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미치게 하는 그대-88화 (88/104)

88. 오늘 나랑 데이트 할래요?

2017.07.06.

최악의 밸런타인데이가 될 뻔한 날이었어. 포장지 그대로 버림받을 뻔한 초콜릿은 이제야 도준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제아는 도준의 입안으로 사라지는 초콜릿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화강암처럼 튼튼한 그가 지독한 두려움에 떨었다는 걸 알 리가 없으니까.

이제야 너와 나, 둘이 되었는데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외로움과 쓸쓸함.

이별을 암시하는 내용이 적힌 카드를 본 순간 다음 카드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밸런타인데이 트라우마 생길 뻔했어.”

나약한 투덜거림을 내뱉는 게 도준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초콜릿에서 떨어진 시선이 도준의 눈으로 올라왔다. 약간은 기가 막힌 듯, 제아의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었다.

어두운 차 내부에서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커다란 눈이 이 순간마저도 예뻐 보인다는 게 씁쓸한 도준이었다.

“결론은 트라우마 안 생겼잖아.”

“조금만 더 늦었으면 생길 뻔했어.”

그답지 않은 불평을 하는 이유를 제아가 모를 리가 없다.

모른 척해주지만 비의 트라우마가 도졌다는 것도. 첫 번째 카드를 쥔 도준이 자신이 이별을 택한 거라 오해를 했다는 것도.

메시지를 보낸 대로 쇼핑백을 한 개만 더 열어봐도 되었을 것을.

모든 게 정석인 도준이 가끔씩 이렇게 어긋나는 게 꼭 이럴 때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참 섬세하고 민감해, 가만히 보면.

그놈의 트라우마는 왜 이렇게 잘 생기는 건지. 온몸을 다 바쳐 극복시켰던 비의 트라우마는 왜 다시 돋고, 이젠 밸런타인데이 트라우마까지 생길 뻔했다니.

유리처럼 소중히 다루어주어야 하나, 고민까지 될 정도였다.

그러니까 누가 쇼핑백을 한 개만 열어보래?

어찌되었든 도준의 심장을 내려앉게 한 죄인이 바로 본인이니. 차의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며 제아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 아무래도 신기 있나 봐. 옷 젖을 줄 알고 준비한 것처럼…….”

물세례를 호되게 맞았으니 말이다. 차가 식어서 망정이지.

무슨 소리냐는 듯 도준이 시선을 부딪쳐오자 제아는 그제야 침묵했던 입을 열었다.

회의실에서, 그리고 본가에서 한 회장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물론 한 회장에게 찻물 세례를 받았다는 부분에서 울컥할 뻔했지만, 그것마저 덤덤한 일상처럼 흘려버리는 제아 때문에 내색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이었어.”

도준이 냉혹한 직언을 흘리자 제아는 서운했다. 정말, 혹시나, 설마 하며 1%의 희망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걸 왜 몰라주는지.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한 회장도 도준의 가족이다. 그런 한 회장에게 이쁨 받은 손자며느리가 되고 싶은 건 너무 과한 욕심이었던 걸까.

어찌되었든 한 회장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희생하는 건 도준뿐, 자신은 하나도 없으니까.

“진심을 내보이면 그래도 혹시나 날 허락해주지 않을까 했어. 오빠 어머니는 아니어도 회장님은…… 다를 줄 알았거든.”

지하철역에서 도움을 주고 가는 제아의 손에 홍삼 캔디 하나를 쥐여주던 한 회장의 손은 따스했었으니까.

“웃어른이 대답을 듣길 원하시니 해드리는 게 예의잖아. 내가 또 틀린 거야?”

그놈의 예의, 이럴 땐 좀 차리지 않으면 안 되나.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구기긴 하지만 도준은 꽤 기분이 좋았다.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결론은 제아가 당차게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얼마나 야무지게 일침을 쏘았을지, 그리고 한 회장이 얼마나 노발대발했을지 상상이 된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겨내고 이렇게 제 모습으로 돌아와 준 제아가 자랑스럽다.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아주어서 고맙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배우고 강해지는 내 여자.

