨진 진짜 속내가 제아에게 잔인하게 전달되었다.
‘어차피 버릴 아들. 그리고 누가 주어갈 아들, 내가 왜 서둘러야 하지?’
지독히도 모진 어미의 태도에 제아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발겨졌다. 미치도록 화가 나고 치가 떨림에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보호자 같지도 않은 보호자의 사인이 뭐가 중요하다고.
꽉 다물린 잇새 사이로 제아가 말을 흘렸다.
“……저에게 2시간만 주세요.”
결국…… 이길 수 없는 싸움.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사모님 말이 사실이라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사인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그 여자 딸의 입에서 듣고야 만 연희였다.
대성 병원 박호성 원장의 집도하에 수술실에서 수술은 이미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연출한 상황에 제아는 감쪽같이 넘어간 것이다.
“위급 상황이라니, 나도 어쩔 수 없군요.”
연희는 제아에게 보란 듯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사인이 휘갈겨지는 순간 수술실에 불이 들어오고 제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
연락도 되지 않고 늦은 시간까지 들어오지도 않는 딸 때문에 잔뜩 화가 난 윤영이었다.
몇 시간 동안 거실을 왔다갔다 거렸을까. 마침내 제아가 들어왔다. 그런데 쓰러지듯 주저앉는 딸의 모습에 다그치려던 마음은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윤영이 깜짝 놀라 무릎을 꿇고 앞에 앉자마자 제아가 느닷없이 물었다.
“문윤식, 내 진짜 아빠 맞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 윤영이었다.
“너, 갑자기…… 무슨 소리야?”
“김재경이라는 남자, 나랑 상관없는 거지?”
“……!”
“엄마가 오빠 아빠 빼앗았어? 그래서 낳은 게 나야? 오빠랑 나, 진짜 이복남매냐구.”
윤영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런 말을 제아에게 할 사람은 연희밖에 없었다. 전화해서 했던 마지막 경고를 무시한 것에 대한 응징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왜 대답 못 해? ……응? 엄마, 나한테 아니라고 대답해줘. 그래야만 해.”
차마 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어 윤영은 눈을 피해버렸다.
연희가 알고 있는 건 진실이 아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때만 지나가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연희가 그걸 가슴에 품고 있을 줄 몰랐다.
윤영은 재경의 의지와 자신의 질투심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을 세차게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톱니바퀴가 다시 굴러와 그녀의 심장을 무차별적으로 긁어대고 있었다.
윤영은 진실을 왜곡하는 게 죄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독하게 다잡았다. 끝까지 나쁜 년이 되면, 딸의 미래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제아가 버림받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윤식이 집을 비운 건 천만다행이었다.
“과거가 뭐가 중요하니. 넌 지금 문제아야.”
모든 걸 정리하는 윤영의 한마디에 제아의 젖은 동공이 넋을 놔버렸다.
“그럼 과거엔…… 김제아였고?”
제 입에서 나온 소리가 혼탁하게 흐려지는 것도 모른 채, 그런 제아의 손을 윤영이 덥석 잡았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엄만 내 딸이 나쁜 짓은 안 했을 거라 믿어. 그렇지?”
‘나쁜 짓, 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뱃속 아기는 어떻게 하라구.’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제아의 입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준이랑 헤어져. 남인 듯 모른 척 살면 돼. 지금이야 너 좋다고 해도 결국 남자는 돈이야. 이준이 하고 다니는 거 안 봤니? 이미 돈 맛, 권력 맛 다 알아버린 재벌가 자제야. 우리랑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이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은 건데. 제아는 윤영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진 후에야 터져 나온 진실은 온몸을 잔인하게 비틀어 고통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답기만 했던 사랑이, 추악한 불륜이 되어버렸다. 쏟아져버린 물처럼, 조금도 주워 닮을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렸다.
“돈맛 알아버린 남자는 절대 못 잊어. 그 여잔 이준이가 널 선택하면 과감히 제 아들을 버리겠지. 그럼 이준인 어떨 것 같니? 지금이야 너지만 결국 널 버리고 다시 돌아갈 거다. 그게 바로 돈의 절대 권력이란 거야, 알겠니?”
윤영도 반쯤 이성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녀가 아닌 재벌가의 딸을 선택했던 남자. 결국 재경도 10억을 받기 위해 연희와 헤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발견된 병은 말기였고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한 채.
어찌 되었든 윤영 자신이 버림받은 것도, 연희가 버림받은 것도, 결국 재경의 최종 선택도 돈이었다. 그 10억이 어디로 갔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윤영의 뇌리에 박힌 건 하나 뿐이었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
자정이 넘어서 안방의 불이 꺼진 걸 확인한 후에야 제아는 집을 나섰다. 뒤늦게 들어온 윤식은 모녀가 또 한바탕했다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보며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결국은 연희가 옳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제아가 골목길을 벗어나는 순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차 한 대와 기사가 보였다.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제아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연희의 운전기사와 말씨름할 기력조차 없었다.
제아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연희는 젖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VIP 병실의 라운지 휴게실에서 두 여자가 마주 앉았다.
“도준 오빠랑 헤어지겠습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제아 양이 내게 조건을 내걸 만한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요?”
“……깨끗하게 사라져드릴게요. 문제아란 이름이 오빠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 엄마의 죄까지 제가 다 받고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그제야 연희가 싸늘하게 웃었다.
“우선 들어나 보죠.”
“오빠한테는 알리지 말아주세요.”
“제아 양이 그렇게 사라지면 도준이가 더 포기 못 할 거예요. 그럼 난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사모님 아들이잖아요. 아들에 대한 애정이 1%라도 있으시다면 말하지 말아주세요. 저 혼자 책임지고 싶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연희의 말에 제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천하의 나쁜 년이 되더라도, 그 상처 나만 받을 수 있다면…….
