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89화 (89/104)

89. 기승전 그 여자 문제아

2017.07.10.

“회장님, 손자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고집사의 보고가 이어진 후 도준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도준이 단정하게 한 회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어 늦은 밤에도 무례하게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항상 듣던 말투까지도 이젠 거슬린다. 그 아가씨가 콕 집었던 식사뿐만이 아니다. 저 녀석은 단 한 번도 날 할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단 말이지.

몇 시간 전에 있었던 그 아가씨와의 불쾌한 일이 떠오르자 한 회장의 입술이 심하게 씰룩였다.

“여름이 오기 전에 제아와 결혼식을 올릴 겁니다.”

치솟은 노기를 다스리기도 전에,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도준이 2차 공격을 해왔다.

“후계자 자리, 누구에게 주시든 회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계획했던 대로 한 부회장님 비리 건 터뜨릴 겁니다. 후폭풍 감당은 아마도 후계자의 몫이 될 테니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다만 회장님도 깊게 연루되어 있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애초에 연희와의 계약 조건은 바로 한 부회장 부자를 끌어내리는 것. 그 후 제일 그룹이 어떻게 되든지 그건 그가 알 바 아니다.

“여자 하나에 미쳐서. 결국은 가족을 버리겠다는 게냐?”

가족이라…… 도준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가족이라는 건데. 낭떠러지에 떨어뜨려놓고 죽지 않았나 확인하는 것? 어떻게 하면 득을 취하고 실을 줄이는지 저울질하는 것? 호시탐탐 잡아먹으려 하고 손에 쥐고 흔들려 하는 그런 게 가족이라면 개나 줘버리라지.

“제게 가족은 한 명뿐입니다.”

“……?”

“그 여자. 제 유일한 여자임과 동시에 유일한 제 가족입니다.”

“네 이놈! 뚫린 주둥아리라고 함부로 지껄여!”

“제일가에 들어온 이후로 저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치밀어 오르는 지독한 감정. 분노라는 걸 도준은 처음으로 제 눈에 그득 담아 한 회장을 직시했다.

“가족이라는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틀렸습니까?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이란 게 뭔지 궁금하군요.”

“……!”

“절 아바타처럼 부리려는 회장님과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제 어머니. 저를 잡아먹으려는 한 부회장님과 한 이사님. 그들 중 누가 제 가족이라는 겁니까?”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한 회장이 숨을 헐떡였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래도 허울뿐인 가족 흉내를 내고 싶어서 제 결혼 방해하고 반대하고 싶으시면 하세요. 단.”

한 회장은 땅을 치고 후회해보지만 이미 태산처럼 커져버린 손자는 몸집이 거대했다.

“저한테만 하세요. 오늘처럼 예정 없이 찾아와서 제 여자를 함부로 자극하고 막 대하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으허헉, 컥컥!”

한 회장이 굵직한 기침을 쏟아내는데도 도준은 걱정은커녕 정중함을 유지할 뿐이었다. ‘당신과 나 사이는 서로를 걱정하는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눈빛으로 차갑게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자 놈은 기승전 그 여자 문제아였다.

“이 녀석! 넌 할아비 건강이 걱정도 되지 않은 게냐?”

“저와 회장님이 서로의 건강을 걱정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울뿐인 핏줄 아닙니까. 그리고 한 회장님 건강하신 거 꼬박꼬박 김 박사님이 체크해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거에 쓰러질 한 회장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는 도준이었다.

“아 한마디 더 하자면 전 제일 그룹은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제일 어패럴은 지금까지 제가 노력한 게 아까워서 가져야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도 마! 내가 널 어떻게든 끌어내릴 거다!”

차갑다 못 해 명석하게 빛나는 도준의 눈빛이 찌르듯이 한 회장의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그럼 거래하시죠. 한 회장님이 좋아하시는, 득실 따지는 사업 거래 말입니다.”

제아가 처음으로 몸을 담은 직장이자 온 열정과 땀을 쏟아 부은 회사. 내색한 적 없지만 제일 어패럴에 대한 제아의 애정은 대단했다.

밤을 지새우며 일을 하고 제일 어패럴의 주가를 확인하고. 스파르타보다 더한 강도의 수업까지 군소리하지 않고 소화했다. CEO도 그 정도로 몸과 열정을 불사르진 않으리라.

그렇게 유도한 이는 본인이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도준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다. 그랬기에 포기할 수 없다.

제일 어패럴, 제아에게 주는 그의 결혼 선물이 될 것이다.

