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오빠 아기가 갖고 싶어.
2017.07.13.
마침내 간단한 와인 안주 몇 가지가 만들어졌다. 메인 요리사는 한지로, 보조 요리사는 한도준. 안주를 가져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지로의 표정은 꽤 뿌듯해 보였다.
“나 아무래도 요리에 소질이 있나 봐.”
하지만 도준은 아닌가 보다. 깨끗이 씻었는데도 손에 음식 냄새가 배였는지 연신 코로 제 손가락 냄새를 맡더니 결국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떨결에 지로와 지연, 둘만 덩그러니 거실에 남았다.
소파 옆에 던져놓았던 재킷 주머니를 뒤진 지로는 지연의 앞으로 무언가를 툭, 던졌다. 지연이 케이스를 열어보니 영롱한 큐빅이 반짝이는 반지였다.
“무슨 반진데 쓰레기 투척하듯 나한테 던지실까?”
“……주인 없다. 환불도 늦었고. 너 가지라고. 팔아먹든 말든 네 맘대로 해라.”
반지를 제 손가락에 껴보던 지연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거 제아한테 고백용으로 샀던 그 반지야?”
“아, 몰라.”
꽤 심드렁한 지로의 표정이 갑자기 처량 맞아 보이는 지연이었다.
“고백용이니 큐빅으로 했을 리는 없고. 다이아?”
“…….”
“뭐, 나야 좋지. 근데 진짜 포기했나 보네?”
지로가 쫙 찢어진 눈으로 지연을 힐긋 째려보았다.
“그럼 너 같으면 이런 꼴까지 보고 내가 포기 안 할 줄 알았냐? 나도 자존심 있는 새끼거든요?”
사실 거짓말이다. 지로는 끝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도준에게 들켜버리고 위로까지 받아버렸다. 그의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새댁 흉내를 내는 제아까지 봐버리니 더욱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빌어먹을.
어찌 보면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품에 품고 다니던 그 반지는 미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그 바보 같은 미련마저도 과감히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리저리 반지를 살펴보는 지연의 눈은 반지의 디자인이 아니라 반지의 가격을 매기는 예리한 눈빛이었다.
그래, 저 계집애는 팔아먹고도 남을 애지. 지연의 클러치 안으로 들어가는 반지를 보며 우선 안녕을 고해본다.
‘문제아, 행복해라.’
때마침 도준이 방에서 나왔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지연이 태연하게 도준에게 말을 건넸다.
“제아 어디 갔냐고 안 물어봐요?”
“곧 들어오겠지.”
도준답지 않은 무심함에 지연이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이제 내 여자 되었다 이건가?
“제아가 어디 간 줄 알고 그렇게 태연해요?”
제대로 도전도 못 해보고 첫사랑을 포기해야 해서일까. 지연은 왠지 심술이 부리고 싶었다.
“제아가 로비를 통과하면 나한테 보고가 들어와.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 제아가 건물 내 어느 상가에 들렀다는 뜻이지.”
아파트 입구부터 로비까지 모두 체격 좋은 경비원이 지키고 있고 정문이든 주차장이든 무조건 로비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도준은 그들에게 단단히 언질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그의 집을 드나들 때마다 낱낱이 보고가 된다는 걸 제아는 모르리라.
그럼 그렇지. 속으로 푸스스, 한숨을 내쉬는 지연이다.
펑―!
품질 좋은 레드 와인의 코르크 마개가 경쾌한 음을 내며 뽑혔다. 길고 새하얀 손가락에 감긴 와인 병이 기울어지면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지로의 와인 잔이 먼저 채워지고 지연의 와인 잔이 채워지는 순간 도준이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
쪼로록, 따라지는 와인 소리는 소프라노였고, 그보다 낮게 깔리는 도준의 음성은 테너였다.
묘하게 어우러졌고 섹시함을 유발했다. 와인에 취하는지 눈앞의 남자에게 취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둘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조만간, 제아에게 프러포즈를 할까 해.”
“……!”
“……!”
제아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말리지 않았던 건 이 타이밍을 노린 것이다. 지금의 타이밍을 놓치면 도준 자신이 따로 시간을 내어 둘을 만나야 하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다. 그러니 지금 용건만 간단명료하게.
