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93화 (93/104)

93. 눈이 아닌 심장이, 이성이 아닌 본능이.

2017.07.24.

―도련님, 행운을 빌겠습니다.

오랜 세월 한 회장의 곁을 지킨 만큼 머리도 좋고 계산도 빠른 고 집사는 결국 미래를 선택했다.

평소보다 샤워를 일찍 마친 도준은 창문 문턱에 걸터앉아 다시 한 번 높이를 가늠했다.

중심만 잘 잡고 떨어지면 소리 없이 다치지 않고 착지할 수 있는 높이.

25분이 되자 경호원들이 모두 일제히 입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일주일 동안 말썽 한 번 피우지 않은 도준 덕분에 경비는 꽤 소홀해져 있었다.

이 시간에 욕실에 있어야 할 그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음에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저렇게 여유롭게 모이는 걸 보면 보안실도 비어 있다는 뜻이었다.

‘5, 4, 3, 2, 1.’

푹신한 잔디 위로 착지하자 도베르만 한 마리가 힐긋, 도준에게 시선을 주지만 그마저도 귀찮은지 눈을 감아버린다.

도준이 담 벽까지 소리 없이 걸어가는 동안 경호원들은 입구 쪽에 모여 잡담 겸 보고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분침이 29분에 도달하는 순간, 도준은 가뿐하게 담 벽을 뛰어넘었다.

그와 동시에 뻥 뚫린 길 사이로 아른거리던 스포츠카 한 대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30초 만에 별장 입구 앞에 딱, 멈추어 섰다. 낯선 차를 경계하며 별장에서 나오는 경호원보다 도준이 더 빨랐다.

운전석의 문을 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호는 조수석으로 옮겨 앉아 있었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맨 후 위에 있는 손잡이까지 단단히 움켜잡은 채.

“도련님이 탈출했다!”

“차 준비해!”

탈출도 생각하지 못했고 갑자기 나타난 차는 더욱더 당황스럽다. 경호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도준은 액셀러레이터를 거칠게 밟으며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내달렸다. 인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허우적거린 후에야 도준은 속도감을 좀 줄였다.

“제아는…….”

연락을 못 한 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지 일주일째였다. 물론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릴 여자는 아니다. 그런 면에선 지독할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고 배려심 많은 제아이니.

“연락 없었다. 연락도 없고 핸드폰까지 꺼져 있으니 나한테라도 전화해서 물어볼 법한데. 정상적인 여자들은 하루만 연락 없어도 난리잖아. 특이한 건지, 널 사랑하지 않는 건지.”

도준이 찌릿, 노려보자 인호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다시 운전을 집중하는 도준의 머릿속엔 온통 제아라는 여자로 가득 차올랐다.

식사는 잘하고 있을까. 무리하게 일하고 있진 않을까. 어떤 놈이 또 접근하진 않았을까. 다른 놈에게 예쁘게 웃어주진 않았을까. 오늘은 얼마나 더 예뻐졌을까.

제아에 대한 그의 병적인 집착은 지극히 사소한 것부터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멈출 수도 없는, 멈추어지지도 않는 집착적인 사랑.

결국 이런 상황에도 애가 타는 건 제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내가 차질 없이 다 처리해서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

“프러포즈 못 해서 어쩌냐, 한 사장.”

인호가 알아서 처리를 했을 거라 믿는다. 오지 못하는 그를 제아가 기다릴 일도 없을 테고. 그런데도 막상 프러포즈를 못 한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삼켜졌다.

도준은 우선 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고 또 들려주고 싶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배터리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몇 분 간격으로 전화를 해보지만 똑같았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차 내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애꿎은 인호마저도 괜히 긴장이 되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핸들을 잡고 있던 도준의 긴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흙빛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지금 당장 회사 전화해서 확인해.”

주어가 생략되었는데도 눈치 빠른 인호는 잽싸게 알아듣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다.

“한 사장, 문 팀장 퇴근하고 없단다.”

야근을 하지 않고 정시 퇴근한 거라니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다. 그런데 인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로 군이 데려다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보디가드 한지로와 떨어졌다?

“연신 재채기를 하면서도 활짝 웃는 얼굴로, 꽃바구니를 손수 들고 나갔다고.”

꽃바구니라니. 도준의 매서운 눈빛이 인호에게 쏠리자, 그가 찔끔한다.

“그런 눈으로 나 보지 마라? 난 분명히 배달하지 말라고 꽃집에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 꽃은 누가 보낸 거지?”