“오빠한테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할 것 같았어. 물론 오빨 믿지만 그래야 오빠랑 나 둘 다 후회를 안 할 것 같아서. 회의실에서처럼 내가 한 회장님한테 또 밀리면 오빨 포기하는 거고, 오빠도 내가 회장님 집에 있는 동안 그 앞에서 기다리면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 아니야. 나와…… 제일 그룹에 대해서. 나 신경 쓰지 말고 오빠 혼자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했던 거야. 물론 찻물 세례 받고 나와서 오빠 본 순간 엄청 후회하긴 했지만.”

그게 바로 침묵의 이유라니. 그 침묵이 얼마나 그를 불안하게 했는지도 모르면서.

“뭐 결론은 회장님한테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 오빨 버렸음 버렸지 나 같은 손자며느리는 진짜 싫으시나 봐. 조금만 방에서 늦게 나갔으면 회장님이 던진 뭔가에 내 뒤통수 구멍 났을지도 몰라.”

제아가 해맑게 웃지만 그 웃음 속에 묻힌 상처가 도준은 자꾸만 거슬린다. 그의 심장을 쿡쿡 찔러서 아픔을 전달했고, 그 아픔에 도준은 어떤 결심을 했다.

“할 만큼 했으니 넌 이제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오빠, 속 썩이는 건 나 하나로 족해.”

서늘하게 젖은 제아의 손이 도준의 손을 가만히 그리고 꼭 잡았다.

“오빠까지 그러지 마. 못된 꽃뱀에 홀려버린 순진한 손자 노릇 좀 해줘. 그래야 회장님도 조금이라도 화가 덜 나시고 또 나도 그게 편해. 나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오빠까지 막돼먹은 불효자식으로 만들고 싶진 않다는 뜻이야.”

욕먹는 건…… 나 하나로 족하잖아. 도준이 전에 했던 것처럼.

―불효 저지르는 건 나 하나로 족해. 그러니까 넌 어머니 말 거역하지 마.

자신은 욕먹어도 제아만은 최대한 욕먹지 않게 하려는 도준의 마음, 제아는 지금 그걸 배워서 되돌려주는 중이었다.

“알았지?”

타들어가는 제 속도 모르고 제아는 그저 배시시 웃는다. 저렇게 예쁘게 웃어버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제아는 뒷좌석에 있던 쇼핑백을 집어서 도준에게 내밀었다. 확인해보라는 듯.

마지못한 듯 도준이 손을 움직였다.

첫 번째 쇼핑백은 비비드한 딥블루와 강렬한 빨강색 후드가 들어 있었다.

<근데 내 스스로는 오빠를 못 놔줘. 그러기엔 오빨 너무 사랑하거든.>

그다음은 색감이 예쁜 커플 청바지.

<마지막 기회야. 지금 안 떠나면 절대 못 떠나.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선택해.>

새하얀 커플 운동화.

<지금 당장 차를 몰고 여길 떠나던지. 아니면 내가 고른 커플룩을 입고 날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궁금함에 얼른 다음 쇼핑백을 열자 검은색 커플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모자는 뒷전, 도준은 카드를 집어 들었다.

<궁금하지? 다음 말은 내 입으로 직접 해줄게. 제일 그룹과 가족을 잃는다고 해도, 오빠가 날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마지막 카드의 내용을 확인한 도준이 시선을 틀었다.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선택을 다시 제아에게 번복해주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나한텐 너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말해 봐.”

조금은 급하게 재촉을 하자, 제아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었다. 사람 애간장 타게 말이다.

제아는 살그머니 몸을 기울여서 도준에게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입술을 작게 오물거렸다.

“선택 후회하지 않게 평생 잊지 못할 밸런타인데이로 만들어줄게.”