와인 잔을 느릿하게 입으로 가져가며 도준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둘에게 조언을 얻고 싶어.”
그가 없는 10년 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공백이 길어진 만큼 너무 변해버린 제아였다.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모르겠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웃어주지 않고 행복해 할 줄 알았는데 행복해 하지 않는다.
아직 끝이 아니다. 긴 마라톤을 끝내고 이제 백 미터 질주를 해야 할 시작점. 단 한 번이라도 제아가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웃는 걸 보고 싶었다.
당장 결혼식은 올리지 못하더라도 프러포즈를 하고 제아의 확답을 듣고 내 여자라고 낙인을 찍고 싶다.
“어떻게 해야 제아에게 잊지 못할 프러포즈를 할 수 있을지 말이야.”
며칠 동안 공을 들여 포털 사이트를 뒤지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것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정확한 건 여자들이 프러포즈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
“맨입으로 도움 받을 생각은 없어. 난 공짜를 지독히도 싫어하거든.”
지로와 지연의 앞으로 무언가가 놓였다.
“이게 뭡니까?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설마, 아닐 거야.
제 앞에 놓인 고가의 브랜드 마크가 새겨진 키를 보는 지로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오토바이 키야. 차보단 오토바이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차는 출근을 핑계로 사수했지만 오토바이는 압수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진 지로였다. 남의 사생활을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건데!
곧이어 지연의 앞으로도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새하얀 봉투이기에 설마 현금인가, 생각하며 열어본 지연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코코 디엘 패션쇼 초대권-
한국에서도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초대되는 명품 중에서도 명품인 브랜드 코코디엘 패션쇼라니! 그것도 초대권이 무려 두 장이었다.
지연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초대권의 옵션인 비즈니스 티켓과 호텔 숙박권까지 하면 가격이 얼마일지.
손에 쥐여진 엄청난 뇌물 앞에 갈등이 어린다. 이걸 받아도 될까? 갈등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지로와 지연은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잘 부탁해, 제아의 친구들.”
난생 처음 듣는 도준의 부드러운 음성과 봄 햇살처럼 나른한 미소가 그저 눈이 부실 뿐이었다.
***
뇌물을 냉큼 받은 지연과 달리 지로는 처음엔 완강히 거절했다. 제아를 깔끔하게 포기한 건 맞지만 비싼 건 못 받겠다고 했다.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짓밟지 말라나 어쩐다나. 물론 값어치로 따지면 티켓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더 높았다. 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도준만의 사과 방법이었다.
“10년간 지킨 여자를 가로챈 것에 대한 미안함. 내가 없는 10년간 제아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래서 주고 싶은 거고, 부담 없이 받아줬으면 하는데. 그래도 안 되나.”
지로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그건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한도준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게.
안 받으면 괜히 미련 남은 놈이 될 것 같은 분위기에 결국 지로도 선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로가 키를 받아든 순간 제아가 들어왔다. 황금 같은 15분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2차가 시작되었다. 와인만 마셨으면 좋았겠지만 지연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바에서 보드카를 가져와 부어라 마셔라 했다.
탄산수나 주스도 없이 원액으로 드링킹을 한 지연은 빠른 속도로 취해버렸다. 술에 취해 밤의 산책을 고집하는 지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근처의 공원으로 달밤의 산책을 나왔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넓은 공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지연의 뒤를 쫓아다니느라 지로는 지금 정신이 없다. 한밤에 이 무슨 운동인지.
도준은 제 옆에 바짝 붙어 말없이 걷는 제아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내리깐 속눈썹에 드리운 건 근심이었다. 적어도 그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제아의 침묵이었다. 생각해보니 나갔다 온 이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갑자기 손목이 거칠게 끌려 벤치에 앉고 나서야 제아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부드러운 앞 머리칼이 이마를 간질일 정도로 도준은 제아에게 상체를 가까이 기울이고 있었다.
“제아 너,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그 앞에서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표정관리를 했어야 하지만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그게 자꾸만 신경 쓰이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 한다. 정말 걱정거리가 될 만한.
“오늘 회장님께 건방지게 선전포고한 게 아무래도 좀 걸려서.”