***

도준은 본가를 나와 압구정역으로 차를 몰았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의 죄책감이나 미안함도 없다. 곪을 대로 곪아 터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제일 그룹, 한번쯤은 바로잡아야 할 일을 행하려는 것뿐이니까.

압구정역에 도착하자 제게 손을 흔드는 지연이 보였다. 집으로 바로 가겠다는 지로와 달리 지연은 굳이 데리러 오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제 옆에 제아가 아닌 다른 여자가 앉는 게 싫어 뒷좌석에 앉으라고 했지만 지연은 꾸역꾸역 조수석을 꿰어 찼다. 짙은 향수 냄새에 도준이 코를 찡긋하자 지연이 톡 쏘아붙인다.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마요. 친한 친구의 남자에게 쓸데없는 짓은 안 하거든요, 나도? 옆 자리 앉는 것도 민감하게 반응하면 확 내려버릴까 보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나저나 웬일? 갑자기 전화해서 집에 놀러오라니까 당황스럽잖아요. 못 잡아먹어 안달인 한지로까지 다 초대를 하고.”

“오늘 제아가 꽤 힘들었던 날이야.”

“……?”

“그래서 오늘은 제아가 행복했으면 해.”

도준의 말에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생각에 잠긴 지연이 곧이어 이해가 된다는 듯 생긋 웃는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제 친구들에게 제 남자를 보이고 함께하는 걸 좋아한다. 친구를 좋아하는 제아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자리가 마련된 적이 없었다. 연애를 하더니 웬걸. 회사 일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얼굴도 제대로 보기가 힘든 제아였다.

그런 제아에게 그 행복감을 주고 싶다 이 말이지? 이 남자 의외로…… 세심하네.

“근데 왜 힘들었는데요?”

지연의 물음에 도준이 그답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 가정사라고 해두지.”

“아하.”

“내 앞에서 괜찮은 척 웃고 있지만 힘들어 하고 있어.”

“…….”

“그리고 난 위로하는 법을 잘 몰라.”

“흐음.”

“여자들은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던데.”

“제아랑 내가 한 수다 하긴 하죠. 접시들이 와르르르! 호호!”

“제아가 웃는 걸 보고 싶어.”

가볍게 받아쳐도 도준은 참 재미없게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섬세한 옆모습에선 눈을 뗄 수 없다.

도저히 시선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주얼은 정말 죽여주는 남자다. 문제아, 이 계집애. 부러워 죽겠네.

“뭐 그렇게 말한다면야. 제가 있는 힘껏 노력해보서 입 좀 털어보죠 뭐.”

***

연희를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아가 고민하던 찰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설마 도준은 아니겠지?

긴장감이 등골을 훑어 내리는 순간 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한지로?”

가죽 재킷을 입은 지로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내리는 게 보였다.

대체 네가 왜?

놀란 제아와 달리 지로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연희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 아줌마는.”

제아가 살벌한 눈빛으로 눈치를 주자 그제야 마지못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한지로의 등장에 제아는 우선 한숨을 돌렸다.

“죄송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안 되겠는데 어쩌죠?”

가만히 둘을 번갈아보던 연희가 제 뒤에 있던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남자가 다가와 제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연락해요. 늦게 할수록 후회는 커질 테니 빨리 연락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연희가 사라지고 나서야 지로가 날쌔게 물었다.

“뭐야, 저 얼음 같은 아줌마는.”

“오빠, 어머니.”

“뭐어? 대박! 둘 다 정 없이 차갑게 생긴 건 닮았……, 흠흠.”

제아가 살벌하게 노려보자 지로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네가 여기 왜 있어? 나 스토킹 했어? 너 아직도 나 못 잊……, 아얏!”

빠악. 민망하게 지로가 손바닥으로 제아의 이마를 밀어버린 것이다.

“어이 아가씨, 공주병에서 깨어나라.”

“우씨.”

“선배한테 연락 못 받았냐? 나랑 지연이 오늘 저녁 식사 초대받았는데.”

“……오빠가?”

“밥 먹었다는데도 반 협박처럼 밥 먹으러 오라더라. 와서 밥 먹고 오늘 무조건 네 기분 맞추라는 게 뭔 말이야 대체. 내가 무슨 피에로냐? 그 새끼는 뭐든 제 멋대로야 기분 더럽게.”

말과 달리 지로의 손엔 두루마리 화장지와 세제가 들려 있었다. 그 모습에 제아는 살포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3인분 식사를 준비하라던 말의 의미를.