젖어버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제아는 연희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오빠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
깜깜했던 의식에 불이 들어오자 도준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려 해보지만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은 포박이라도 당한 듯 꿈쩍도 않는다.
살갗에 불이라도 붙인 듯 온몸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특히나 하복부 쪽의 통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통증이 뚜렷해질수록 먹먹해진 귓가에 맴도는 가녀린 음성.
―오빨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독하게 살아남아. 그래서 꼭 날 찾아.
꿈이라도 꾼 걸까. 아련한 그 음성이 반복될수록 심장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지독한 통증보다 더한 불안함이 도준을 서서히 잠식시켰다.
말을 하고 싶어도 잔뜩 부어오른 목과 메마른 입안을 무언가가 틀어막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여 그 이름을 불렀다.
“에아…… 에아야(제아, 제아야).”
“한 사장! 정신이 좀 들어? 응!”
울먹거리는 인호의 음성을 들으며 도준은 이번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부르르 떨리던 눈꺼풀 한쪽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희뿌연 시야 속 새하얀 빛이 찌르듯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산소 호흡기를 빼버렸다.
“한 사장! 그걸 빼면!”
그만하라는 듯 미약하게 손을 들어 보인 도준은 고르지 못한 호흡을 몇 번 내쉬었다. 제대로 된 호흡을 쉬고 나니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너 의식 불명으로 꼬박 5일 누워 있었어.”
5일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옆에 있어야 할 제아가 없다?
아픈 내 옆에 네가 없을 리가 없는데. 불안감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발작하듯이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는 도준을 인호가 말렸다.
“야, 인마! 아직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인호의 만류에도 도준은 고집스럽게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제아, 어디 있어.”
“어, 어디 있긴, 집에 있겠지! 뭘 새삼스레 묻고 그러냐. 그러니까 다시 누워서 좀 쉬어. 응?”
도준의 눈이 벽시계에 꽂혔다.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에 집에 있다……라. 갑작스럽게 정신을 차린 도준 덕분에 명석한 인호가 말도 안 되는 말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유인호.”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이건만, 그럼에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는 여전했기에 인호는 움찔했다.
“내가 좀 다쳤다고 병신 취급하지 마.”
이를 어쩌나, 극심한 고민에 휩싸였던 인호는 결국 모든 걸 실토하기로 했다.
“너 사고 난 후, 여사님이 문 팀장하고 개별적으로 만났다고 들었어.”
깨질 것 같은 두통 속 기억이 떠올랐다. 사고가 나기 전, 제아를 보았던 마지막 기억. 뇌리에 박힌 제아는 연희의 차에 타고 있었다.
“여사님도 거짓말하시는 성격이 아니라서 나한테 그대로 말씀해주셨다. 너 사고 난 거, 문 팀장에게 다 책임 전가하셨더라.”
사고는 제아의 탓이 아니다. 철저하게 그의 실수였다. 전혀 그답지 않은. 일주일간의 단식 탓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비는 내렸고 이성이 꽤 흐린 상태였다.
결정적인 이유는 처음 타본 저가의 오토바이를 성능 좋은 제 오토바이와 착각하고 몰았다는 것이다.
그날 얼마나 긁히고 할퀴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혼자 아파하고 상처받고 감당할 제아가 떠올라서.
“여사님이 문 팀장에게 제일가에서 널 버릴 거고, 문 팀장 가족부터 친구들까지 죄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대.”
“그 협박이 제아에게 먹혔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제아는 그 정도로 나약한 여자가 아니다. 그런 것까지 모두 감당하면서 그를 선택한 여자니까.
“한 사장.”
“…….”
“너 수술 결과 별로 좋지 않아. 오죽하면 내가 너의 공백에도 일을 제쳐두고 네 옆을 지키고 있었겠냐.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하고 깨어나도 하반신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
하지만 깨어났고, 통증이 있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제아씨 입장에서 그런 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이 밥 먹여주는 거 아니다. 그 많은 네 재산도 직계 가족이 1순위라는 거 알지?”
빌어먹을. 혼인 신고라서 먼저 해야 할 걸 그랬나.
“그 대신 너랑 헤어지면 제일가에서 최선을 다해 널 살릴 거라고 하는데, 제아 씨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냐. 그리고 이거 한번 봐라.”
인호가 핸드폰 조심히 내밀었다. 떠지지 않는 시야로 겨우 핸드폰 액정을 응시하자 재생되는 영상 속, 제아와 연희가 보였다.
커피숍의 CCTV 자료를 다운받은 것이었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연희가 내미는 돈 가방을 제아가 받는 것만은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정확히 이 돈 받고 5일 만에 문 팀장이 사라졌다. 그것도 가족들이랑 함께 감쪽같이. 퇴직금까지 모두 정산해서.”
“……제아 찾아내.”
화조차 내지 않은 채 덤덤하게, 도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에 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인마! 너 제아 씨한테 버림받았다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다시 말해줘? 여자 다 똑같다고!”
도준보다 더 화가 난 듯 인호가 어떤 말들을 우르르 쏟아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이명감이 느껴지며 호흡이 흐트러졌다.
다급하게 너스콜을 누르려는 인호의 손을 도준이 움켜잡았다. 엄청난 통증을 이겨낸 싸늘한 분노가 도준을 버티게 해주었다.
“들어도 내가 직접 들어.”
제아 넌 절대 내게 이별을 고하지 못해.
“그러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찾아내.”
문제아,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찾아줄 테니까.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