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92화 (92/104)

92. 난 그저, 그가 보고 싶을 뿐이야.

2017.07.20.

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백 안에 테스트기를 넣고 들고 다닌 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테스트기에 뜬 두 줄을 본 순간부터 자잘하게 박동수를 올리기 시작한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불안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니 일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진짜 임신을 하면 심장도 이렇게 더 뛰는 걸까? 궁금하지만 잡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테스트기가 거의 정확하다고는 하지만 100%는 아니란 걸 안다. 호르몬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테스트기가 불량일 수도 있다.

아침에 해야 제일 정확하다고 했는데 점심시간에 테스트기를 해보았다. 임신이 맞을 수도, 또는 아닐 수도.

결론은 산부인과를 가서 검사를 해야 하지만 부러 미루고 있는 제아였다.

1차 확인은 혼자 했지만 2차 확인은 도준과 함께 하고 싶었다.

임신이라고 확정 받는 순간, 기뻐하는 도준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미국 출장만 끝나면 그래도 좀 한가해질 거야. 입점 계약만 따내면 이제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할 일들이 확 줄어들 테니 조금만 참아줘.

도준을 보지 못한 게 벌써 4일째였다.

그 말을 하던 도준의 흰자위는 실핏줄이 터져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뜻이겠지.

제일 어패럴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해외 진출 사업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계획의 반이 성공하는 거라고 했다.

도준은 항상 제아와 모든 걸 공유했다. 사적인 것부터 공적인 것까지 모두. 의견을 묻고 대답을 들어준다. 귀 기울여주고 세심하게 체크를 하고 수용까지 한다.

단순한 여자 친구를 넘어서 사업 파트너로 인정받는 그 느낌이 제아는 싫지 않았다.

‘그래, 급하게 확인한다고 뭐 있겠어?’

며칠 후에 도준은 미국 출장을 떠난다. 이번에도 분명 원하는 걸 쟁취해서 돌아올 도준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도준에게 그녀 또한 기쁜 소식을 전해줄 것이다. 테스트기를 보여주고 그의 손을 꼭 잡고 산부인과에 같이 가야지.

하지만 제아 혼자 젖어 있던 그 꿈은 얼마 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다다랐을 즈음, 느닷없이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야! 너 아기 가졌다면서?]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깜짝 놀란 제아는 부러 큰기침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안한 눈빛이 주위를 훑었지만 다행히도 팀원들은 못 들은 눈치였다.

‘저게 진짜! 입 가벼운 누구랑은 틀리다고 하더니!’

그제야 제아의 뿔난 눈빛이 열심히 퇴근을 서두르는 지로에게 꽂혔다.

“저기 지연아, 아직 정확한 게.”

잔뜩 흥분한 지연은 제아의 말을 제대로 들을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완전 섭섭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지 어떻게 지로한테 먼저 말할 수가 있어? 그나저나 오빠는 알고?]

지로한테 먼저 말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인데. 아후, 그걸 말할 수도 없고.

제아는 눈치를 보며 살그머니 로비 복도로 빠져나왔다.

“아직 몰라. 정확한 건 병원을 가봐야…….”

[나 지금 거의 회사 도착했거든? 얼른 나와, 병원 같이 가줄 테니까. 원래 아가씨들은 심장 떨려서 산부인과 혼자 잘 못 가거든. 이 언니가 기꺼이 같이 가줄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진짜 이럴 때보면 지연과 지로는 친구가 아니라 남매 같았다.

10여 분 후, 제아는 지연과 함께 지로의 차에 올라탔다. 유리창 밖의 풍경은 서울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슬로우 모션으로 여유롭게 스쳐 지나갔다.

그만큼 지로가 차를 굉장히 조심히 몰고 있다는 뜻이었다. 뒷좌석에 제아와 같이 앉아 있던 지연이 답답함에 버럭 성질을 냈다.

“한지로! 차가 무슨 지렁이야? 이렇게 뚫린 도로에서 그렇게 서행할 거면 차는 왜 몰고 가는 거냐고!”

쫙 찢어진 지로의 눈이 룸미러를 통해 살벌하게 지연을 노려보았다. 심장 후들거리는 당사자는 얌전한데, 둘이서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초기에 조심해야 한다잖아! 뭘 알지도 못하면서 잔소리냐? 엄마도 안 되어본 게!”

“이게. 이씨! 그럼 넌 아빠라도 되어 봤어? 알면 여자인 내가 더 잘 알지 네가 더 잘 알아? 이 정도도 위험하면 걸어 다니는 것도 위험하거든요?”