서늘하게 가라앉은 도준의 눈동자가 셜록 홈즈처럼 예리하게 제아를 살펴본다. 다행히 변명이 먹혔는지 도준이 그제야 제아의 옆에 앉는다. 그래도 불안한지 입고 있던 점퍼로 제아를 감싼 후 제 품으로 꼭 끌어당겼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나만 믿고.”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도준의 음성이 일렁이는 제아의 심장을 어루만져준다. 알 수 없이 불안했던 마음이 도준의 품에 안겨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사르륵 가라앉는다.
약사가 준 테스트기를 받고서야 제아는 깨달았다. 두 달 가까이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평소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 아무것도 아닐 거야. 세 달까지 안 했던 적도 있잖아?
‘문제아, 속단하지 말자.’
스스로 결론을 내린 후에야 제아는 도준의 어깨 위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었다. 벤치 바로 앞에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새하얀 가로등 빛에 드러난 잔디밭은 대낮처럼 훤했다.
날씨가 오늘 선선해서일까. 꽤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시간임에도 잔디밭을 채우고 있었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혼남혼녀들. 다정한 커플들. 그리고…… 늦은 밤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부들까지.
품에 안긴 작은 아기부터 뛰어노는 아이들까지 연령대는 다양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었는데. 자꾸만 아이들에게 눈이 간다.
오빠와 나, 그리고 우리 아기.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먼 훗날의 이야기일 테지만 생각만으로도 벌써 심장이 벅차오른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제아의 시선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도준도 제아의 시선을 쫓아갔다. 시선 끝에 닿은 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작은 아기를 품에 소중히 안고 잔디밭을 거니는 부부였다.
그걸 알게 되자 도준은 마음이 복잡 미묘해졌다. 제아 넌 지금 저들을 부러워하는 걸까. 두려워하는 걸까.
“방금 나라에 기여할 또 다른 방법이 생각났어.”
누구 때문에 지금, 도준은 팔자에 있지도 않은 애국자 노릇을 할 판이다.
“저출산 국가에서 나라도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도준이 불쑥 건넨 말에 제아가 살며시 눈을 치켜뜨고 그를 올려다본다.
“난 아들 딸 가리지 않아.”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랑스러울 만큼.
“너만 닮으면 돼, 나는.”
지독하게 못된 나란 놈만 닮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점점 내려오는 입술이 스치듯이 이마에 닿는다.
“우리 아이 낳아줄 거지?”
진심이 어린 잔잔한 도준의 음성이 스며들어 제아의 심장을 간질였다. 본능적으로 재킷 주머니에 들어간 제아의 손이 테스트기를 움켜쥐었다.
‘그 아이, 벌써 생겼을지도 몰라.’
도준에게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제아가 고민하는 그때…….
“야, 이 나쁜 악당 놈아, 나를 내려놓거랏!”
지로의 어깨에 보릿자루처럼 둘러메져 오는 지연이 보였다. 술래잡기에 넌덜머리가 나는지 지로가 지연의 밤나들이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
한 회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도준이 제안했던 딜을 떠올렸다.
―상반기 매출 목표액 3000억.
제일 어패럴이 생긴 이래 연매출이 1000억원대를 넘어본 게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데 한 해도 아닌 상반기 매출액 목표가 3000억이라니.
―달성 여부에 따라 회장님과 저 둘 중 하나가 제일 어패럴 경영권에서 완벽하게 손을 떼는 겁니다.
―…….
―목표액 달성 시엔 회장님이. 미달성시엔 제가. 어떻습니까?
―내가 왜 네 녀석이랑 그딴 딜을 해야 하는 게냐?
―앞뒤 가리지 않고 능력을 증명해 보인 사장을 해임하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주주들이 그걸 용납할 것 같습니까?
괘씸하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의 여지가 없다.
―썩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한 회장은 우선 뒤로 한 발 후퇴하는 걸 선택했다. 아무리 손해 볼 게 없는 딜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봐야 한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영특한 손자 놈이니.
그래서 한 회장은 도준이 간 이후로 지금껏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손해 볼 것 없는 딜이건만 뭐 이리 찝찝한 건지.
그러다가 번뜩 머리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도준이, 이놈!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 상반기라 함은 우선 4개월이란 시간을 한 회장이 도준에게 내주어야 하는 셈이다.