“오빠 어머니 만난 건 비밀로 해 줘야 해, 알았지?”

“내가 왜.”

“한지로, 너 나한테 안 맞은 지 오래됐지?”

제아가 앙칼지게 눈을 치켜뜨자 시선을 피한 지로는 신경질적으로 짧은 머리를 털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커플이 아주 나란히 나를 협박하네.”

“들어오기나 하셔요. 오늘 타이밍 기가 막히게 등장해줬으니까 맛있는 야식 차려줄게.”

새댁처럼 앞치마를 두른 제아가 지로의 손에서 화장지와 세제를 받아들고 총총총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지로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평수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창밖의 뷰도 끝내준다. 내부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웠지만 도준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 빌트인 가전을 제외하고 채워진 가구는 의외로 단출했다.

거실 소파에 어색하게 앉은 지로는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제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핑크색 앞치마를 두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는 제아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드는 생각은 오로지…….

‘개부럽다.’

도준만 아니었으면 저 모습을 내 집에서 볼 수 있었는데. 포기하지 못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소파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곧이어 도준과 지연이 도착을 했다.

“제아야!”

얼마 만에 보는지 두 여자는 한참 동안 얼싸안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제아는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도준에게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오빠.’

드넓은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진수성찬, 음식 솜씨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두 남자는 묵묵히 밥만 먹을 뿐 수다는 제아와 지연의 몫이었다.

지연과 수다를 떨면서도 제아의 손은 바빴다. 해물의 살을 발라서 도준의 밥그릇에 옮기고 반찬 이거저것을 집어서 밥 위에 올려주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아이처럼 젓가락은 까딱도 하지 않고 제아가 올려주는 반찬으로만 밥을 두 그릇 해치운 도준의 모습이었다. 염장 아닌 염장질.

수저를 쥔 지로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거 보고 완전히 포기하라고 부른 거야, 분명!’

이쯤되니 비뚤어진 생각까지 드는 지로이다.

“설거지는 지로와 내가 하지. 와인 안주도 같이 준비하고.”

식사가 끝나자 도준이 지로에게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다. 태어나서 설거지는 안 해본 몸인데!

“아 씨, 왜 나까지 끌어들여요?”

눈을 부릅뜨고 강력히 항의를 했건만. 지로는 결국 도준과 설거지를 같이 하는 중이었다.

지로가 닦고 도준이 헹구고.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설거지가 끝나자 어색한 침묵을 어깨에 올린 채 와인 안주거리를 사기 위해 두 남자는 지하의 마트로 향했다.

간단히 장을 보고 들어가기 전 도준과 지로는 담배를 피웠다. 지로는 담배에 불을 붙였고, 도준은 그저 담배를 입에 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지로의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가 거의 타들어갈 때쯤…….

“이젠 좀 접지 그래.”

덤덤한 말투로 무심하게 도준이 침묵을 깼다. 주어가 생략됐음에도 지로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의미심장한 말.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야. 그런데 계속 가지고 있어봤자 상처 아닌가.”

들켜버린 마음, 지로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지로를 스윽 바라본 도준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위로하듯이.

***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감이다. 널찍한 거실 소파에 지연과 둘이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제아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도준과 함께 한 이후 오히려 행복과 거리가 멀어진 것도 같고.

차이가 나는 서로의 환경, 가족의 반대, 거기에 회사의 업무까지. 극심한 긴장감과 스트레스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문제아. 나만 웃긴 거 아니지?”

지연의 말에 고개를 트니 주방에서 앞치마를 나란히 두른 채 와인 안주를 준비하는 도준과 지로가 보인다.

185센티미터는 거뜬히 넘는 장신의 두 남자가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제아도, 그리고 지연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씨, 그 손으로 펜대만 굴리지 말고 칼질 좀 잘 해봐요. 접어서 모양 그대로 자르면 되는 걸 왜 못하냐고요! 치즈 반으로 접어서 세모로 딱, 이렇게!”

그래도 친구가 운영하는 바에서 안주를 만들어 먹어봤다고 지로가 도준에게 훈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모 맞잖아.”

“그게 무슨 세모예요? 아후, 크기도 제멋대로네. 반 접는 것도 제대로 못해요? 이래가지고 베이컨이랑 말 수가 있나.”

“그럼 네가 다 하던지.”

“난 원래 할 생각도 없었는데 선배가 한다고 한 거잖아요! 엄연히 피해자는 접니다.”