“여튼 위험해! 얻어 탄 주제에 주둥이 닫아라. 고성도 아기한테 안 좋아.”

아예 귀를 닫아버린 지로는 그답지 않게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움켜쥐고 운전에 집중했다. 지연은 기가 막힌 눈빛으로 제아에게 물었다.

‘한지로 쟤 왜 저래? 혹시 애 아빠가 한지로야?’

그런 지로가 낯설긴 마찬가지인 제아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산부인과에 도착한 제아는 검사를 받았다. 여자 의사였지만 그래도 처음 해보는 검사는 지독히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 진짜 싫어!’

얼굴이 확 달아오른 제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여의사가 무심하게 말을 했다.

“힘 빼요. 그래야 덜 아파요.”

날카로운 무언가가 하복부를 들쑤시는 느낌은 정말 최악이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다운되었다. 이딴 검사, 다시는……?

“축하드려요. 임신 맞습니다.”

뭐? 내가 정말, 임신한 거라고?

순간 떠오르는 건 도준의 얼굴이었다.

“태아 사이즈로 보아 임신 5주가 좀 넘은 거 같네요. 우선 2주 후에 다시 와서 태아 심장 소리 확인해봅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덤덤히 흘러나온 여의사의 다음 말에 제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그리고 여기 콩알만 한 아기집 두 개 보이죠? 딱 보니 쌍둥이 같네요.”

***

속옷과 의류, 화장품, 향수, 그리고 욕실까지 모든 게 구비된 이 방에 도준이 갇힌 지 벌써 4일째였다.

방문은 하루에 단 세 번, 식사가 들어올 때만 제외하곤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식사도 거부했다. 그가 덤덤히 요구한 건…….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xx의 복숭아 사탕. 말보로 레드.”

보고를 받은 한 회장은 입술을 씰룩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자 놈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흥분할 법한데도 지독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

가장 중요한 출장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가 제시한 계약서에 바로 사인을 하고 성질내며 이곳을 탈출할 거라 예상했건만, 손자 놈은 이번에도 아주 완벽하게 그 예상을 뒤엎었다.

이 정도면 승복할 법한데 꿋꿋하다 못해 태연하고 무심하게 버틴다. 이쯤 되니 속이 타들어가는 건 한 회장이었다. 지독한 놈 같으니라고. 오냐,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해달라는 대로 해줘라!”

도준은 오늘도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에는 커피, 다른 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든 채.

제아를 떠올리며 복숭아 사탕을 먹고 버텨보지만 그도 안 될 땐 별수 없다. 담배를 피우는 수밖에.

이 방에 갇힌 그날 저녁 한 회장은 단 한 번 얼굴을 보였다.

“읽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당장 사인해라. 그럼 내보내줄 터이니.”

“경영인은 계약서에 함부로 사인하지 않습니다.”

“다 널 위한 거다, 이놈아!”

“회장님을 위한 거겠죠.”

“언제까지 그리 기고만장하게 버티나 보자꾸나!”

다시 문이 닫히고 잠겼다. 그제야 도준은 예의상이라도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에게 요구하는 건 세 가지였다.

첫째, 한태영 부회장의 비리 건은 그냥 묻어둘 것.

둘째, 민화연과 약혼할 것.

셋째, 제일가의 후계자가 되는 것.

결론은 그에게 조종당하는 영혼 없는 아바타가 되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예 작정했는지 잘 터지던 핸드폰조차 먹통이었다.

인호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하면서도 이곳에 같이 갇히지 않은 게 또 다행이었다.

예리한 도준의 눈이 다시 한 번 창밖으로 향했다. 4일 동안 지켜본 바로 정원에 있는 경호원 넷, 입구에 둘, 내부에는 몇 명이 있는지 모른다. 훈련을 제대로 받았는지 미세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도베르만도 3마리.

경비는 삼엄했고 정확히 오후 5시 30분에 교대가 한 번 이루어졌다. 한곳에 경호원들이 모여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아주 잠깐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가장 느슨해지는 때이니만큼 그 때를 노려야 한다.

그 시간에 탈출을 하면 제아에게 프러포즈를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지만 그럼에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인호가 알아서 취소했을 거고, 제아가 오지도 못할 그를 기다릴 일은 없을 테니.

