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유혹,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네.
2017.07.17.
도준의 얼굴에 찰나로 스친 건 놀라움이었다. 아기를 낳아주라고 해서 낳아준다고 대답해줬더니, 놀라긴 왜 놀라는 건데.
깊숙이 눈을 마주친 도준이 믿기지 않은 듯 재차 확인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요리조리 시선을 피해도 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제아의 시선을 잡아챘다. 끝까지 듣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 그렇게까지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면야.
“갖고 싶다구, 오빠 아기.”
당당하고 도도하게. 리플레이 스타트.
“그리고 낳아주겠다구, 기꺼이.”
와락, 숨도 쉬지 못하도록 도준이 품에 끌어안아버렸다. 숨이 막혀서 버둥거려보지만 소용없었다. 버둥거림을 멈추자 그제야 제아의 뺨에서 느껴지는 도준의 세찬 심장 박동 소리. 강하고 빨랐다.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긴, 우리 아기 만들면 되지. 그래서 저출산 국가에 기여하면 되고. 그러니까 얼른 하늘 보며 별을 따러, 음이라는 말까지는 차마 뻔뻔해서 못하는 제아였다.
“내가 오빠 미치게 한 게 한두 번인가 뭐. 그래서 좋아하는 거라면서.”
깜찍한 제아의 중얼거림에 도준이 나직한 웃음을 흘린다.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오직 너 때문에.
품에서 겨우 벗어난 제아가 살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 빛나는 새침한 동공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야릇하게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제아가 살그머니 힘을 주어 그를 끌어당겼다. 수줍게 눈을 감고 보드라운 입술을 모아서 꽃봉오리처럼 내밀더니…….
‘키스해 주세요.’
립글로스는 언제 바른 걸까. 작정하고 유혹하려는 듯 반질거리는 입술에서 달달한 복숭아 향이 났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도준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지는 순간…….
왈왈왈―!
대문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요즘 기특하게 안 짖는다 했더니 키스 타이밍만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방해하는 건지.
‘문벼룩 저건 진짜 도움이 안 돼!’
윤영이 언제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해진 제아의 모든 신경이 뒤쪽에 있는 현관문으로 쏠렸다. 분위기 다…… 깨져버렸어.
대담한 말과 행동에 뒤늦게 올려오는 민망함과 부끄러움.
제아는 터질 듯이 달아오른 얼굴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옅은 웃음을 머금은 도준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제아가 다시 나타났다.
“제아?”
제아의 기습 공격에 입술이 막혀버렸다. 말캉한 입술이 순식간에 그의 입술을 덮치고 앙증맞은 혀가 무방비한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흑색의 머리칼 사이를 가르며 흘러든 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야릇하면서도 대담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섞여들고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무섭게 휘몰아친 감각에 서로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이성은 사라지고 오직 머릿속에 꽉 차는 건 타는 듯한 갈증.
좀 더 원하고 좀 더 느끼고 싶다.
도준의 손이 제아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는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욕망으로 탁해진 도준의 동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제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생긋 웃었다.
자신의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통통한 입술이 팽팽해지면서 미소 짓는 게 이렇게나 자극적일 줄이야.
“……아기는 다음 기회에.”
윙크까지 날린 제아는 다시 바람처럼 대문 안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일취월장의 키스 실력으로, 그의 혼을 쏙 빼놓고 말이다.
며칠 전 프러포즈를 마음먹은 도준이었다.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제아와 잠자리를 하지 않으려고 독하게 다짐까지 했건만. 계획을 당기고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기도 했다.
보기만 하면 안고 싶고 자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으니까. 그런데도 참으려고 한 건 제아를 위한 마지막 존중이고 배려였다. 잊지 못할 프러포즈로 가기 위한.
<잠자리를 이미 하고 있다면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참아주세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한 배려입니다. 그리고 첫날 밤 다시 소중하게 안고 사랑해주세요. 참았던 만큼 더 타오를 것이고 더 사랑받는 느낌을 여자가 강하게 받을 거예요. 거창한 이벤트보다도 마음이 담긴 이벤트를 여자들은 더 좋아하거든요.>
‘잊지 못할 프러포즈를 어떻게 해줘야 합니까?’라는 어떤 남자의 말에 어떤 여자가 단 댓글.
무시하고 흘려버리기에는 좋아요가 눌러진 횟수가 엄청났다. 제아의 숨결이 남아 있는 입술을 엄지로 무심히 쓸어내리며 도준이 중얼거렸다.
“유혹,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네.”