“그게 말이야…… 직원이랑 무슨 착오가 있었다고.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는지 그게 배달이 되어버렸다고 환불해주겠단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그가 손수 작성한 카드가 꽂혀 있는 그 꽃바구니가 배달된 거라면…….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호가 더욱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크루즈는 내가 취소하자마자 다른 고객이 예약을 했다고 하네. 젊은 여자 한 명 오면 좀 알려주라는데도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당했어.”

엄습해오는 불안감 속, 도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머피의 법칙.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

연희는 짙은 밤을 머금은 한강 위 크루즈 레스토랑 2층 상석에 앉아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후 5시 30분, 도련님이 경호원이 교대하는 시간대를 노려 탈출하셨습니다. 별장 들어오실 때 그림자 같은 유 실장을 대동 안 한 게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미 예상하고 계획하신 것 같습니다. 개들도 점심 때 사료 대신 준 고기가 좀 상했는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짖지 않은 것 같구요.]

탈출이 불가능할 거라 판단하고 고집 부리며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더니, 차분하게 지켜보며 상황 파악을 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넌 그래도 나한테 안 돼.”

싸늘한 비소가 연희의 입가에 어렸다. 도준이 아닌 인호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녀에게 보고되었다. 잠잠히 지켜보았지만 꽤 솔깃한 보고가 올라왔다.

꽃바구니, 고가 브랜드의 한정판 다이아 반지. 크루즈 대여에 분수 쇼 등등.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건 바로, 프러포즈.

연희는 인호가 취소했던 걸 고스란히 되살렸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아들 대신 그 여자의 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더러운 사실을 입에 담기 싫어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그 경고를 깨끗이 무시했으니 내 입으로 직접 들려주는 수밖에.

“사모님, 문제아 양 도착했습니다.”

연희의 싸늘한 시선이 1층 입구 쪽으로 향했다. 도준이 탈출했다고 해도 이 시간에 오지는 못할 것이다.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천만다행으로 핸드폰까지 꺼져 있다고 하니, 그 여자의 딸은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다. 행복에 젖은 얼굴로 기대감에 가득 차올라서 말이다.

***

“문제아라고 하는데요.”

그 한마디를 하자마자 웨이터가 제아를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창 너머로 둥둥 떠 있는 귀여운 오리 배들이 보였다.

‘저 오리 배 중 하나를 오빠랑 타는 거겠지?’

짙은 강을 눈으로 더듬는 순간 이승기의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랑 결혼해줄래.

나랑 평생을 함께 살래.

우리 둘이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

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

노래의 가사가 도준의 음성이 되어 프러포즈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행복한 착각 속 행복한 고민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새 생명의 존재를 어떻게 알려야 도준이 가장 기뻐할까.

그때 오색을 머금은 물기둥이 어둠 속에서 치솟았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물줄기가 오색 빛에 몸을 묻고 흩날렸다.

어둠 속 펼쳐지는 분수 쇼는 환상 그 자체였다.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매혹적으로 흔들리는 물줄기를 보는 제아의 눈이 황홀경으로 젖어들었다.

“……예쁘다.”

지로에게 흘렸던 바람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된 프러포즈 이벤트. 차오르는 기대감에 바보같이 설레고 떨렸다.

‘아빠가 이렇게 멋진 프러포즈를 해주고 있어. 너희들도 엄마처럼 행복하지?’

조심스럽게 배를 감싼 양팔에 살포시 힘이 들었다. 화려한 분수 쇼도, 달콤한 노래도 피날레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가 더 사랑할게.

내가 더 아껴줄게.

눈물이 나고 힘이 들 때면 아플 때면

함께 아파할게.

평생을 사랑할게.

평생을 지켜줄게.

분수쇼와 노래가 끝이 나자 제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막을 울리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후각과 청각을 곤두세웠다.

일주일 동안 보지 못했던 도준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

하지만 예민하게 곤두선 청각에 파동을 일으킨 건 하이 톤의 여자 음성이었다.

“문제아 양.”

눈을 뜨자 도준과 닮은 눈을 하고 있는 연희가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손등으로 눈을 비벼보아도 눈앞의 실루엣은 사라지지 않았다.

앉아도 되냐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연희가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난 제아 양 때문에 안녕하지 못해요. 왜 연락 안 했죠? 그날, 궁금했을 법한데.”

잔뜩 실망했다는 뉘앙스. 하지만 제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건 어디까지나 저와 부모님 사이 일입니다. 묻고 들어야 할 대상도 사모님이 아닌 저와 제 부모님이구요.”