도준은 우선 탈출에 모든 신경을 쏟기로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별장의 담 벽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이곳에 머무를 때마다 경호원들을 대동하니 담이 높아서 뭐 할까.

도준은 24시간 자신을 감시하는 CCTV를 향해 몸을 틀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구요, 회장님. 그리고 어머니.’

아침이 밝아왔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간편한 아침식사를 가지고 들어오는 여자는 젊었고 봐줄 만한 외모와 몸매였다. 여자는 오늘도 수줍은 듯하면서도 대담한 눈빛으로 도준을 응시했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시는 거라면 좋아하는 걸로 말씀해주세요. 한식, 양식, 일식 자격증 모두 있습니다.”

4일째 한 끼도 아니,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애가 달아야 그만큼 요구 조건도 들어줄 테니.

“고 집사에게 직접 식사를 들고 오라고 전해줘요. 그럼 먹겠다고.”

“예?”

“적어도 내가 식사하길 원한다면, 가장 높은 책임자가 얼굴을 내보이는 예의 정돈 보이라고도요.”

기분이 나빠야 할 법한데도, 그런 건 없다. 도준의 동공이 여자의 눈 속으로 나른하게 침투해 들어갔다. 내 말 좀 들어보라는 듯이.

“할 수 있죠?”

“아, 네.”

확 달아오른 얼굴로 도망치듯 여자가 방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10여 분 후, 고 집사가 나타났다.

“식사하십시오, 도련님.”

“그만. 거기서 멈춰요.”

“……예?”

“내가 식사하는 동안 그 자리에서 지켜보세요.”

무슨 벌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바짝 애가 타던 고 집사였다.

아직은 한 회장의 사람이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이유가 다 도준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는 한 회장의 뜻이란 걸 아니까.

이해를 하지 못한 고 집사를 앞에 세워놓은 채 도준은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젓가락은 손도 대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움직이는 건 숟가락뿐이었다.

도준은 찰진 밥을 뜨고 국을 떠먹었다. 음식을 취하는 그의 입술에서 흐트러짐 없는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리 보고하지 않은 건,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내가 원할 때까지 당신은 한 회장의 사람이어야 하니.”

식사를 하는 도준의 모습에선 조금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 집사는 등줄기가 서늘하게 곤두섰다.

“긴장하지 마세요. 간단한 대답은 해도 문제되지 않는 상황이니.”

지금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이쯤 되니 고 집사는 혼란이 왔다. 곤란한 상황에 몰린 건 자신이고 도준은 승기를 쥔 장군처럼 느껴졌다.

그때 도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틀어 올렸다. 서늘한 눈빛을 휘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고 집사님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 바보같이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의 선정까지 도준이 진두지휘했다는 걸.

CCTV는 천장 위에 달려 있다. 화면에서 볼 땐 도준이 말을 하는 건지 식사를 하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대화의 상대방을 보아야 알 텐데, 그 상대방인 자신은 지금 CCTV를 등지고 있다.

딱 그렇게 사각지대에 세워놓은 채, 도준은 최상위의 위치에 서서 그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CCTV가 잔잔한 호수 같은 도준의 음성까지 잡아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렇지. 고 집사가 불안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유 실장에게 연락하세요.”

부탁도 아닌 명백한 상사의 지시였다.

“정확히 오늘 오후 5시 30분, 나를 데리러 오라고 말입니다.”

뻔뻔하다 못해 오만한. 그런데도 거스를 수 없는.

“그리고 그 시간에 정원에 있는 사냥개들. 짖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세요. 그뿐입니다.”

그래, 그뿐이긴 하다. 유실장에게 메시지 한 통에 사냥개들이야 수면제를 약하게 탄 사료를 주면 되니. 그런데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라고?

내면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고 집사님이 살짝 손만 써주시면 내가 알아서 나갈 겁니다.”

한 번도 쉬지 않던 숟가락질이 드디어 멈추었다. 그런데도 음식의 양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희고 긴 손가락이 여유롭게 냅킨을 지어 입가로 가져가며 잔인한 선택을 요구했다.

“이제 내게 충성하는 걸 증명해 보일 때입니다. 선택하세요.”

***

퇴근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제아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곤 자판 옆에 놔둔 핸드폰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오늘도 연락이 없네.”

오늘밤, 도준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연락이 올 법한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인호가 메일로 비서팀에 업무 지시를 하고 확인하는 거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애꿎은 핸드폰 액정만 자꾸만 만지작거리고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도 연락은 차마 못 하고 있었다.