3000억까지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다. 그저 망해가는 제일 어패럴을 단단히 자리 매김만 시켜도 도준은 절대 물러날 일이 없으리라.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주주들이 그걸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상승세일 뿐 좀 강력히 나가면 결국은 한 회장의 편을 들어줄 이들이지만, 좀 더 지난다면…….
결국은 제 편을 만들고 자리 매김을 하기 위한 시간 끌기 작전이다. 그뿐이겠는가.
그 정도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순간 제일 어패럴은 시작일 뿐이다. 제일 그룹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도준에게 먹힐 것이다.
그 타이밍에 한 부회장의 비리까지 터뜨려 버린다면 완벽한 패배였다.
그나마 네 녀석이 아니어도 난 후계자가 있다라고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협박거리까지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허허, 참.”
그저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무엇보다 도준과도 사이가 좋지 않지만 자신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제 딸이 변수였다. 한 회장 다음으로 주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게 딸년이니 말이다.
제 딸이 그에게서 등지고 도준의 편에 서기라도 한다면……. 모든 주식을 상속 받은 손자 놈이 주주들과 결탁이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감히 날 쫓아내려 해?”
어차피 핏줄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이런 식은 절대 아니다. 완벽하게 쫓겨난 뒷방 늙은이는 절대 되지 않으리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손자 놈의 거침없는 행보를 막아야만 한다. 후계자를 삼더라도 제대로 손안에 틀어줘 버린 후, 그 후에 넘겨줄 것이다.
“고 집사, 당장 도준이 녀석에게 사람 붙이게!”
***
지로와 지연이 떠난 후 도준도 제아를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제아의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도준의 왼손은 운전하는 내내 제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만지작거리는 도준의 미세한 손짓엔 애절함이 배여 있다. 동네에 다다르자 잿빛 어둠에 둘러싸인 적막한 동네가 그들을 반겼다.
차에서 내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깍지 낀 손을 꼭 잡은 채 걸었다. 그런데 초록색 대문 앞에 다다랐는데도 도준이 꼭 잡은 손을 놔주지 않는다. 왜 그러냐는 듯 몸을 튼 제아는 순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스름한 가로등빛 아래, 항상 강하기만 했던 제 남자의 눈에 어린 불안함이 제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미처 몰랐다. 그저 재킷 주머니에 있는 그걸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느라. 자신의 미세한 감정 변화에도 도준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잠시 잊은 것이다. 그 덕에 감정 표현에 서투른 도준은 지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도준을 향한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직 해보지도 않은 테스트기의 결과에 바보같이 덜덜 떨다니. 난 대체 뭐가 무섭고 두려웠던 걸까.
오히려 강력하게 반대하는 윤영과 윤식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쓸쓸히 자란 부모님이기에 누구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뻐해줄 테니까.
물론 속도위반을 했다고 하면 아마도 윤영에게 처음은 엄청 맞겠지만 그 정도쯤이야.
‘오빠와 나의 아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들썩이고 심장이 간지럽다. 얼마나 앙증맞고 예쁠까.
제아는 연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과감하게 지워버렸다. 묻고 들을 게 있다면 그건 연희가 아닌 제 부모님과 해야 할 일이다.
“오빠.”
제아의 부름에 그제야 도준이 조심히 눈을 부딪쳐왔다. 시크하면서도 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도준은 오늘도 여전히 멋있었다. 유혹하고 싶을 만큼.
지독히도 유혹적인 제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제아는 갑자기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이 남자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테스트기야 급하게 해보지 않아도 된다. 이왕 마음먹은 거, 속도위반 한번 제대로 저질러 볼까? 테스트기야 더 노력한 후에 해봐도 되겠지.
대문의 계단을 몇 개 올라간 제아는 손을 뻗어 도준의 코트 깃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무력하게 끌려오는 도준에게 달달한 숨결을 내뿜으며 닿을 듯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공원에서 물었던 대답, 이제 해줄 테니 잘 들어.”
제아는 그윽하게 도준을 내려다보며 유혹하듯이 촉감 좋은 코트를 손길로 더듬어 올라갔다. 입술이 닿기 전 미세한 손가락의 피부로 도준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나 오빠 아기가 갖고 싶어.”
지독한 결심을 토해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