날 잡은 듯 제대로 잔소리하는 도준과 찌릿찌릿 째려보면서도 마지못해 치즈를 자르는 도준. 두 남자의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아웅다웅하는 형제 같다고 해야 하나.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한지로에게 구박받는 한도준이라니.

“한지로 쟤 완전 날 잡았나 보다?”

“그러게. 우리 오빠한테 쌓인 거 많았나 봐.”

“쌓인 것만 많았겠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었는데. 저 성격에 저 정도면 양호한 거지.”

지연은 지독히도 낯선 도준을 지켜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준 오빤 정말 지독할 정도로 너밖에 모르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딱 미친?”

흠칫한 지연이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제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친 놈 같다고?”

“내, 내가 언제?”

“괜찮아, 우리 오빠 미친 거 맞으니까.”

“야아!”

“나도 덩달아 미쳤고.”

“……!”

“우리는 미친 커플이야. 그래서 집에서 인정 안 해주나 봐.”

갑자기 내려앉는 제아의 표정을 지연이 조심히 살핀다. 등을 세우고 엉덩이로 조금 더 바짝  다가왔다.

“집에서 반대가 심해? 기사만 보면 제일 그룹에서도 너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던데. 아니었어?”

“오빠네도 심하고. 우리 부모님도 심하고.”

“에엥? 왜? 이준 오빠라면 네 부모님도 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외모 잘났지 돈 많지 너밖에 모르지, 그리고 아들 같은 사위라는 말이 진짜 실현되는 건데 도대체 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묻는 지연에게 제아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니까. 문득 좀 전에 연희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정말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나?’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손끝이 떨릴 정도로 불안함이 넘실거린다. 아무래도 연희를 만나봐야겠다.

오랜만에 웃었는데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도준은 여전히 치즈와 씨름 중이고 그 덕분에 지로는 혼자 분주히 움직이느라 바쁘다.

“지연아 나 밑에 약국 좀 갔다 올게. 속이 안 좋아.”

갑자기 창백하게 질린 제아의 얼굴을 지연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약국이 아니라 병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오빠한테 말해서 응급실이라도 가.”

“이 정도 가지고 무슨 응급실이야. 그냥 신경성 위염 같아. 전략팀장 된 이후로 신경을 좀 많이 썼거든. 그 이후로 기사가 나고 연달아 일이 빵빵 터지니까 스트레스도 좀 많이 받고.”

“어휴, 여하튼 성격하고는. 너도 어떻게 보면 이준 오빠처럼 완벽주의라니까? 예뻐진 게 아니라 살이 빠진 거였어. 근데 이 시간에 약국이 열어?”

“이 건물에 입점한 상가들은 다 24시간이야.”

“대박! 괜히 비싼 아파트가 아니네.”

카디건을 집어 든 제아는 소리 없이 집을 나왔다. 다행이도 지로의 잔소리 때문인지 도준은 제아가 나가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지로의 잔소리는 계속되었으니까. 그걸 들으니 또다시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어린다.

***

“신경성 위염 약 좀 주세요.”

“병원에서 신경성 위염이라고 한 건가요?”

별다른 생각 없이 한 말에 약사도 별다른 생각 없이 물었다.

“네? 아, 병원을 간 건 아닌데.”

약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마치 의사인 듯 제 약을 스스로 처방하는 뭘 모르는 몰상식한 환자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서 있는 제아에게 약사가 다시 덤덤히 물었다.

“증상이 어떻죠?”

“속이 울렁거린 지 꽤 됐어요. 넘기면 괜찮아지긴 하는데 또 갑자기 밥을 먹으면 속이 또 그래요. 소화도 잘 안 되고 몸도 좀 무겁고 힘도 없고. 위염 맞죠?”

“통증이나 더부룩함, 혹은 복부 팽만감은 없나요?”

“네. 그건 없는 것 같아요.”

“흐음, 그런 증상이 얼마나 되었죠?”

“한 달 정도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약사가 약 몇 개를 챙겨서 제아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우선 위염 약은 주지만 내일 문 여는 병원 있을 테니 꼭 가봐요.”

“네. 근데 이건 뭔가요?”

약사가 내민 봉투가 두 개였다.

“아, 혹시 모르니 이것도 해보라구요.”

제아가 봉투 안에서 약상자를 꺼내기도 전에 약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안에 든 것의 정체를 먼저 알려준다.

“임신 테스트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