아슬하게 겹친 제아의 몸에서 한 회장이 즐겨 마시는 민들레 차의 향이 났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하지만 가는 팔로 수줍게 목을 감싸는 제아의 손짓과 수줍은 속삭임에 도준의 심장은 제대로 타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한도준 씨, 오늘 나랑 데이트 할래요?”

은밀하게 부딪치는 눈빛이 ‘이벤트 마음에 들어?’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도준은 제 목을 감싸고 있던 가는 팔을 잡았다. 그러곤 제 가슴으로 가져갔다. 카드 한 장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의 박동을 한번 느껴보라고.

“제아 너, 다신 이런 이벤트 하지 마.”

두 번 받았다간, 심장마비로 쇼크사 할지도 모른다.

***

도준의 차가 홍대로 향하는 도로를 내달렸다. 유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세차게 내렸던 빗줄기는 소나기였던 듯 거의 말라 있었다. 차에서 먼저 내려 보닛을 돌아오는 도준을 보며 제아는 생각했다.

저 남잘 누가 30살이 넘은 아저씨라고 생각하겠어.

딥블루의 후드 때문에 하얀 피부가 더 도드라지고, 훤칠한 장신 때문에 청바지 발도 죽여줬다. 거기에 하얀 운동화에 검은 모자까지. 앳된 대학생 또는 잘나가는 모델처럼 보였다.

차문을 열고 손을 내민 도준에게 제아는 깜찍하게 손 화살을 쏴주었다.

“오늘은 내가 풀코스로 쏩니다!”

물론 ‘비싼 것 못 사드립니다.’라는 말은 분위기상 생략.

서로의 손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깍지를 꼭 끽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플룩으로 빼입고 홍대 거리를 거닐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행복함을 만끽하며. 하염없이 걷다가 노점상이 즐비한 거리에 다다르자 제아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에 불안함을 느끼는 순간, 브랜드도 없는 모자가 머리에 다시 씌워지고 차 한 대 값은 되는 시계가 풀러지고 이니셜 팔찌가 채워졌다. 모자든 팔찌든 모두 그의 취향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아이템도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도준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커플 아이템을 고르며 고민하는 제아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내가 언제 널 이렇게 웃게 해준 적이 있던가 싶어 자책감이 들었다. 정작 사랑한다고 밀어붙여서 싫다는 널 붙잡고서는 마음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지금까지 행복했던 건 도준 자신뿐인 듯했다. 마음고생은 오로지 제아의 몫이었을 테니.

커플 아이템을 고른 제아의 관심이 머리핀으로 옮겨갔다.

“어떤 게 더 예뻐? 예쁘긴 이게 더 예쁜데 나한테는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구.”

두 개의 머리핀으로 긴 머리를 틀어 올린 제아가 핑그르르 돌아섰다. 결론은 ‘뭘 해도 예뻐.’라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흔한 심리.

로맨틱한 연애를 하는 법을 검색하던 중 우연히 읽었던 소절이 떠올랐다.

<한국의 남친님들,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팁 공유합니다. 여자들이 쇼핑할 때. 그리고 여자들이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 똑같아 보이고 별로 같아 보여도 다 예뻐라는 말과 함께 대충 찍어서라도 꼭 골라주세요.>

머리핀은 똑같아 보이지만 뭘 해도 다 예쁘다는 건 진실이다. ‘넌 뭘 해도 예쁘니 아무거나 사.’라는 진심을 말하고 싶지만 그러면 서운해하겠지.

그때 똑같은 수난을 당하던 옆 커플의 남자가 드디어 폭발했다.

“아 씨, 똑같아 보이고만. 그 머리띠 들고 지금 몇 분째야, 여기서? 안 비싸니까 그냥 둘 다 사든지!”

‘저놈은 오늘 하루 종일 여친의 곱빼기 짜증 예약.’이라고 생각하며 도준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했다.