요즘 들어 부쩍 제아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고 당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게 또 싫지가 않다. 간질거리고 따스한 이 감정은 아마도 행복이겠지. 그저 바보같이 실없는 웃음만 새어나온다.
얼른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싶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대로 제아를 침대로 데려가는 상상이 그의 몸에 뜨거운 열감을 선사했다.
문제아, 넌 정말 나를 미치게 해.
***
집안으로 들어선 제아는 흠칫했다. 소파에 윤영이 잔뜩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너 이리 좀 와서 앉아 봐.”
오랜만에 모녀 대전이 발발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꼭 물어야 할 것도 있으니까. 제아는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소파에 앉았다.
“너 정말 이준이랑 안 헤어질 거야?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냐구!”
냉전을 깨고 다그칠 만큼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허락해주면, 하고 싶어.”
“문제아!”
“엄마라도 그냥 허락해주면 안 돼? 나 이제 오빠 없으면 안 돼. 아들 같은 사위라는 말도 있잖아. 때론 가족이고 오빠이고 친구이고 남편인 평생 반려자가 최고 아니야? 그런 오빠를 죽도록 반대하는 이유가 뭔데?”
간절히 애원했지만, 새하얗게 질린 낯빛과 달리 윤영의 눈빛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제아 너, 엄마 말 똑바로 잘 들어. 너랑 이준이!”
그때였다.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윤식이 휠체어를 끌면서 튀어나왔다. 항상 자상하던 얼굴이 꽤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 미쳤어? 대체 애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도 어쩔 수 없어요! 아니면 저 철딱서니 고집불통이 이준이랑 헤어지겠어요?”
악에 바쳐 소리 지르는 윤영의 모습은 지독히도 제아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고집스럽게 닫혀버린 문 앞, 제아는 망연자실하게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핸드폰을 던지자마자 전화가 울린다.
“응, 지연아. 집엔 잘 들어갔어?”
[우리 제아 좋게따아앙! 호호! 잘나신 문이준이 프러포즈한다고 우리한테 뇌물까지 바쳤……? 야아앙, 한지로오! 내 핸드포옹 죠오.]
프러포즈라니? 그리고 뇌물은 또 뭐고? 제아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귓가에 닿아 있는 핸드폰 너머로 지연과 지로가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결국은 지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다. 아 씨! 진짜 저 입 가벼운 계집애.]
“지로야, 대체 무슨 말이야?”
[뭐긴 뭐야. 말 그대로 선배가 너한테 프러포즈 하려고 한다고. 여튼 나중에 이야기하고 너 모른 척하고 있어라. 저 계집애랑 같이 입 가벼운 놈 되기 싫으니까. 야아, 이지연!]
지연이 또 무슨 사고를 치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지로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
늦은 밤 전화 한 통에 달려온 연희는 한 회장과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 아가씨를 만나 해결하고 오겠다고 하더니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대로 안 되었나 보다. 이런, 쯧! 이참에 제대로 확인을 받겠다는 듯 한 회장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넌 대체 누구 편인 게야? 아들놈이냐, 이 아비냐.”
“둘 다 아니에요. 난 나만 생각할 뿐이에요. 아빠가 아빠만 생각하는 것처럼요.”
세상 헛살았구나. 한 회장은 흘러간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제 딸에 제 손주까지. 지지리도 핏줄 복이 없구먼.
이럴 줄 알았으면 죽고 난 후에야 주식을 물려줄 걸 그랬다. 어떻게든 틀어진 부녀 사이 회복해보겠다고. 거기다가 상속세 안내려고 편법까지 써서 일찍 주식을 물려 준 게 후회가 될 뿐이다.
“도준이 녀석 편 들 생각 하지 말아라. 그 녀석, 너와 날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놈이니.”
“아빠야말로 태영 씨한테 제일 그룹 넘겨줄 생각 하지 마세요.”
“흥! 그 녀석이 내 말을 안 들으면 한 부회장에게 줘야지 별 수 있냐?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제일 그룹을 망가뜨리려 하는 놈이야! 그 녀석을 내가 틀어잡아야 망하지 않은 제일 그룹을 물려줄 것 아니냐?”
“내가 틀어잡아요. 그러니까 후계자 자리, 도준이에게 줘요.”
도준이 녀석한테 주려고 이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르나? 쯧! 혀를 찬 한 회장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든든한 처가를 얻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후계자 자리 못 줘. 내가 주고 싶어도 위에서 압력을 행사하면 나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다.”