“그래서 제대로 들었나요?”

“…….”

“그 엄마에 그 딸이네.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둘 다 모른 척하니.”

나직한 중얼거림에서 묻어나는 격렬한 비난. 당혹스러움에 온몸이 잘게 경련을 일으키는데도 제아는 차분하게 대꾸를 했다.

“죄송하지만 오늘도 사모님과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 여기서 다른 사람을……?”

“내가 예약하고 지시했어요.”

비웃는 듯이 긁어내리는 예리한 눈빛이 찌르듯이 제아의 얼굴에 직선으로 와 닿았다.

“프러포즈는 취소되었어요. 취소된 걸 내가 다시 예약해서 재현했을 뿐이고. 어차피 안 될 거, 마지막으로 착각이라도 해보고 행복감 느껴보라구요.”

“……?”

“말귀를 못 알아먹나 보네. 도준이는 못 온다는 뜻이에요.”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온다. 순간 제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쩍했다. 일주일 동안 설마 연락이 없었던 게?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짧게라도 연락을 하던 도준이 왜 일주일이나 연락을 못 했는지.

“쓸모없는 아들도 아들이라고 내가 이렇게 나서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다니.”

“우리 오빠, 어디 있어요?”

차분하게 뱉어내는 제아의 음성에 내포된 건 분노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연희는 절제된 분노를 감지해내지 못한 채 말을 했다.

“잘 들어요. 이런 말 하는 것도 마지막이니까. 둘이 끝까지 헤어지지 못하겠다면 난 도준일 버릴 수밖에?”

“그럼 버리세요.”

“지금 뭐라고.”

“쓸모없는 그 아들 제발 버리시라구요. 사모님 버리는 거, 굉장히 잘하시잖아요.”

독기 어린 당당한 눈동자가 연희를 역으로 공격해왔다. 귓가가 울린다.

―버리는 거, 굉장히 잘하시잖아요.

아주 오래 전 일을 탁 꼬집어서 비꼬는 것이다. 연희의 눈 꼬리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네 까짓 게 감히.

하지만 제아는 차분하게 눈을 깜빡이며 독한 악녀로 변신 중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버리신 아들 제가 잘 주워가겠습니다. 사모님께는 쓸모없는 그 아들이 저한테는 너무 소중하거든요. 제가 잘 보살피고 사랑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

한 회장에 이어 연희와의 2차전. 이제 제아는 지칠 대로 지쳤고 궁지에 몰릴 만큼 몰렸다.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된다면 역으로 나갈 수밖에.

“잠시라도 행복감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독을 품은 혀를 갈무리하고 일어나는 제아의 뒤통수를 연희의 매서운 한마디가 사정없이 때려 갈겼다.

“문윤식, 그 사람이 진짜 제아 양의 친부라고 생각하나요?”

온몸에 굵은 쇠사슬이 칭칭 묶여 끌리듯이 돌아섰다. 불가항력의 힘이었다.

“제아 양 어머니와 내가 각별한 사이라는 거 아나 모르겠네.”

각별한…… 사이? 원수 보듯 하는 사이가 아니고? 혼란스러움도 잠시, 연희가 차가운 입술을 움직였다.

“그 남자가 내게 소개한 여자 이름이 최윤영이었지, 아마. 친동생인지 이복인지 남인지는 아직까지도 몰라요. 관심도 없고. 다만, 가장 소중한 여동생이라고 소개를 받았고. 어린 나이에 난 바보같이 순수하게 믿었죠.”

냉기 어린 눈빛이 제아의 얼굴에 차갑게 와 닿았다.

“그 여동생한테 내 남자를 빼앗길 줄 알았더라면, 경계라도 했을 텐데. 덕분에 아주 비참하게 버림받았어요. 나와 내 아들이.”

제아는 온몸이 서서히 얼어붙어갔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방금 전까지 독을 품고 휘두르던 혀까지도.

“그와 내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데도,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아이까지 낳았어요. 제 오빠라는 남자의 아이까지 낳았지. 아주 예쁜…… 여자 아이를.”

비난 어린 연희의 눈빛이 제아에게 속삭인다. 그 여자 아이가 바로 너라고.

“유전인가? 그 딸아이도 제 엄마를 똑 닮아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희는 차갑게 미소 지었고 제아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최고치로 올라왔던 행복함이 한강 밑으로 처박혀버린 순간이었다. 짓궂은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

서울에 도착하는 내내 몇 번이나 전화를 시도했지만 제아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제아가 홀로 그곳에서,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활짝 웃는 얼굴에 실망감이 잔뜩 어린 채.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웃어주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저희 가게에서 가장 성능 좋은 오토바이입니다.”