“둘 다 잘 어울려. 근데 오늘은 검은색 추천해주고 싶네. 후드가 빨간색이라 검은색이 더 예쁠 것 같아서.”

황홀한 표정으로 도준을 훔쳐보던 옆 커플 여자의 눈이 제 남친에게 다시 박히는 순간, 확 옆으로 째졌다. 얼굴도 더 오징어 같은 게 넌 말하는 것도 오징어니!

남친에게 격렬하게 따져드는 눈빛. 그걸 모른 체하며 도준과 제아는 머리핀을 계산한 후 그 곳을 유유히 떠났다.

“꼼장어 먹으러 가자!”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오늘의 저녁 메뉴는 바로 추억의 장어구이였다.

지금의 도준과 제아를 있게 한 부산 출장.

나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장어’라는 말에 도준의 어깨가 미세하게 솟은 걸 제아는 기가 막히게 캐치했다.

“왜, 싫어?”

묻는 눈빛은 앙칼지게 치켜 올라가서 마치 도준을 협박을 하는 것 같았다.

“싫진 않아.”

“그럼 가자! 내가 기가 막힌 맛집을……?”

앞장서려는 제아의 팔목을 도준이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집밥 먹고 싶어.”

부드럽고 나직하게. 유혹하듯이 도준이 말을 이었다.

“나 힘나게 내 집에서 밥 해줘, 제아야.”

밥, 밥이라. 힘이 나려면 밥심이 필요하지. ……근데 밥심이라면?

화들짝 놀란 제아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가슴을 크로스해서 가렸다.

“우씨! 그쪽 이벤트는 생각 안 했거든?”

정말 순수하게 집밥을 원했건만. 새빨개진 얼굴을 보건데 제아가 무엇을 생각했을지 감이 잡히는 도준이었다. 아직까지도 수줍어하는 제아가 귀여워서 도준은 잠시 그 모습을 즐겼다.

제아가 코를 찡긋거리며 손가락을 들어 훠이훠이 저어 보였다.

“한도준 씨, 걸핏하면 막 야하게 유혹하기 있기 없기? 오늘만은 제발 짐승 되지 말고 젠틀하게 데이트를, 아얏!”

도준이 손가락으로 제아의 코끝을 튕긴 것이다. 쓸데없는 상상 좀 그만하라는 듯.

“기분이 꽤 나쁘군. 나를 짐승이라고 하다니.”

그럼에도 도준의 말투나 눈빛은 전혀 화나 있지 않다. 부드럽고 그윽하기만 했다. 아 씨, 내가 유혹하고 싶잖아!

제아는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오빠 침대에선…… 짐승 맞잖아.”

입술을 오므리며 들릴 들 말 듯 대답한 걸 도준이 들었을까.

“너만 보면 침대에 데리고 가고 싶다는 건 인정. 하지만 그것에 미쳐 날뛰는 짐승은 아니야.”

노골적인 직언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화르륵 달아오르는 제아의 귀에 도준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붙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는 눈치 있는 짐승이지.”

그럼에도 제아의 의심이 가시지 않자 도준은 순간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렇게 짐승같이 몰아 붙였었나 정말. 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도 해줘야 하나.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사심 없이 순수하게 밥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그 후 둘만 있는 상황에선…… 나도 장담 못 하니까.

도준은 결국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래. 금방 올 테니까 내 집에서 기다려. 삼 인분 먹을 테니까 맛있는 거 많이 해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아를 도준이 사르륵 품에 끌어안았다.

“최대한 빨리 올게.”

***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본 제아는 봉투를 한가득 품에 안고 도준의 집에 들어왔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헬퍼를 그만둔 후 이 집에서 요리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대놓고 ‘네가 헬퍼인 걸 알아.’라고 도준은 말한 적도 내색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미 눈치 채고 배려를 많이 해주었다는 걸 제아도 알고 있었다. 훌쩍 오른 월급에 척척 피해주는 시간대까지.