“도준이, 민화연이랑 내가 결혼시켜요. 그렇게 될 테니 두고 봐요.”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게냐?”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제 딸의 모습에 한 회장의 하얀 눈썹이 씰룩했다.
“아빤 도준이 자극해서 일 그르치지 말고 있으세요. 내가 알아서 해요. 가만히 있다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지금까지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서 이 사달이 난 게 아니냐?”
한 회장이 또다시 흥분하려는 순간 연희는 팽팽한 입술을 당기면서 차갑게 미소 지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 여자에게, 그리고 그 여자의 딸에게 가장 타격을 줄 수 있을 때를 말이다.
***
제아는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윤영이 마음에 걸리지만 묻고 싶어도 일찍 출근을 해야 하기에 결국은 집을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준은 스케줄 때문에 오늘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점심시간, 제아는 지로와 함께 야외 휴게실로 나왔다. 봄기운이 가득한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어젯밤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지연이는 뇌물을 받은 거고 난 일종의 위자료를 받은 거거든?”
“흐음.”
“왜, 네 남친이 거금 쓴 게 그렇게 아깝냐? 오토바이 다시 뱉어내줘? 나는 뭐 받고 싶어서 받은 줄 아냐? 그거 받고 내가 어제 잠을 설쳤다.”
“아니, 받아.”
“……뭐?”
“우리 오빠 돈 엄청 많아.”
얼씨구, 또 시작이네. 지로의 눈이 못마땅하다는 듯 쭉 찢어졌다.
“그리고 내 친구를 그렇게 신경써준다는 건데 나야 당연히 기분 좋지. 그리고 받은 만큼 네가 그 역할을 해주면 되는 거잖아.”
의미심장하게 반짝이는 제아의 눈빛에 지로는 문득 불안함에 휩싸였다.
“나 이제 그만 간……, 컥!”
슬그머니 도망치려 했지만 제아가 더 빨랐다. 가볍게 헤드록을 걸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어헛! 어디 가실까, 한지로군. 내 이야기 들어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얘기.”
“내가 어떤 프러포즈를 좋아하는지 귀띔해줄게. 잘 듣고 울 오빠에게 모른 척 흘려주는 거야, 오케이?”
넘쳐나는 돈을 못 써서 안달인 도준이 혼자 프러포즈를 한다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을 쓸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몰래 귀띔해줘서 저렴하게 하도록 해야지.
부모님의 허락 없는 결혼을 하려는 생각은 아직도 없다. 그렇다고 프러포즈를 받지 말라는 법도 없다. 프러포즈를 받고, 무기한 허락을 구해봐야겠지.
“나랑 오빠가 복숭아 사탕을 무지 좋아하거든?”
지로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제아야 자신을 정말 친구로 생각해서 이렇게 헤드록을 걸고 있는 거라지만, 어깨에 닿는 몰캉한 이 감촉은 뭐냐고!
귓가에 닿는 부드러운 숨과 어깨에 닿는 아찔한 촉감 때문에 정신이 지금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판이다. 게다가 속삭이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지들이 사탕 먹으면서 하는 키스를 나한테 왜 말하는 건데!’
한강에 둥둥 떠 있는 오리 배, 그리고 화려한 폭죽, 그래 거기까진 들을 만했다. 그런데 사탕 안에 반지를 넣는 건 좀 참아주면 안 되나?
“야 이 계집애야! 나 그래도 너 10년 동안 좋아했던 남자거든? 그런 말을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지로가 제아의 팔을 확, 쳐냈다. 그제야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어들인 제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지로를 응시했다.
“한지로, 이제 그만 나 잊어.”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지연과 통화를 했다. 지로가 건넨 반지 이야길 듣고 안심했었는데. 회사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지로의 눈빛엔 지독한 짝사랑이 아직까지 어려 있었다.
“……알고 있었냐?”
왜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제아가 들먹였는지 알게 된 지로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한지로.
“오빠랑 헤어지는 일도 없겠지만 헤어진다 해도 너한테는 안 가. 다른 남자 사랑할 마음 같은 거, 남아 있지 않거든.”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쩌라고. 고집스럽게 다물린 감각적인 지로의 입술을 본 순간 제아는 깨달았다.
점심시간에 테스트했던 그 결과를 제일 먼저 알려주어야 할 사람이 눈앞의 한지로라는 걸.
“한지로, 이거 비밀인데.”
진짜 친구가 되어서 축하해줘, 한지로.
“나 오빠 아기 가진 것 같아.”