도준이 연락을 안 하는 건 그만큼 바쁘다는 뜻이니까. 연락 따위로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의 연락 빈도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다. 짧은 통화, 짧은 메시지. 그래도 도준이 틈틈이 연락을 하는 걸 알기에 서운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사실 그녀도 바빴다. 아침엔 회사에서 업무 전쟁을, 퇴근 후엔 과외 선생님들과 공부를, 집에선 윤영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나마 윤영에게 덜 시달림 받는 이유는.

‘오빠 미국 출장 한 달 정도 떠나서 한국 없단 말이야. 그동안 나 일도 좀 하고 생각도 좀 하게 내버려둬, 엄마. 응?’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버렸다.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숨 좀 쉬고 살아야지.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영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중이었다.

퇴근하는 순간부터 시든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직은 납작하기만 배를 조심히 손으로 쓰는 제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우리 쌍둥이 아가들도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는데.’

도준이 미국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면 부모님을 찾아 봬야지. 그래서 꼭 허락을 받아내고 말리라.

그때까지만…… 혼자 버티는 거야.

제아는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과 도준은 미움을 받더라도 아기는 미움 받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마지못해 승낙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소중한 생명을 들이미는 건 좀 아니지 싶지만 그렇게라도 꼭 허락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신 확인을 한 날부터 이상하게 도준이 연락하지 않는 게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다.

설마 나도, 쓸데없이 연락에 집착하는 그런 여자가 되어버린 걸까?

집착하는 여자는 매력 없다고 했는데.

임신하면 민감해진다고 하더니, 휴…….

복잡한 속을 달래던 제아는 스스로의 생각에 소스라치듯 흠칫 놀랐다.

“그러니까 나 지금, 오빠가 연락 안 한다고 서운한 거야?”

맙, 소, 사.

도준과 잠자리를 한 후에도 쿨함을 유지했다고 자부한다. 마음은 마음이고 몸은 몸이니.

여자가 몸을 줬다는 표현은 일방적인 고정관념일 뿐, 남자도 똑같이 몸을 주는 거니까.

그래서 도준과 잠을 잤다고 해서 도준에게 더 집착하거나 관심이나 사랑을 바란 적은 단연코 조금도 없다. 그런데 임신 앞에 그 쿨함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급격히 기분이 다운되었다. 이유 없이 발을 동동 구르던 제아는 책상에 바짝 몸을 엎드렸다.

바보같이, 그리고 나약하게 연락에 집착하는 게 아니야.

난 그저, 난 그냥. 오빠가 보고 싶을 뿐이야.

한도준이 보고 싶다…….

한도준, 듣고 있어? 어디서 뭐 하는데? 얼마나 바쁜데? 나랑 쌍둥이가 오빨 보고 싶어 한다구!

갑자기 벌떡 일어난 제아는 핸드폰을 찾았다.

보고 싶으면 연락해보면 되는 거야. 연락하는 게 뭐 어때서? 어쩌면 오빤, 내 연락을 먼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일에 찌들어서 말이야.

먼저 연락하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핸드폰을 응시하는 그때,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

“전략팀 문제아 팀장님 자리가 어디죠? 꽃 배달 왔습니다.”

……꽃이라니? 드라이플라워가 아닌 진짜 생화였다. 그것도 엄청 화려한 색을 뿜어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색의 튤립들.

그런데 배달원이 꽃을 가져다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꽃바구니를 올려놓더니 카드만 건넨다.

“받으시는 여자분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으니 눈으로만 구경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살그머니 카드를 열자 조금은 악필이라고 할 수 있는 손 글씨가 보인다.

―오늘 밤 7시, 크루즈 레스토랑에서 봐. 오리 배 타자.

오리 배라면. 지로에게 프러포즈에 대해 귀띔했던 것 중에 오리배가 있었다. 머릿속에서 섬광이 번뜩했다. 설마 프, 러, 포, 즈?

그제야 도준이 왜 일주일 가까이 연락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잔뜩 사람 민감하게 만들어놓고 폭풍 감동을 주려는 작전. 참 무뚝뚝한데 이벤트감은 정말 최고라니까?

서운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

두려움 없이 꽃바구니를 손에 들어 꽃향을 맡았다.

“에취이! 에, 에, 에취이이!”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가 계속 나오는데도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 자잘하게 뛰던 심장이 설렘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오늘도 기가 막히게 윤영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미안.”

오늘은 방해받을 수가 없어서. 제아는 미련 없이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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