물론 지금은 제 스스로 도준의 헬퍼를 자처하고 나섰다. 헬퍼가 아닌 연인으로서 말이다.

―오빠에 대해서 잘 아니까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해주면 되잖아.

다른 헬퍼가 고정으로 방문하고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들려서 확인을 해주고 있었다.

“오빠가 늦어도 1시간 30분 안에는 온다고 했는데.”

충분한 것 같으면서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메인 요리는 해물탕과 갈치조림, 갈비찜과 잡채였다.

손이 많이 가는 해물을 도준은 잘 먹지 않지만 시원한 해물탕의 국물은 좋아한다. 그럼에도 메인 메뉴로 선택한 건, 해물은 내가 발라주면 되니까.

메추리알 장조림은 필수였고 황태 무침과 어묵 볶음, 부추 무침, 감자볶음까지 준비하느라 제아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후각에 민감한 도준을 위해 환기를 하고 캔들을 피워 냄새를 최대한 지워가며 요리를 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양이 족히 4인분은 나올 것 같았다.

“너무 많나?”

입이 짧은 도준이지만 3인분을 먹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 적어도 한 그릇 이상은 먹으리라. 쓸데없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배가 많이 고픈가 보지 뭐.”

역시 밥은 압력밥솥이 찰지고 맛있지! 쌀과 잡곡을 혼합해서 과감하게 4인분을 계량해서 밥을 올리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제아의 손이 핸드폰 액정을 터치했다.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일이 빨리 끝났나?

앞치마에 손의 물기를 닦으며 제아는 빠르게 현관문으로 향했다.

“완전 신혼부부 같잖아. 문도 직접 열어주라고 하니까.”

오늘 집밥을 고집하더니 이젠 직접 문을 열어주며 따스하게 맞아주길 바라나 보다.

퇴근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는 와이프가 된 기분, 그 기분을 도준도 느끼고 싶은 걸까.

외부인이라면 경비실에서 인터폰을 했을 테니, 당연히 도준일 거라 생각하며 의심 없이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착오가 일어났다. 그것도 엄청난. 도준일 줄 알았는데, 아담한 체구에 단아한 외모, 그의 어머니인 연희가 서 있었다. 도준이 아닌 제아가 있는 게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을 한 채.

“제아 양이 비켜줘야 내가 들어갈 것 같은데.”

제 아들집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재벌가의 외동딸이라 그런 건지 연희는 너무도 당당했다. 하마터면 비켜설 뻔했다. 도준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게 말이다.

“죄송합니다. 오빠한테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아서 제가 비켜 드리기가.”

말은 곧바로 잘렸다.

“그럼 제아 양이 나올래요?”

이로써 분명해졌다. 연희의 목적이 도준이 아닌 제아 자신이라는 것을.

심하게 손끝이 떨려왔다. 단순한 노기를 뿜어낸 한 회장과 다르게 연희에게선 뼈까지 스며드는 얼음장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원래대로라면 따라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행복해야 하는 날이다. 자신이 아닌 도준이.

여자의 빠른 직감이 속삭인다. 따라나서는 순간, 오늘의 행복은 산산조각 날 거라고.

“죄송하지만 내일이라도 전 괜찮으니까 하루만 미루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아 양 다음은 도준인가 보죠?”

“……?”

“도준이가 아빠를 만나서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급하게 볼일이라는 게 설마. 어쩐지 얌전하게 넘어간다 했더니. 제아는 암담함에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해 볼 게 많은 우리야 그렇다 쳐도 이득 볼 게 많은 제아 양 부모님이 도준이를 반대하는지.”

느닷없는 꺼낸 말을 멈춘 연희가 싸늘하게 웃는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소름 돋는 미소에 바짝 경계심이 곤두서는 순간…….

“그 이유, 궁금하지 않아요? 난 오늘 제아 양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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