지금 제아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두 줄이 선명히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 케이스가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지로에게 먼저 알릴 수밖에 없었지만 도준의 프러포즈에 대한 선물로 이걸 줄 생각이다. 그때까지만 꿋꿋하게 버티는 거야.
***
제일 어패럴에서 진행한 해외 입점 브랜드는 현재 성공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남은 건 글로벌 패션 사업 확장뿐.
아직까지 아메리카나 유럽 쪽에 국내 패션 브랜드가 성공한 사례는 없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성공 사례를 도준이 제일 어패럴을 통해 시도 중이다.
국내 제일 어패럴은 제아에게 맡길 것이고, 해외 산업은 도준이 직접 진두지휘를 할 생각이다.
한국의 뛰어난 디자인성과 상품력을 토대로 패션 산업의 성지인 뉴욕에서 가장 먼저 입증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뉴욕에 있는 스퀘어몰과 백화점에 입점하는 게 급선무였다.
며칠 후에 뉴욕에서 열릴 프레젠테이션, 그 자리엔 각국의 유통 바이어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계약만 성사시키면 수입매출까지 껑충 뛰어 제일 어패럴의 연 매출은 1조원대가 가능할 것이다.
제일 어패럴 대주주들과 개별 만남을 가져 미래를 제시하고 설득한 끝에 한 회장이 아닌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제 막 부산 출장에서 돌아와 짐을 푸는 도준에게 인호가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한 사장, 반지 배달 왔다.”
바쁜 도준 대신 인호가 프러포즈할 반지를 찾아온 것이다. 케이스를 열어 보니 큰 다이아몬드가 가운데에 박힌 이니셜 반지가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면 멀리서도 잘 보이겠지. 잠시만 눈을 떼면 벌들이 꼬이는 제아 때문에 도준이 생각해낸 것이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올 큼직한 다이아 반지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남친이 있으니 이 여자 넘보지 말라는.
“크루즈 예약도 끝냈고 폭죽 준비도 완벽하게 해놨다. 이제 남은 건 프러포즈뿐이야. 며칠 안 남았는데 떨리진 않고?”
“떨려. 그것도 엄청.”
너무 순순히 도준이 인정하자 인호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 실장도 고생했어.”
“알면 나 휴가 좀 주지 그래?”
“미국 출장 갔다 온 후 10일 휴가 주지.”
“너, 그 말 진심이냐?”
“진심이 아닐 건 뭔데.”
“10일이나 내가 쉬는데 업무에 지장 없겠냐는 뜻으로 묻는 거다.”
“내 옆엔 너 못지않게 훌륭한 문 팀장이 있다는 거, 잊었나 보지?”
“너 혹시. 이렇게 부려먹으려고 제아 씨를 스파르타식으로 채찍질 한 거 아니야?”
부려먹으려는 게 아니다. 제아의 숨은 능력을 알아보고 도준은 그저 키워줬을 뿐이다. 집에서 뒷바라지하며 살림하는 건 제아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제 능력을 발휘하며 일을 하는 게 더 어울리고 또 그래야만 빛이 나는, 그런 여자가 바로 제아이니까.
제아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주고 싶다. 열정적으로 삶의 숨을 내뱉는 제아와 모든 걸 함께 하고 싶다.
아내이자 비서이고 사업 파트너. 내 아이의 엄마이자 유일한 가족이고 안식처.
도준은 1시간 반을 달려 드디어 양평의 별장에 도착했다. 요양이라도 하는 걸 테 내는 듯, 한 회장이 보란 듯이 양평에 있는 별장으로 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도준은 뭔가 수상함을 감지했다. 지나치게 경비가 삼엄했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잠잠하게 있다가 갑자기 딜에 대한 대답을 해주겠다는 것도.
짐승처럼 날이 선 본능이 위험 경고를 울렸다.
“유 실장, 넌 여기서 대기 해. 차에서 내리지도 말고.”
“응? 갑자기 왜?”
“하라는 대로 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지만 결국 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있는 걸 선택했다. 도준이 다가서자 경호원들이 길을 터주었다. 별장 내부로 들어서자 한 회장의 분신인 고집사가 담담하게 그를 맞이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고 집사는 어떤 동요도 일으키지 않은 채 그를 안내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그제야 다이닝 룸에서 혼자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한 회장이 보였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곤두선 건가.
“보시다시피 회장님은 지금 식사 중이십니다.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시면 회장님이 곧 오실 겁니다.”
6시까지 오라고 해놓고 그 시간에 식사를 할 건 뭔지.
하지만 도준은 내색하지 않고 고 집사가 안내한 2층의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들이자마자 급하게 방문이 닫히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