도준은 렌트 숍 직원이 자랑스럽게 끌고 나온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먼저 가볼 생각이었다. 그가 아는 제아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토바이에 가속이 붙자 도준은 더욱더 바짝 몸을 숙였다. 그래도 제아가 그곳에 있다면 프러포즈하리라.

준비했던 이벤트 중 어느 것도 해주지 못하지만, 거창하게 있는 척은 다 해놓고 기껏 하는 건 초라한 프러포즈겠지만, 그럼에도 제아는 그를 향해 웃어주며 프러포즈를 받아줄 것이다.

네가 날 믿는 것처럼, 나도 널 믿으니까.

“빌어먹을.”

도준의 입술 사이로 욕지거리가 비릿하게 새어 나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지독한, 머피의 법칙.

그런데도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혼자 기다릴 제아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서.

한강에 거의 다다랐을 때 인적 드문 맞은편 도로에서 고급 세단 한 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기분 나쁠 정도로 싸하게 곤두서는 본능.

찰나의 기억을 되감아 더듬자,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드러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하얀 얼굴, 내리깐 긴 속눈썹, 전체적인 얼굴 윤곽과 음영까지.

제아, 나의 제아다.

***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직접 확인해요.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죠.

제아가 연희의 차에 올라탄 건 스스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부모님을 향한 마지막 믿음이었다. 무릎 위에 핸드백을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기야, 엄마 어떻게 해야 하니?’

애처롭게 떨리는 눈빛이 어둑한 창밖을 정처 없이 더듬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한 그라면, 이 상황에도 명쾌한 해답을 찾아냈을까.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흩날리는 소나기가 세차게 스며들었다. 빗물에 얼굴이 젖어드는 와중에도 윤영에 대한 믿음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랬다면 진즉 털어놓았을 테고 상황이 이렇게까지는 오지 않았을 테니까.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간절하게.

그때 반대쪽에서 나타난 오토바이 한 대가 어둠 속에서 빛처럼 나타나 스쳐 지나가며 넋을 잃은 동공을 자극했다. 그 자극에 제아의 본능이 동물적으로 반응을 했다.

‘도준 오빠?’

활짝 열린 창문 틈으로 비바람이 옆 좌석까지 넘어갔다.

“몰상식하게 뭐 하는 짓인지, 창문 닫아요.”

연희의 날카로운 음성에도 제아는 기어코 창문을 내렸다. 확인해야만 했으니까. 스쳐 지나간 게 환영인지, 현실인지.

비에 젖은 속눈썹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알아보았다. 눈이 아닌 심장이, 이성이 아닌 본능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다시 역주행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그때 강제적으로 뒷좌석의 창문이 올려졌다.

“사모님, 오토바이가 한 대가 쫓아오는 것 같습니다.”

짧은 침묵이 잠시 흐른 후…….

“신경 쓸 것 없어.”

분명 오빤데. 오빠 맞는데. 차마 말을 하지는 못하고 제아는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등장에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왕복 이차선 밖에 되지 않는 도로는 어두웠고 세찬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자칫하면 미끄러질 수 있다.

제발 속도 좀 줄였으면 하는데. 그걸 지켜보는 제아의 심장은 쪼그라들 때로 쪼그라들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놓고 몸을 틀어 뒤를 바라보았다. 삼거리가 가까워지자 연희의 차가 드디어 속도를 조금씩 줄였다.

이때다 싶었는지 오토바이가 중앙선을 넘어와 차 앞으로 치고 나오려는 시도를 했다. 위험한 짓이었다.

그때였다. 비보호 좌회전을 시도한 차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끼이이이이익! 쾅!

차와 오토바이가 충돌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오토바이가 빗길에 사정없이 미끄러지고 헬멧을 쓴 남자가 튕기듯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본 순간 제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냈다.

“차와 오토바이의 충돌 사고입니다. 인적이 드무니 신고는 우선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지나 가. 누군가 신고하……?”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아가 갑자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발로 차문을 걷어차고 주먹으로 창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차 문, 당장 열어줘요! 얼른요!”

“이봐요, 제아 양! 대체 뭐 하는……?”

“저 오토바이!”

눈물로 흠뻑 젖은 애처로운 눈동자가 뿜어내는 처연함에 연희는 당혹스러워 눈살을 찌푸렸다.

“……도준 오빠일지도 모른다구요.”

달달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한마디가 연희를 멍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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